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가 곡선을 그리며 천장 가까이 날았다. 캐씨디는 길고 매끈한 팔뚝을 갖고 있었고, 하룻밤에도 몇 번씩이나 폼폼을 들고 공중에 뛰어올라 양팔을 곧게 뻗는 치어리더였다. 이제 두 사람 다 대학을 졸업했고, 짧은 치마와 달라붙는 상의로 구성된 적색 유니폼은 특별한 밤이 아니면 입을 일이 없었지만, 그녀의 늘씬한 팔과 그로부터 뻗어나온 서브는 여전히 아주 근사했다. 10점 만점에 8점 정도. 일부러 표적을 비껴 던지고 있어 감점이 됐다.

  운동선수로서의 본능과 철저히 훈련된 반사 신경이 그를 향해 날아오는 온갖 결혼 선물들을 낚아채거나 피하라고 종용했으나, 크루거는 다만 속으로 조용히 점수를 매기며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찻잔과 접시가 벽에 부딪쳐 산산이 깨졌다. 

  "나쁜 자식!" 캐씨디가 절규했다. "날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주근깨 박힌 뺨 위로 눈물이 방울졌다. 마음이 갈가리 찢겨 흐느끼는 와중에도 캐씨디는 아름다웠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를 원할 것이다. 크루거는 곧 전처가 될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오, 제이. 제발 그러지 마. 제발 날 떠나지 마. 응?"

  도톰한 입술이 절박하게 크루거의 얼굴을 찾아 헤맸다. 입맞춤을 피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당신은 괜찮을 거야, 캐씨디."

  "나도 알아." 품 안에서 캐씨디의 팔다리가 전원이 꺼진 장난감처럼 축 늘어졌다. 그녀가 힘없이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괜찮아지고 싶은 게 아니야. 난 당신을 원한단 말이야."


  같은 시각, 약 1417마일 떨어진 도시에서, 다른 한 여인이 그녀의 남편에게 속삭였다.

  "더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크리스토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나탈리는?”

  “친구 집에. 조금 이따 데리러 가야 해.”

  캐서린이 손끝으로 와인잔을 튕겼다. 그녀의 어조는 치과 검진을 예약했다거나 택배가 오배송되었다는 등 동거인에게 알려야 할 최소한의 정보를 고지하듯 일상적이고 단조로웠다.

  "다른 남자가 생긴 거야?"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그렇게 물어 주기를 그녀가 원하고 있다고 느꼈고, 한때 자신을 사랑했던 여자를 위해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줄 수 있었다.

  "어쩌면." 캐서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뭔데?"

  캐서린의 녹갈색 눈이 그를 꿰뚫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부부는 지난한 이혼소송을 거치지 않기로 합의하고 조용히 함께하는 삶을 정리했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캐서린은 마침 버지니아의 주립대학교로부터 연구직을 권유 받은 참이었고, 크리스토퍼는 뉴욕에서의 삶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 불행을 감내하지 않는 이상 지속될 수 없는 결혼이었다. 이대로는 가여운 그들의 딸만 두 도시를 오가며 전학을 다니거나 멀리 기숙학교에 보내져 자랄 운명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순순히 양육권을 포기했다.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필요한 법이므로.

  나탈리는 부모의 별거를 예상 외로 무탈하게 받아들였다. 영민하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들의 딸에게는 가질 수 없는 것, 이미 지나쳐 온 것보다 앞으로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조만간 도래할 미래를 바라보는 재주가 있었다. 버지니아로 떠나면서 기존에 재학 중이었던 뉴욕 소재 마그넷 스쿨의 친구들과는 이별해야만 했지만, 나탈리는 눈 깜짝할 새 눈물을 그치고 새롭게 만날 또래 아이들과 이웃들을 향한 기대로 생글거리고 있었다. 그러한 기질은 아이의 양친 중 어느 쪽도 물려준 적 없는 것으로, 크리스토퍼는 그것이 나탈리가 살아남기 위하여 체득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좁은 골목에서도 해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내미는 들풀처럼.


  일꾼들이 모녀의 짐을 들어내는 동안, 미드타운 5번가의 코넬 클럽에 앉아, 크리스토퍼는 상념에 잠겨 있었다.

  웨이터가 그의 앞에 커피와 작은 은 숟가락, 각설탕이 든 통을 내려 놓았다. 십 대 후반의, 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청년이었고 몸가짐에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몹시 정중했다.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선생님."

  "고맙습니다."

  크리스토퍼는 계산서에 카드와 팁으로 줄 지폐 한 장을 끼워 내밀었다. 밝은 녹색 눈의 종업원은 예의 바르게 미소 짓고는 고객이 긴밀한 응대를 감사하게 여기는 데서 점차 성가시게 느끼게 되는 단계로 옮겨가기 전에 사라졌다. 자신만만하지만 경솔해 보일 정도는 아니고, 겸양이야말로 스스로를 뽐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는, 잘 교육 받은 좋은 집안의 자제임이 분명했다. 크리스토퍼는 그런 청년들과 말 한마디 섞지 않고도 그들의 자서전을 십수 권도 대필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상원의원 아버지, 대학 종신 교수인 어머니, 웰슬리를 졸업하고 옥스포드에서 석사 과정 중인 누나와 사관학교를 나와 갓 육군 소위를 단 형을 두고 그 자신은 예일과 다트머스, 코넬 사이에서 어느 학교가 과연 그의 청춘을 바칠 무대로 적합할지 고민 중일 것이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막내아들에게 코넬 졸업생인 아버지가 이곳에서 일하도록 닦달했겠지. 아버지의 동문들이 성공적으로 뉴욕에 자리 잡아 사회를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고 같은 길을 걷고 싶다고 혹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젊은이들을 속속들이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점은 크리스토퍼의 가장 큰 무기이자 또 치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그가 그들을 파악하고 있다고 자만하는 만큼, 그들 역시 크리스토퍼와 같이 '자수성가'한 엘리트들의 빈약한 배경과 얕은 뿌리를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해냈다. 필사적으로 버텼고 그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몇 년 내로, 아마 나탈리가 남자애와 생애 첫 키스를 나누기도 전에, 크리스토퍼는 로펌에서 시니어 파트너 직함을 따낼 예정이었고 딸아이가 졸업 무도회에 갈 즈음에는 그곳의 대표로서 당당히 성을 올린 뒤일 것이다.

  크리스토퍼는 설탕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잔을 홀짝였다. 한 손에는 신문을 쥐고 있었고, 귀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평소 그는 귀에 거는 수화기는 비서들이나 투자가들이나 쓰는 것으로 여기며 질색했으나, 멋대로 그에게 말을 붙여오는 불청객을 상대할 기분이 아닐 때는 일종의 방패로써 즐겨 착용했다.

  때마침 한 무리의 사내들이 대각선의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익숙한 얼굴이 간간이 섞여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이미 오늘 아침 사무실에서 읽고 나온 오늘자 조간 신문을 들어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와 같은 계층에 소속된 다른 모든 삼십 대 남성들과는 달리 크리스토퍼에게 대학 시절은 8mm 캠코더로 녹화된 홈 무비처럼 무턱대고 추억할 만한 영광의 시기는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십 년 전. 크리스토퍼는 스물네 살이었고, 전도유망한 아이비리그 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뉴욕의 어느 로펌에서 그에게 인턴십을 제안해 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같은 회사에 입사하게 된 로스쿨 동기의 어머니가 스튜디오를 비교적 싼 값에 세를 놓아 룸메이트로 들어가 살았다.

  처음 몇 주는 아주 좋았다. 뉴욕의 직장은 고향에 들르지 않아도 될 적당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마땅한 핑계 없이도, 크리스토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래로 인디애나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의 가족도 그를 찾지 않았다.

  딱 한 번, 2학년 가을 즈음, 어머니가 뉴욕으로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

  "네 아버지가 죽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에드나 하트가 말했다. "심장마비였어. 어쨌든 네게 알려주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렇군요." 크리스토퍼가 대답했다. 유감이라든지,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것이라든지, 유족에게 건네는 상투적인 위로의 말을 뱉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곧 아무런 인사 없이 전화가 끊겼다.

  크리스토퍼는 어머니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 크리스토퍼가 기억하는 에드나 하트는, 아버지보다 두어 살 어렸고, 말수가 매우 적었으며, 언제나 박스 와인을 끼고 살았다. 요리 솜씨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드는 음식은 무엇이든 무미건조한 맛이었다. 크리스토퍼는 어머니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을 아주 어릴 적에 한두 번 보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오렌지를 썰어 병에 넣고 탄산수와 와인을 붓고 있었다. 샹그리아를 만들던 중이었을 것이다. 파티가 있었던 건지, 그녀 자신을 위한 특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크리스토퍼가 부엌 문간에 나타나 그 주스를 맛보아도 되겠냐고 묻자, 에드나는 마치 치부를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 노래를 그쳤다. 그녀는 아들을 돌아보고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추수감사절을 함께 보낼 가족이 있건 없건 크리스토퍼는 그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하버드에서 왔다는 녀석들이 보기보다 그리 대단치 않았던 것이다. 직장 상사는 인턴들 중에서도 크리스토퍼를 특별히 아꼈고, 종종 그에게 다른 로펌에서도 제안이 들어왔는지, 졸업 후 곧장 이곳으로 올 생각이 있는지 떠보았다. 대형 로펌의 현역 변호사들은 탈무드 속 현자와 같은 로스쿨 교사들과는 정반대로 예리하고 유능한 전문가들이었다. 크리스토퍼는 가르침을 받은 척 상사의 비위를 맞춰 눈에 들기를 즐겼다. 가끔은 정말로 유용한 깨달음을 얻기도 했고, 그런 깨우침의 순간에는 드물게도 마음 깊이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가 이 위대한 빅 애플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 때문이었다.

  위기는 여름이 반쯤 지나고 닥쳤다. 그의 동료들이, 크리스토퍼가 단 한 번도 외설적인 밤을 경험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목요일 밤의 닉스 게임이나 브롱스의 버려진 신발 공장을 개조한 바에는 가 보았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신나게 어떤 의혹 — 크리스토퍼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swing the other way'는 — 을, 아무런 부담도 지지 않고 제기했고, 무죄의 증명 책임은 온전히 크리스토퍼에게 부과되었다.

  결국 54번 스트리트의 머저리들은 크리스토퍼를 헬스키친의 법정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개자식들.' 크리스토퍼는 예의상 주문한 잔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아직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지도 못했으면서 누구보다도 변호사답게 구는군.'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동행인들은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댔다.

 "저길 봐, 끝내주는 금발인데."

 "진짜일까?"

  "이 순진한 자식. 모든 금발은 어쨌든 조금씩은 가짜라고."

  지저분한 농담이 이어졌다. 크리스토퍼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헐벗은 여자들의 뒤꿈치나 목덜미에 달린 깃털이 허벅지를 스칠 때마다 혈색이 흐려졌고, 그럴수록 그의 일행은 시야에 들어오는 속옷 끈 하나하나에 지폐를 꽂아가며 상황을 부추겼다.

  무리 중 한 명이 크리스토퍼의 등을 툭 밀었다.

  "네 여자친구도 금발 아니었어? 가서 좀 즐기지그래. '애인이 그리워요, 당신은 그녀를 닮았군요' 하고 불쌍한 척 우는 시늉이라도 하면 젖이라도 빨게 해줄지 누가 알아."

  그가 무대 근처로 떠밀려 나오자 금발의 댄서가 까르르 웃으며 손짓했다. 크리스토퍼는 비뚜름하게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녀는 얼굴이 육각형이었고 입술 아래에 커다란 점이 있었다. 그의 애인, 캐서린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

  "실례합니다." 크리스토퍼가 중얼거렸다. 댄서는 이미 그 앞을 떠나 다른 남자의 몸에 팔다리를 얽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지만, 크리스토퍼는 거듭 말했다. "미안해요."

  그 다음 주말, 캐서린이 뉴욕으로 찾아왔다. 크리스토퍼는 애인을 품에 안고 다시 한 번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너그럽게도 캐서린은 그를 마주 안았다. 그녀는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를 저지르며, 그의 진실함에 오히려 감사한다고, 자신은 여전히 크리스토퍼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것은 아직도 크리스토퍼의 안에 영영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캐서린이 베푼 관용이 대체 어떻게 가능한지 크리스토퍼는 단 한 순간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 놀라운 용서의 경험을, 전적으로 상대방의 아량으로 봉합된 자신의 과실을 굳이 들쑤셔 봤자 득 될 것 없다는 판단 하에 먼지 쌓인 미제 사건으로 남겨 두었었다.

  여전히 답을 구하지 못한 그에게, 이제는 캐서린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그때는 유효했던 사랑이 왜 하필 지금 끝나버린 건지 크리스토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결혼 생활의 닫힌 문 반대쪽에는, 크리스토퍼가 풀지 못한 문제처럼, 캐서린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진실이 놓여 있었다.



  “당신은 자기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군."

  크리스토퍼는 협탁으로 손을 뻗는 중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잠시 허공을 더듬었다. 이윽고 손끝에 담뱃갑과 라이터가 걸렸고, 그것들을 그러쥐고 나서야 그는 우물거리며 한마디를 뱉었다.

  "내가?"

  제대로 발뺌하려는 열의조차 보이지 않는 대답이었다. 시선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말린 종이의 끝자락에 고정되어 있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태도를 눈앞에 두고도 크루거는 짜증을 내는 대신 웃었다.

  "그럼 또 누가 있겠어?"

  크리스토퍼가 느긋하게, 마치 의식적으로 초조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왼손 검지를 까닥여 담뱃재를 털었다.

  "대화는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크루거는 말끝에 생략된 함의를 읽어냈다. '계집애처럼 굴지 마.' 그러나 크루거가 원하는 것은 시답잖은 베갯머리송사가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아직 그 자신은 눈치 채지 못한 듯하지만, 크리스토퍼에게는 늘 침대의 오른쪽에 눕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에 크리스토퍼가 왼손으로 침대맡의 등을 끄거나 좆을 쥐는 것을 보고 크루거는 그가 왼손잡이인 줄로 알았다. 그러나 다음날, 점심 식사 자리에서 크리스토퍼는 분명 오른손으로 지폐를 세어 점원에게 건네고 또 영수증에 서명을 했다. 크루거는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그 모습을 무척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는 본인에게 그 특이한 버릇을 인지시켜 줄 가장 알맞은 순간을 사냥꾼처럼 인내심 있게 기다려 왔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그들이 연인 행세를 — 혹은 난잡한 행위 예술가들. 혹은 도덕성이 마비된 '요즘 애들'. 명명은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 한 지도 두 달째였다. 주기적으로 만나 몸을 섞고, 열량 소모에 따른 당연한 인과에 가깝지만 어쨌든 식사를 하고, 비록 대부분이 맨해튼의 어느 호텔 방 또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창틀이 진동하는 브루클린의 로프트로 서로를 부르는 연락에 불과했으나 전화 통화를 나누기도 했다. 여자들과 하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호숫가를 걷거나 토요일 밤의 극장에 들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크루거는 눈앞의 남자의 사고방식을 대체로 정확하게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성관계lovemaking라는 단어에서 그는, 당장 자신이 반라로 포 시즌스의 푹신한 캘리포니아 킹 베드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아마 신랄하게도 공산품처럼 양산되는 사랑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상품도 사랑이라고 칠 수 있다면, 그들 역시 연인들lovers이라 칭해도 좋다고 시큰둥하게 동의할 것이다. 만약 크루거가 그 입에 물린 담배를 빼앗아 미적지근해진 맥주에 담가 버리고 그에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신앙을 밝히는 대신 이렇게 답할 것이다: "사랑은 미국의 달러화와 같아.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심지어 그것이 실존하든 실존하지 않든 간에, 일단 벌 수 있을 때 벌어둬야 한다는 거지."

  크루거는 그러한 방식으로 말하는 남자들과, 그 남자들이 자신을 불편하게 여긴다는 점을 몹시 즐겼다. 애써 점잔 떨던 얼굴이 끝내 일그러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그는 느긋하게 기지개를 펴고는 뒤통수를 받쳐 앉았다.

  "오른손은 고상한 일에만 쓰는 건가?"

  옆에서 그의 연인이 말없이 이쪽을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크루거는 균열이 간 낯짝을 마음속으로 미리 그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놀랐어? 당신을 관찰했지."

  "아, 그래." 그제야 되받아칠 여유를 찾았는지 뒤늦게 답이 돌아왔다. "참 점잖은 취미를 뒀네."

  자신과 점잖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이는 것이야말로 정말이지 시시한 농담이었기에 크루거는 짤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대체 무슨 변덕이야?"

  크리스토퍼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젖혀 크루거의 아랫도리에 있어야 할 것이 제대로 달려 있는지 확인했다. 두 번째 경고였고, 크루거는 이 역시 가뿐히 무시했다.

  "정말 궁금했을 뿐이야. 풋볼보다는 야구에 재능이 있었겠는데. 좌투우타 선수는 귀하니까."

  물론 농담이었다. 필드 위에서 땀을 흘리며 글러브 낀 손을 허우적거리는 크리스토퍼라니. 야구는 차치하고 어릴 적 캐치볼을 할 친구들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그건 또 다른 날을 위한 궁금증으로 남겨두어야 할 테지만.

  크리스토퍼가 짧아진 담배를 비벼 끄고 새 장초를 꺼내 물었다. 눈을 감자 미간에 얕은 골이 파였는데, 회사에서 가져온 서류를 두고 집중해야 하거나 고민거리가 있을 때 종종 짓는 표정이었다. 크루거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원래는 오른손잡이야."

  털어놓는 찰나, 크리스토퍼의 오른팔 근육이 경련했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으나 크루거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7학년 여름방학에 팔이 부러져서 한 달 동안이나 깁스를 차고 다녔고, 그때 왼손을 쓰는 법을 익혔지."

  "오, 저런. 교통사고였나?"

  크리스토퍼가 찬찬히 눈을 뜨고 시선을 맞춰 왔다. 청회색 눈동자 안에서 크루거는 그를 향한, 결코 애정이라고는 부를 수 없는 것들, 경멸과 분노, 그리고 혐오감을 읽어냈고, 더없이 전율했다.

  "아니. 얻어맞았어."

  긴 한숨과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인터넷, 월드 시리즈,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과 냉전의 끝. 시대가 저물어 가는 가운데, 한 소년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크루거는 느슨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한 해 이르게 운전하는 법을 익히고, 볼링장의 공을 닦으며 손님들이 남긴 맥주를 마신 다음 냄새가 빠질 때까지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거나 코치의 호령 하에 고무 타이어를 끌고 운동장을 굴렀다. 아마 그 즈음 동정을 뗐을 것이다.

  그에 비해 크리스토퍼, 그는 정말이지 그 상투적인 여름 풍경의 어느 장면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DC에서 열리는, 전국의 수재들을 위한 백악관의 토론 프로그램에 참가해 말재주를 뽐내거나 다음 학기 수업 교재를 미리 읽어두기 위해 서재에 처박혀 있었다면 모를까.

  크루거는 매질을 피해 맨발로 달아나는 고동색 고수머리와 창백한 뺨을 가진 소년을 상상해 보았다. 얼마 못 가 발을 헛디뎌 땅을 구르고 넘어져 웅크린 자세 그대로 붙잡혀 걷어차이는 크리스토퍼. 죽었다 깨어나도 좋은 쿼터백은커녕 2군에 이름을 올리지조차 못할 샌님. 그의 오른 팔뚝이 한 번 더 파르르 떨렸다. 이번에는 크리스토퍼도 알아차렸는지 팔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크루거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크리스토퍼는 그를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남은 한 손으로 담배를 입에 넣었다 빼며 이따금 뻐끔거릴 뿐이었다.

  크루거의 손가락이 팔뚝 안쪽의 살갗을 쭉 훑었다. 소년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훨씬 질기고 단단한, 성인 남성의 피부였다. 유감스럽게도 더는 쉽게 부러지거나 멍이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구경 끝났으면 일어나지."

  두 번째 담배를 끝까지 태운 크리스토퍼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이미 삼십 분 전부터 머리통 속에는 일 생각뿐이었을 것이다. 크루거는 침대에 늘어져 속옷과 양말을 갖추어 신는 연인을 관람했다. 그에게는 가야 할 곳도 처리해야 할 업무도 없었고 다만 날 때부터 부여된 온당한 특권,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원하는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권리만이 수중에 있었다.

  "당신 아버지에게 되갚아주고 싶지 않아?"

  문득 묻자 크리스토퍼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유치하다는 비난을 눌러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틀렸어, 크루거. 내 팔을 부러뜨린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동네 깡패였거든. 지금쯤 연방 교도소에 갇혀 있을걸." 크리스토퍼가 셔츠 소매의 단추를 잠그며 대꾸했다. "그리고 내 아버지는 재작년에 죽었어."

  크루거는 이 정보 또한 흥미롭게 수집해 입력해 두었다. 공공연한 난봉꾼이 있는 동네에서 자랐군. 그렇다면 장담컨대 크리스토퍼는 자신이 행세하는 대로, 혹은 적어도 그렇게 열렬히 비춰지고 싶어 하는 대로 부촌 출신은 아니었다. 크루거, 그 자신이야말로 정말로 전형적인 도련님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껏 낭비할 수 있는 부와 그보다 더 많은, 아버지의 주치의에 의하면 몇 년 내로 그에게 상속될 유산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회에 내세울 만한 종마로 길러내려는 부친의 훈육 덕에 그는 훌륭한 운동선수로 자랐다. 답례로 크루거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선사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선물을 준비했다. 위대한 유산을 손수 해체하는 것. 그는 술을 진탕 마시고 운전대를 잡았다. 페라리의 앞 범퍼와 도로변의 가드레일은 허드슨 강 위로 피어오른 독립기념일의 불꽃처럼 산산이 조각 났다. 크루거는 내셔널 풋볼 리그에서 영구적으로 제명되었고, 아버지의 왕국, 텍사스에서 추방당했다. 텍사스 사내들은 동류의 어리석음과 혈기는 사랑했으나 비겁함만큼은 용인하지 않았다.

  다소 거친 방식으로 크리스토퍼를 양손잡이로 교정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는 아닐지언정, 부자의 관계가 세상에 자랑스럽게 내 놓을 만한 형태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크루거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완벽한 가족을 가진 행복한 사람들은 뉴욕에 가지 않는다.

  "운이 좋았군." 크루거가 거의 누군가로부터 옮은 듯한 염세적인 시각으로 어떤 죽음을 평했다.

  "그래." 크리스토퍼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어느새 말쑥한 정장 차림이 된 크리스토퍼가 탁자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은 서류 가방을 챙겨 먼저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침대 위에서, 크루거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비웠다.


  셰익스피어의 왕자들처럼 크루거는 유폐되어 뉴욕의 호텔들을 전전했다. 무저갱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붓는 나날이 의미 없이 흘러갔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 지인, 사업상의 동료들, 무어라 불러도 좋을 사람들이 드글거렸고, 그들은 손쉽게 크루거를, 크루거가 뚜껑을 딴 돔 페리뇽을, 도무지 단단히 닫히는 법이 없는 크루거의 두둑한 지갑을 추앙했다.

  만약 두 사람이 바닥에 정체 모를 웅덩이가 고인 스트립 클럽이 아니라 벌건 대낮의 사무실에서 만났다면, 크루거는 크리스토퍼 역시 ‘그들’ 무리로 분류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크리스토퍼 또한 너무나도 간편하게 크루거를 이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또는 관점에 따라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은 자정 가까운 시각 헬스키친의 한 클럽에서 맞닥뜨렸고 양측 모두 손님이었다.

  크리스토퍼의 사과가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요란하고 끈적한 실내의 공기 중으로 분해될 때, 누군가 방을 가로질러 다가와 댄서의 어깨를 쥐었다. 여자가 꾸며낸 듯한 단말마의 탄성을 내질렀고 그 반작용으로 크리스토퍼는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가 그의 입술을 여자의 동그란 어깨에 문질렀다. 여자가 기분 좋게 흐느끼듯 웃었다. 크리스토퍼는 낯선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캐서린을 생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는 이런 싸움에는 애초부터 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라고 믿었다. 크리스토퍼는 부디 그의 비열한 동료들이 본래의 목적은 잊고 된통 취해 이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기를 간절히 바라며 가장 가까운 문을 찾아 밖으로 뛰쳐 나왔다.

  맨해튼의 밤은 춥고 질펀했다. 이따금 모퉁이에서 구두가 또각거리거나 쓰레기 더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으나, 크리스토퍼는 도시에서는 결코 겁을 먹지 않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쭈그려 앉아 바지런히 담배를 태웠다.

  "비위가 약하군."

  등 뒤로 문이 열리고, 예의 남자가 말을 붙여왔다. 크리스토퍼는 고개를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난 단지 그런 방식이 가소로웠을 뿐이야.”

  “어이, 여긴 자유 국가라고.”

  상대의 남부 억양을 감지한 크리스토퍼의 눈썹이 언짢게 꿈틀거렸다. 그는 당장 여기서 자유의 정의와 이 나라의 이념적 토대, 수정 헌법 따위에 대해서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수도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파괴적이며 그가 보기에 매우 저급한 이 상황의 수준에 맞춘 방법을 택했다.

  “당신 이름이 뭐야?”

  크리스토퍼가 손을 뻗어 사내의 양 뺨을 붙잡고 물었다.

  크루거는 크리스토퍼가 움직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희멀건 얼굴과 마른 몸으로 대단한 재주를 부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내킨다면 언제든지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조라고 불렀고 친구들과 애인들은 그를 제이라고 불렀다. 크루거는 무심코 익숙한 자음을 입에 담으려다, 마음을 고쳐 말했다.

  “크루거.”

  “그래, 크루거.” 그것이 성이든 이름이든 개의치 않는다는 듯 크리스토퍼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당신은 그저 어린애에 불과해.”

  굳은살 박힌 엄지 두 개가 입술을 우악스럽게 벌려 왔다. 손끝에서는 씁쓸하고 약간은 짭쪼름한 맛과 알알한 냄새가 — 아마도 데킬라와 향수일 것이다 — 났다. 물컹한 혀가 벌어진 공간으로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뺨에 닿은 서늘하고 건조한 손과 대비되는 입 안의 체온이 엉망으로 섞였다. 크리스토퍼는 크루거가 그를 도발한 방식대로 내내 두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청회색 홍채는 빛 공해로 언제나 뿌옇게 이지러진 뉴욕의 하늘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입술이 떨어져 나왔을 때, 크루거는 축축한 턱을 문질러 닦는 것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넌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줄 누군가를 줄곧 기다려왔다.

  크리스토퍼가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무척 경박한 몸짓이었고, 타고난 듯 능숙했다.



  변호사는 클럽을 나와 걸었다. 그는 미성숙함과 나이 듦 사이의 젊음을 누리지 못하고 곧장 늙어버린 것처럼 무기력했다. 매디슨 가를 따라 걷는 동안 지난 십 년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들었다. 아내는 그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크리스토퍼를 이 도시에, 그의 삶에 묶어 두는 닻이자 지표였다. 이제 그녀는 곁에 없었고, 크리스토퍼는 그녀를 붙잡으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내심 안도하는 자신에게 구역감을 느꼈다.

  도로 끝에 택시 한 대가 멈춰 섰다. 크리스토퍼는 무심코 고개를 젖혀 모퉁이에 세워진 건물을 확인했다. I. M. 페이가 지은, 엄숙한 신전을 닮은 호텔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렸을 때, 노란 승용차의 문을 닫고 보도 위로 가뿐히 짐을 들어 올리는 크루거가 그곳에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상식적으로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페라가모의 구두를 신고 뉴욕 시내의 거리를 뜀박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크리스토퍼는 잠시 무척 어려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간절하게 달려보았던 것이 대체 언제인지 되짚어 보고 싶었지만 인디애나의 옥수수 밭은 너무나도 멀리에 있었다.

  벨보이가 짐을 옮기러 다가오기 전에, 크리스토퍼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캐리어 손잡이를 쥔 크루거의 손목을 낚아채 붙잡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크루거는 손에 쥔 패를 전부 잃고 파산한 채 십 년 만에 나타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크리스토퍼를 알아보았고, 동시에 제법 놀랐다. 이렇게 대놓고 약점을 드러낸 한심한 꼴이라니. 그러나 크루거는 당황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으레 가장 절박한 때에 가장 잘못된 선택을 내린다. 아무것도 잃어본 적 없는 이에게서 조언을 구하거나, 전부 잃어도 전혀 개의치 않는 이들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는 것이다.

  "어떻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지?"

  크리스토퍼가 재차 물었다. 그는 자신이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 무척 냉소적인 어느 전도사가 그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파한 적이 있었다. 아주 익숙한 기분으로, 크루거는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당신은 내가 유일하게 사랑하지 않은 연인인데." ■ (22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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