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학교 교장은 동네 목사의 아내와 바람을 피웠다. 자선 사업을 핑계로 학교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밀회를 가졌다. 눈짓을 교환하고 손등을 스쳤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혈기 넘치던 교장이 입대하여 베트남에 가 버린 사이 심약한 여자는 도시화가 덜 된 주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던 반전주의자 목사와 냉큼 결혼해 버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교장은 열대의 정글에서도 인도차이나의 바다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그의 고향으로, 옥수수밭에 파묻힌 이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린 보상은 자신의 십 대 시절 첫사랑이 히피 예수쟁이와 가정을 이루었다는 소식이었다. 학기에 한두 번씩 열리는 의례적인 조회에서 그는 강당에 아이들을 소집하고 이야기했다. "제군들, 신은 분명 존재한다. 전장에서 나는 그의 존재를 직접 느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분이 내 앞에 나타나 내 방탄모에 손을 얹고 손수 축복을 내리셨지." 그는 아마 자신의 부대원들과 학생들을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은 이렇게도 말했다. "그러나 신께서 늘 제군들의 편인 것은 아니다."

  소년의 입장에서 오십 대였던 그들은 다 죽어가는 시체와 진배없었고 그렇게나 나이 든 사람도 타인을 욕정한다는 사실에 크리스토퍼는 제법 혐오감을 느꼈다. 교장은 늙은 어머니를 홀로 모시고 살았고 목사 부부에게는 그의 또래보다 서너 살 어린 남매가 있었다. 마을에 각각 하나뿐인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었기 때문에 그 애들과 크리스토퍼는 같은 스쿨버스를 탔다. 목사의 집 앞에 차가 멈춰 서면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남매가 올라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애들은 늘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교장과 목사 부인은 기어이 짐을 싸서 대도시로 달아났다. 그 주의 설교 주제는 <간음하지 말지어다>였다. 십계명과 마태복음을 읽어 내리는 목사의 얼굴이 유독 희고 뻣뻣했다. 어찌나 창백했던지 뺨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흐르는 모양이 연단으로부터 다섯 번째 줄에 앉은 크리스토퍼에게도 선명하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졸도할 법한 낯빛이었다. 그 일요일 아침 작은 교회에서는 누구도 졸지 않았다. 또한 누구도 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주, 캐서린이 이사를 나갔다. 그녀와 크리스토퍼는 이제 별거 중인 부부이고, 얼마 안 가 더는 공식적인 부부 관계도 아니게 될 것이다.

  그녀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했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나탈리의 방을 내버려 두라고 말했다. 아이의 물건은 그가 알아서 처분할 테니 그냥 두고 떠나라고. 그것은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손쓸 도리 없이 망가져 완전히 끝장나기까지 이 년 동안 그가 그녀에게 건넨 유이한 호의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소송 없이 합의 이혼을 하는 데 동의한 것이었다. 대신 캐서린은 홀로 경찰서와 보험사에 들르고, 지방법원 판사와 나탈리의 담임 선생과 그 애의 외조부모, 그 밖의 모든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모든 대화를 감당했다. 아이 방까지 그녀의 두 손으로 해체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에게 공평하지 않았다.

  캐서린이 떠나고, 크리스토퍼는 그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고요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증조부가 몸소 지은 목조 주택은 농장을 끼고 있어 언제나 바람에 삐걱거렸고 라디오 드라마와 TV 프로그램의 나지막한 소란이 층마다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학부생 시절 머물렀던 기숙사와 로펌에 취직해 돈을 모으기까지 얼마간 살았던 아파트의 소음 공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캐서린. 그의 아내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요즘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신입생들에게 오닐과 올비를 가르친다. 그녀는 연극 클럽의 회장이기도 했다. 어린 연인들은 어리석고 자부심에 찬 젊은이들답게 비좁은 매트리스에 몸을 겹치고 누워 블랑쉬와 스탠리의 대사를 주고받았다. 남부 억양을 흉내 내기 위해 구태여 대본을 들여다볼 필요는 없었다. 캐서린이 한 계절 동안 준비한 공연이 막을 내리면 크리스토퍼는 무대 뒤로 가 준비해 두었던 백합 다발을 그녀의 품에 안기고 서스턴 애비뉴의 고급 레스토랑에 그녀를 데리고 갔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캐서린과 보르도가 든 와인 잔을 기울이기 위하여 크리스토퍼는 학기 내내 오만하고 속물적인 뉴욕 태생 고등학생 세 명에게 SAT 에세이 작문을 가르쳐야 했다. 머지않아 두 사람은 결혼했고, 복도 건너편의 파티광 이웃이 무신경하게 세워둔 자전거에 현관이 가로막히거나 한밤중에 환호성과 경찰차 소리에 깰 일 없는 주택가로 이사했다.

  부부 모두 브라운관 속 얼간이들을 따라 무분별하게 웃는 것보다는 독서를 선호했으므로 거실에는 텔레비전 대신 큼직한 책장이 놓였다. 크리스토퍼는 정치학과 법학을 공부했고, 이제 그에게 필요한 책들은 회사 지하의 도서관에 전부 꽂혀 있었다. 캐서린과 함께 책장 안의 내용물은 삼분의 이가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집에서 크리스토퍼는 적막 속에 거실에 앉아 있었다. 전화기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수신음이 끊기고 곧장 자동응답기가 켜졌다.

  "안녕하세요!" 캐서린의 발랄한 인사가 울려 퍼졌다. "저는 캣…."

  크리스토퍼가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한발 빨리 안내 음성이 이어졌다. "그리고 저는 냇이에요!" 딸아이였다.

  "…그리고 크리스입니다. 하트 가족에게 용건을 남기세요."

  녹음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짧은 소리 뒤에 사무실 법률 보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우물쭈물 대며 망설이더니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크리스'라고 서두를 떼고는 내일 오전 회의가 한 시간 앞당겨졌다고 고지했다. 그는 명백하게도 크리스토퍼를 동정하고 있었다. 갓 학부를 졸업한 코흘리개 법률 보조 따위가 감히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는 탁자를 뒤집어엎다시피 전화기의 코드를 잡아 뽑았다. 이 년 만에 듣는 딸애의 목소리였다. 캐서린이 이사를 가면서 그들이 쓰던 자동응답기를 가져가고 창고에 있던 구식 응답기를 꽂아두고 간 것이다.

  그 순간 크리스토퍼는 마침내 이해했다. 십여 년 전, 첫사랑과의 야반도주를 두고 학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던 교장 선생은 겁을 먹거나 불안에 시달리던 게 아니었다. 그가 내보인 인내심은 그 자신이 지녔던 일말의 직업 정신의 발현이었다.

  그는 자동차 열쇠를 찾아 쥐었다.

 

 

 

 

 

2

  첫 번째 표지판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3마일 후 로드아일랜드: 11번 출구>

  3마일을 지나 두 번째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로드아일랜드: 대양 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세 번째는 거대한 광고판이었다.

  <지금 당신 스스로를 구원하라Redeem Yourself Now>

  검은 콧수염에 기름으로 머리를 넘겨 이마를 드러낸 느끼한 얼굴이 그 옆에 붙어 있었다. 뉴잉글랜드에서 알아주는 TV 전도사였다. 크리스토퍼는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빌보드 아래로 걸어가 바지 지퍼를 내렸다. 등 뒤로는 아무도 지나가지 않았고, 밤공기가 서늘했다. 그는 광고판 아래에 오줌을 갈길 셈이었으나 결국 아무것도 싸지르지 않은 채 지퍼를 올리고 차에 올라탔다. 그는 핸들을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원시적으로 구는 대신 라디오를 틀기를 택했다. 공영 라디오의 심야 방송에서는 저작권이 만료된 고전 음악을 틀어주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였으나 크리스토퍼는 작곡가의 이름을 쉬이 짚어내지 못했다. 그 사실이 그의 기분을 한층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까지는 95번 국도를 타고 세 시간을 꼬박 달려야 했다. 맨해튼을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차선에 빼곡하던 차들이 어느샌가 하나둘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그 혼자 남겨졌다. 크리스토퍼는 운전대를 고쳐 쥐었다.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서랍장 하나를 산산이 부순 탓이었다. 그 서랍은 여러 중요한 서류들, 통장과 회사에서 제공하는 건강보험의 명세서, 그들이 거쳐 온 보금자리들의 계약서 따위가 든 채 단단히 잠겨 있었다. 서랍의 열쇠는 한 개뿐이었고 부부의 안방 어딘가에 숨겨져 있었다. 크리스토퍼가 기억하기로는 드레스룸 제일 위 선반의 모자 상자 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마르케스의 소설 전집과 같이 이 집을 떠났다. 캐서린은 오롯이 그녀의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 물건만 가져갔다. 대부분의 가구와 식기는 이 집에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 크리스토퍼는 진실을 알아야 했다. 그의 딸을 죽인 남자를 만나야 했다. 크리스토퍼는 오로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캐서린에게 여지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주중에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 남자의 주소를 요구하거나 서랍 열쇠의 행방을 캐물을 수는 없었다. 캐서린은 기어이 크리스토퍼가 미쳤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리고 가정법원에 서류 몇 장이 수리되면 그녀는 기꺼이 크리스토퍼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딸, 나탈리 그레이스 하트는 이 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거대한 차가 조그마한 아이를 치어 죽였다. 아마도 즉사였을 것이다. 병원이 아니라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으므로. 그게 크리스토퍼가 아는 전부였다. 여태 사건 파일을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장례식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온갖 중요한 사람들, 그의 상사들과 캐서린의 석사 논문을 지도한 은사, 웨스트체스터의 친척들이 참석했으므로 크리스토퍼 역시 수염을 깎고 넥타이를 졸라매야 했다.

  남자에게는 과실치사가 인정되었고, 약간의 벌금만 내면 법정을 걸어 나가 사회로, 환한 빛 아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캐서린은 그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같다며 딸아이의 죽음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내 일이야."

  크리스토퍼가 항변했다.

  "아니, 그건 당신의 일이 아니야. 당신은 인수 합병 전문 변호사잖아."

  캐서린이 반박했다.

  지하실에서, 크리스토퍼는 공구 상자를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가정용 소화기를 챙겨 올라와 서재의 서랍을 마구 내리쳤다. 부서진 합판 조각이 사방으로 튀면서 살갗이 긁혔다. 크리스토퍼는 걷어붙인 셔츠 소매에 손등의 피를 대충 문질러 닦았다.

  사건 파일 속의 금발 남자는 균형 잡힌 체격에 인상이 서글서글했다. 알코올 중독자로도 조현병 환자로도 보이지 않았다. 나이는 크리스토퍼와 고작 몇 개월 차이로, 은퇴한 운동선수라기에는 제법 어렸다. 그는 도무지 사람을,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죽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크리스토퍼는 뉴욕의 변호사였고, 생김새만으로 누군가의 도덕성을 판단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상대의 외관과 억양, 출신지로부터 그 사람의 성장 배경과 현재 소득, 취향과 성격을 유추하고 단정 짓는 경솔한 습관이 있었으나 도덕성만큼은 어떠한 경우에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았다. 악행은 정말이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죄는 과실에 불과했다.

 

 

 

 

 

3

  낯선 문간에 서서, 크리스토퍼는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현관문을 두드렸다. 너무 초조해 보이지도, 의심스럽지도 않도록 적당한 간격으로. 괜한 소란을 일으켜 이웃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윽고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외출복 차림이었다. 자다 일어난 것처럼 무방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크리스토퍼를 마주하고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침착하게 상대를 살폈다.

  땀에 젖은 셔츠 깃, 길가에 대충 주차된 차, 생채기가 난 손등.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

  사내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새파란 두 눈에는 은은한 승리감마저 엿보였다. 그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크리스토퍼."

  남자는 친근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고, 말투는 꼭 병자를 대하는 것처럼 사근사근했다. 크리스토퍼는 한순간 주먹을 쥐었다가 힘을 풀었다. 급하게 뛰쳐나오느라 그에게는 늘 정장 안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명함 케이스도, 제2의 심장 역할을 하는 블랙베리도 없었다. 크리스토퍼는 명함을 받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계란 껍질 같은 고전적인 흰 표면에 세리프 폰트로 적힌 <조 크루거 / 브라운 대학교 풋볼 팀 헤드 코치>가 사정없이 구겨졌다.

  남자가 자리를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크리스토퍼는 잠시 엉거주춤 현관에서 기다리다가 그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는 푸른 별이 그려진 플라스틱 깃발 하나가 붙어 있었다. 크리스토퍼는 그것이 <댈러스 카우보이즈>의 로고임을 알아보지 못했고, 단지 독일계인 남자의 성이 다윗의 별과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상이 들었을 뿐이었다.

  부엌은 말끔하다기보다는 황량했다. 싱크대 위에 걸쳐진 식기 건조대에는 말라가는 유리잔 하나 없었고 찬장을 열어 봐도 아마 텅 비어 있으리라고 크리스토퍼는 짐작했다. 그러나 조리대 전면의 벽에 직사각형의 가로로 긴 창이 뚫려 있었고, 그것은 무난하다 못해 따분한 실내에 한 줌의 심미성을 더했다.

  "숲이 있군요." 크리스토퍼가 지적했다. 뉴욕에서 집 앞의 가로수는 특권이다.

  "여긴 로드아일랜드니까요." 냉장고에서 맥주 두 병을 꺼내며 크루거가 대답했다. "하지만 저건 숲은 아닙니다. 공동묘지죠."

  부엌 창 너머 먼 곳에서 흰빛이 반사되었다.  사내가 그 빛을 가리켰다. "저건 순찰을 도는 묘지기이고요."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집주인은 맥주를 내밀며 그에게 자고 갈 것을 권했다. 크리스토퍼는 술과 잠자리 양쪽에 대한 거절로 손을 내저었으나, 그 순간 해일과도 같은 피로가 그를 덮쳤고, 그가 관자놀이를 짚고 한두 걸음 비틀거리는 모습을 사내는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

  "사양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크루거가 말했다. 비록 조만간 독신에게 좀 더 적합한 아파트로 거취를 옮길 예정이었으나, 지금 이 집에는 남는 방이 많았다.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당신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내 딸을 죽이지 않는 거였어.' 크리스토퍼는 그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사내의 등 뒤로, 저편의 공동묘지로부터 희끄무레한 빛이 어김없이 반짝였다. 크리스토퍼는 브레이크가 풀린 SUV에서 뿜어져 나온,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딸아이의 얼굴을 비추었을 전조등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졸음에 겨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였다. ■ (2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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