전쟁은 끝났다. 덴버 시내의 한 우정청에서 근무하는 메리 모건스턴에게 그 소식은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도착했다. 전보나 우편을 다루는 직업상의 특권 덕분은 아니었고, 그녀의 책상 바로 뒤에 사무실 공용 라디오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그 길로 바로 휴가를 내고 기차에 올라타고 싶었지만, 그녀의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먼 대양의 이름 모를 섬에 붙들려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소식은 그가 부상병으로 분류되어 귀환 작전에 우선순위로 포함된다는 점이었다. 장군인지 제독인지 요직에 오른 인물이 서명한 편지가 드디어 우편함에 꽂혔을 때, 메리는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짐가방을 챙겼다. 그녀는 콜로라도에서 와이오밍의 샤이엔으로 갔고, 또 한 번 주 경계를 넘어 유타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기차를 옮겨 타 네바다의 윈네무카를 거쳐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를 지나 마침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리는 난장판이었다. 군복 차림의 청년 한 무리가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의 치맛자락을 들치며 낄낄거렸다. 길바닥에는 곳곳에 젖은 색종이 조각과 구토의 흔적이 누덕누덕 묻어 있었다. 내륙에서는 생전 맡아보지 못한 짭조름한 바닷바람이 지척에서 불어와 여름 햇살의 강렬한 열기와 뒤섞여 대기를 달구었다. 

  덴버는 점잖은 도시였다. 콜로라도에서는 가장 번화했지만 향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숙한 여인이며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모건스턴은 종전의 기쁨보다도 그것의 과격한 표출 방식에 다소 움츠러들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방의 손잡이를 모아 쥐고 종종걸음으로 기차역을 벗어났고, 몇 걸음 못 가 멈춰 섰다.

  “떨어뜨리셨어요.”

  메리를 붙잡아 세운 사람은 깜짝 놀랄 만큼 매서운 미모의 중국인 처녀였다. 물론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미국식 영어를 구사했지만, 어쨌든 중국인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메리는 짐작했다. 한창 온 나라가 승전의 기쁨에 취한 이 시기에 부둣가에 나올 만큼 용감하고 멍청한 일본인은 없을 테니까.

  여자의 주먹 쥔 손가락 사이로 반짝이는 줄이 늘어져 있었다. 그제야 쇄골 부분이 허전하다는 걸 깨달은 메리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스친 생각은, 이것이 어떤 신종 사기 수법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메리는 고향의 성당 주임 신부가 늘 강조하는 관용과 사랑의 교리를 떠올리고,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아가씨.”

  “아드님이신가 봐요.”

  중국인 처녀가 물건을 건네며 말했다. 금은 아니었고 값비싼 보석이 달려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아들이나 지아비와 헤어져야만 했던 전시의 다른 모든 아낙들과 같은 이유로 메리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목걸이였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로켓의 헐거운 잠금쇠가 벌어진 탓에 그 안에 든 빛바랜 사진이 드러났다. 왼쪽의 흐릿한 세피아 색 조각 속에는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잔디밭에 앉아 활짝 웃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메리 자신이 장성해 군복을 입은 청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메리는 달칵 소리가 나게 로켓을 닫고는 핸드백에 목걸이를 쑤셔 넣었다.

  “그렇답니다. 오늘 태평양에서 돌아오죠.”

  “아드님께서 참 훌륭한 일을 하셨어요.”

  “네, 그렇죠.” 메리는 손을 가슴께로 모아 꼭 쥐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그 애는 제 할 일을 다 했어요.”

 

 

*

 

 

  메이휘는 걸음을 재촉했다. 동생의 일터는 부두 남쪽의 조선소였다. 그녀는 웨이리가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애가 샌드위치나 볶음국수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 쾌활하게 손을 흔들며 아침 일찍 현관을 나서면, 메이휘는 그녀가 관측할 수 없는 어느 아주 높은 곳, 이를테면 덜 건조된 갑판이나 선수 끄트머리에 닿도록 설치된 비계 따위에서 동생이 떨어져 다치는 상상을 끝없이 되풀이했다. 바닥에 널브러져 뒤통수가 반으로 깨진 웨이리. 목덜미를 타고 흐른 피가 시멘트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지만 그 애의 얼굴은 여전히 집을 나설 때처럼 방긋방긋 웃고 있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식당 일을 보러 나간 사이 홀로 남아 집을 부지런히 쓸고 닦으며, 메이휘는 거실 협탁의 전화기가 그녀의 심장을 무참히 찌그러뜨리는 소식을 전하지는 않을까 항상 마음을 졸였다.

  그리고 오늘, 8월의 셋째 주 금요일에, 기어이 그녀를 찾는 전화가 오고 말았다.

  메이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마침내 전화를 받을 용기가 나기까지 수신음이 세 번이나 울렸다. 땀이 밴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다 미끄러져 놓쳤다. 길고 매끈한 손가락이 허겁지겁 전화선을 끌어당겼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 전신을 휘감았다.

  “여보세요?”

  "메이메이?"

  대뜸 애칭을 부르는 목소리가 발랄했다. 메이휘는 긴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응, 웨이리… 무슨 일이니?"

  "도시락을 두고 왔어! 메이메이, 가져다줄 거지? 응? 응? 반장님이 말하기를, 난 밖에 나가서는 안 된대. 나가게 해주면 절대로 오후 작업 재개 시간에 맞춰서 돌아오지 않을 거래! 그러니까 누나가 오지 않으면 난 굶어 죽어버릴 거야!"

  동생이 재잘거리는 사이 메이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수화기를 들고 전화선을 늘어뜨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들은 대로 조리대에 양철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늠름한 양치기 개가 풍성한 고동색 털을 휘날리며 들판을 내달리는 그림이 겉면에 그려져 있는 노란 도시락통으로, 웨이리의 것이었다.

  "그래. 전차를 타고 가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는 도착할 거야."

  "고마워, 메이메이. 누난 최고야!"

  수화기 건너편에서 여러 차례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웨이리는 인사를 기다리지도 않고 불쑥 전화를 끊었다.

  늦지 않게 찾아가야 이 여정이 무의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계속 되새기는데도 신발 밑창이 자꾸만 녹진한 껌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달라붙어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도로 한복판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가여운 여인을 그대로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메이휘는 부러 시간을 축내며 걸쇠가 고장 난 목걸이의 주인과 시답잖은 대화도 나눴다. 얼마나 편리하고 무책임한 얘기인지. 전쟁에 나간 청년들의 사명은 생존해 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명은 조국에 승리를 가져오고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개개인의 생과 사는 아주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고, 조국은 그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나 메이휘는 마냥 그 여인을 비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녀 자신이야말로 오전에 동생에게서 걸려 온 전화가 유령의 장난은 아닌지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건 좋은 일이야.' 메이휘는 생각했다. '두 눈으로 직접 작업장을 보고 나면, 더는 그 애가 그곳에서 다칠까 봐 두렵지 않을 테니까.'

 

 

  전차의 철봉을 붙잡고 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 바다에 가까워지다 보면 원경에 늘어선 선박들이 점차 거대해졌다. 육중한 기계가 삐걱대며 좌우로 움직이고 일꾼들은 부산하게 서로를 향해 고함을 쳐댔는데 그것이 도통 영어 같지가 않아서 메이휘는 조금 두려워졌다. 영영 웨이리를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담배를 꼬나문 일꾼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동생의 점심을 가져다주러 왔는데…."

  "사무실에 가서 물어보쇼."

  사내는 메이휘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저벅저벅 멀어졌다. 하지만 그가 사무실이 어디인지는 알려주지 않았으므로, 메이휘는 그 넓은 조선소 부지를 정처 없이 헤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림자가 드리운 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 안에서 미처 발견되지 못해 차게 식어가고 있는 동생의 죽은 육신을 발견할까 봐 얼마나 겁에 질려 있었는지! 그리고 드디어 밝고 또랑또랑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황급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 동생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다른 인부들이 오고 가며 그와 인사를 나누는 모습까지 지켜본 다음에야 그것이 환각이 아니라고 확신했을 때, 오, 그 안도감이란.

  웨이리는 등 뒤로 손을 넘겨 깍지를 끼고 지루한 일상 속에 새롭게 나타난 인물의 주위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말을 뱉어냈는데, 곁에 선 남자는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고 더 드물게 한두 어절을 ('네,' '아니오.') 발음할 뿐이었다. 남자는 자세가 매우 꼿꼿했고, 군모를 벗어 가슴 앞에 쥐고 있었다. 유모차에 실려 다니던 시절에는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는 고운 금발이었을 머리카락은 병증인지 전쟁의 후유증인지 거의 새하얗게 샜다.

  메이휘는 먼발치에서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저 낯선 백인 남자가 어떤 여인을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이가 자신을 만나러 오기로 한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웨이리는 신나게 누군가를, 아마도 현장 책임자를 부르러 건물 안으로 도로 달려 들어갔고, 메이휘는 구태여 그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남자는 햇볕 아래에서 눈을 찡그리며 가장 가까운 배 꼭대기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발치에 시선을 고정했다.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메이휘가 어깨 너머에서 속삭였다.

  남자가 움찔거리며 돌아섰다. 그녀가 다가오는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놀랐지만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 어머니에 대해서 당신이 뭘 압니까?"

  그가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마주쳤거든. 기차역 근처에서…." 메이휘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당신 어머니 맞지? 붉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목걸이에 아들의 어릴 적과 입영 전 사진을 넣어 다니는 분."

  울리 모건스턴은 어머니를 어머니가 아니라고 부정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모친을 배신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어 열세에 몰리자 그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어머니를 만나지도 않고 이곳에서 무얼 하는 거냐고 추궁당하기 전에, 종소리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명랑하고 시끄러운 소년이 돌아와 그를 구했다.

  "울리, 감독관님이 지금 만나보시겠다고 들어오래요!"

  웨이리가 두 사람 사이를 불쑥 파고들었다. 울리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메이휘만 동생과 눈을 맞추며 가져온 도시락을 건네주었다. 웨이리가 정신없이 환호성을 지르고 메이휘를 껴안았다가 도시락통을 공중으로 던졌다 받는 사이 울리는 홱 돌아서서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둘이 무슨 얘기를 했어?"

  소년이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투로 누이의 팔뚝에 매달려 답을 재촉했다.

  "전쟁에서 이겨서 다행이라고 했지." 메이휘가 살포시 미소 지었다. "어디서나 다들 그 얘기 중이잖니."

 

 

*

 

  

  마르가레테가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의 오보에 연주자로 근무한 지도 벌써 6년이었다. 그녀의 모친은 늘 짓궂고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는데, 마르가레테의 생물학적 친부가 나타나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가겠다 선언했을 때도 "잘해 보라"며 담배 연기를 내뿜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 왔다. 기회의 땅, 아메리카에. 이제 이 나라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고 그것을 기념하는 연주회가 끝도 없이 열릴 예정이었다. 승전은 예술계에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이제 영화인들과 음악가들은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몰기 위한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그들 고유의 독창성을 반영한 작품을 만들고, 그것을 지폐 다발과 교환하는 데 전적으로 몰두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르가레테는 아주 바빠졌고, 그녀의 출신을 지독히도 모욕하는 동료들과 어깨를 부대며 악보를 넘겨야만 했다.

  "그 말 더듬는 버릇 하며, 끔찍한 문법과 발음도!"

  "'잰, 잰, 잰프란지스코에 6년 살아요.'"

  "'도요일 연습은 취, 취소된 게 맞나요… 아니면?'"* 

  "'아니면,' 그다음은? 문장을 제대로 끝마칠 줄도 모르는 종족이니 전쟁에서 지는 수밖에."

  한바탕 떠들썩한 웃음소리에 시가를 마저 흡입하기 위한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잿빛의 통 넓은 정장 바지를 입고 뒤통수가 벗겨진 신사들은 니코틴을 충전한 뒤 그들의 동료 연주자에 대한 험담을 이어갔다.

  "데겐도르프 출신이라던데."

  "아, 아름답고 푸른 곳에서 오셨군."**

  "자네가 언제부터 구대륙 지리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서 특집 기사를 실었거든. '드레스덴, 그곳은 어디인가?' 라고."

  "그것참 흥미로웠겠네."

  "글쎄, 덕분에 안사람만 신났지. 스크랩 북에 오려 붙일 근사한 사진이 무척 많다고 말이야."

  마르가레테는 속으로 숫자를 10까지 세고 (물론 독일어였다. 저 치들이 그녀의 속마음까지 읽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흥분해서 조롱해댔을까?) 합주실 문을 밀어 열었다.

  웃음기를 채 지우지 못한 표정으로 양복쟁이들이 그리 점잖지 못하게 눈빛을 교환하더니 마르가레테를 향해 턱짓했다. 마르가레테 역시 꾸벅 묵례하고는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왔다.

  거리는 어둑했다. 그녀의 작은 아파트로 돌아가려면 시내를 가로질러야 했다. 샌프란시스코는 하나님의 왕국과도 같아서 고도가 높아질수록 모든 게 더 근사해졌고 마르가레테의 집은 지옥 한가운데에, 부둣가 근처에 처박혀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은 하늘 위도 땅 아래도 아닌 바로 그 중간지대였기 때문에 계절이 존재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여름은 대체로 쌀쌀한 편이었다. 밤에는 특히 더더욱. 그녀는 깡마른 어깨에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악기 케이스를 고쳐 멨다. 전차는 이미 끊긴 뒤였다. 가슴이 답답해 바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성냥을 긁으며 마르가레테는 생각했다. '욕조에 들어가 와인을 한 잔 마시면 피로가 풀리겠지.'

  비록 그 집에는 그녀의 어머니 카탸도 동생 푸스타도 없었고, 수면이 유리알처럼 반짝이는 호수를 끼고 있기는커녕 점유권을 반쯤 쥐 떼에 빼앗긴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그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삼십 분 뒤, 마르가레테는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싸구려 적포도주를 들이켜는 대신 숨을 헉헉 몰아쉬며 아파트의 층계를 오르고 있었다. 운명은 또 한 번 그녀를 배반했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기대를 배반당하는 일, 더 나아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옥상에는 한 남자가 떨어질 듯 말 듯 앞으로 몸을 한껏 기울이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 

  "죽, 죽으려는… 건가요? 왜…."

  난간 위의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나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마치 합당한 근거라도 되는 양 그가 짓이기듯 뱉었다. 그는 '동조'나 '방관' 따위의 어휘로 죄를 에둘러 인정하는 교활한 화법은 알지 못했다. 마르가레테는 그를 향해 한 발 나아갔다.

  "당, 당신이 그러지 않았다면 제 동생이 더 많은 사람을 죽여야 했을 거예요." 푸스타는 새파란 눈을 가진 젊고 건강한 아리아인이었다. 제3 제국은 그런 청년들을 결코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전쟁이 엊그제 끄, 끝나지도 않았을 거고요."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거예요."

  남자가 무뚝뚝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마르가레테는 완고했다.

  "아니요, 끝났어요. 이, 이름이…."

  "울리 모건스턴."

  "그래요, 모건스턴 씨. 그건 독일식 성이네요…." 마르가레테가 참지 못하고 흐흐 웃음을 흘렸다. "울리히 모어겐슈테른."

  눈썹이 언짢게 뒤틀렸다. "내 증조부가 독일인이었죠. 그게 우습습니까?"

  "네, 어떤 측면에서는요. 하지만 지금 당신은 가슴에 별과 줄을 달고 있어요. 살아,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겠죠. 모건스턴 씨…."

  남자가 우울한 두 눈으로 말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마르가레테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앞으로 당신에게 이 말을 해 줄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말, 말해 드릴게요."

  "……."

  "죽어버려, 울리 모건스턴."

 

 

*

 

 

  "어이, 차이니. 왜 멍하니 서 있어?"

  "신입 말이에요, 모건스턴 씨요. 그제부터 출근을 안 했어요!"

  웨이리가 비어 있는 출근 카드를 흔들어댔다.

  프랭키는 헛기침을 했다. 그는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베들레헴 제철의 조선소 작업반장으로서는 아니었고, 딸아이가 여덟 살일 때, 그 애가 애지중지 기르던 토끼가 죽었다. 그의 아내가 발견하고는 아이가 깨기 전에 프랭키가 시체를 뒤뜰에 묻도록 했다. 그리고 부부는 딸에게 그들의 토끼가 토끼들만 갈 수 있는 북부의 어느 농장으로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었다.

  프랭키에게는 형도 있었다. 칼 오브라이언. 1차 대전에 참전했고 지금은 코네티컷의 어느 농장에서 일을 거들며 산다. 전쟁 전에 그는 전도유망한 젊은이였다. 어머니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아들이었고 동생들에게는 가장 인기가 많은 형제였다. 칼은 어린 프랭키와 여동생을 옆구리에 끼고 마당을 뛰어다니거나 어머니와 함께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그는 아버지가 딱 좋아하는 비율로 술을 섞는 법을 알았고 선생들의 마음에 쏙 드는 수필을 쓰는 법도 알고 있었다.

  전쟁 뒤에는 그 모든 게 산산이 조각났다.

  칼은 더 이상 예전의 자랑스럽고 총명한 장남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그를 외숙부의 농장으로 보냈다. 프랭키는 고작 몇 년 차이로 첫 번째 전쟁에도 두 번째 전쟁에도 출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한 사람을 어떻게 부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어린 세대가 그 비극을 배워야 할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꼬마야, 그는 집으로 돌아갔을 거야." 프랭키가 소년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어쨌거나 그 청년은 이미 우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만큼 했잖니."

 

 

*

 

 

  9월의 첫 일요일,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지구 반대편의 미합중국은 아직 주일에 이르기 전이었고, 메리 모건스턴 부인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홀로 자택에 돌아온 지는 2주째였다.

  멀대 같은 인영 하나가 현관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똑똑,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 메리 모건스턴은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녀는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카슨 매컬러스의 신작을 읽다 잠시 곯아떨어진 참이었다.

  똑, 똑, 똑, 하고 누군가 연이어 세 번을 노크했고, 그 소리는 무척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절제되어 있고 강단이 있었다. 메리는 달콤하고 치명적인 낮잠에서 퍼뜩 깨어났다.

  "누구세요?"

  메리가 물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심장은 이미 아주 빠르게, 아주 거칠고 시끄럽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쿵쾅거리는 소리 때문에 답을 듣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현관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메리는 조급하게, 초조하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눈앞에 두고 인내심이 바닥 난 아이처럼 손잡이를 잡았고, 돌렸고, 잡아당겼다 — 언젠가 먼 옛날, 존 모건스턴이 그랬듯이. 그가 아직은 비겁하고 실망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을 때, 아직 그녀의 심장을 반으로 찢고 미련 없이 돌아서지 않았을 때, 이웃이 연주하는 피아노의 선율에 맞추어 뒤뜰에서 메리 모건스턴의 손을 맞잡고, 그녀를 멀리 보내며 한 바퀴 반을 돌리고, 다시 한 바퀴 반의 궤적을 따라 그의 품 안으로 돌아오게 했을 때, 그때 그가 힘차게 아내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던 것처럼 — 세게.

  메리는 문을 열었다. ■

 

 

 

 

 

 

 

 

 

 

 

* 독일어에 친숙한 화자가 영어를 구사할 때 자주 범하는 오류. 'S'를 'Z'로 발음하고, 현재진행형이 들어가야 할 곳에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며, 문장 끝에 부적절하게 'or'를 붙이는 언어 관습 등을 들어 마르가레테를 조롱하고 있다.

**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가리킨다. 도나우 강은 데겐도르프 남쪽 경계를 따라 흐른다.

 

(2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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