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의 녹음 합작

 

 

Apocalypse Comes In A Pickup

 

 

 

  노스트라다무스는 말했다. 1999년,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회의론자들은 한 번 더 그들이 옳았음을 자축하며 기쁨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고대의 마야인들도 말했다. 2012년, 세상은 멸망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는 예언의 내용을 본떠 거액을 들여 영화를 만들었고 그로써 지구와 전 인류는 점진적이고 불가피한 종말에 한 걸음 더 가까워졌지만, 어쨌든 여전히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겨 투자자들의 손에 지폐 다발을 쥐여 주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소행성이 관측되었다. 팔로마 천문대의 최첨단 망원경이 비춘 불청객의 반경은 적도 위아래의 아메리카,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까지 4개 대륙을 초토화하고 판을 뒤흔들어 경쟁자가 제거되면 다시금 제국주의의 영광을 맛볼 수 있을까 은밀히 기대하던 지구 반대편의 구대륙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컸다. 예상 충돌 지점은 북태평양의 한가운데, 미드웨이 환초와 하와이 제도 사이로 발표되었다. 대중은 이 소식을 대통령이 도마뱀 인간이라거나 링컨 기념관의 동상이 자정을 넘기면 살아 움직인다는 음모론과 같은 수준으로 받아들였으나, 연방 정부가 비밀리에 50번째 주의 거주민들을 네바다의 버려진 황야로 이주시키는 정황이 발각되자 퇴직연금을 털어 휴양지의 콘도에 투자한 노인들은 단숨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더 이상 값을 지불할 수 없는 요양원에서 쫓겨나 죄인처럼 손자 손녀의 방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크리스마스쯤에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듬해 소행성 603071이 지구에 충돌한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세상이 망하거나 말거나 이사라는 학생회의 일원이었고, 졸업 학년이었다. 그녀의 학생회는 리버사이드 고등학교의 70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졸업 무도회를 주최했다. 어떤 각도에서는 실패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권한을 쥔 자들의 관점, 특히 준법 정신과 체제 유지, 성 엄숙주의의 관점에서는 성공적이었다. 누구도 테이블의 펀치 볼에 재킷 안주머니에 숨겨 온 보드카를 섞지 않았고, 연회장에 들어서기 전 뒷골목에서 대마를 미리 한 대씩 피우고 와 난동을 부리는 녀석도 없었다. 학생들은 모두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 돌아갔다. 그들이 유일하게 감각하는 것은 젊음이 시작과 동시에 끝나버렸다는, 아주 명징한 슬픔뿐이었다.

  일생에 한 번뿐인 졸업 무도회에 이사라는 허리 아래에서부터 바로 근사하게 주름이 잡히는, 발등을 덮는 정숙한 길이이면서 왼쪽 허벅지 중반부부터 트여 필요할 때면 – 그런 일이 벌어질 확률이 소행성 충돌 확률보다는 여실히 낮다 해도 – 커튼처럼 걷어 은근히 매끈한 하체를 자랑할 수 있는 세이지색 드레스를 입었고, 그의 파트너인 케인은 미리 맞춰둔 크림색 코사지를 가져와 그녀의 손목에 달아주었다. 농구부 부장이자 토론부 부원인 그는, 그것이 이사라에게 얼마나 중대한 의미를 가지든, 가지지 않든 간에, 다정하고 똑똑한 소년이었다. 그는 부녀 둘이 사는 집의 문간에 농구부에서 단체로 빌린 리무진에 타고 요란하게 나타나는 대신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폭스바겐을 끌고 와 이사라의 아버지에게 정중히 인사했고, 조용히 조수석까지 이사라를 에스코트했다. 나름의 배려에 이사라는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은 입구에서 사진을 한 장 찍은 다음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 몇 곡에 맞춰 춤을 추었다. 발이 넓은 케인은 노래와 노래 사이에 공백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무리와 추억을 남기기 위하여 자꾸만 사진 기사 앞으로 불려갔다. 마침내 그가 플로어로 돌아오지 않고 그와 함께 예일 또는 그에 준하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진학할 남학생들과 모여 떠들기 시작했을 때, 이사라는 팔목을 문지르며 무대 근처의 옆문으로 빠져나왔다.

  말 못 하는 생물들도 종말을 예감하고 있는 걸까? 여름밤은 불길하리만치 적막하고 어두웠다. 혹시 모를 핵의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원전을 폐쇄한 뒤로 밤 9시 이후 인구 30만 명 이하의 모든 도시는 의무적으로 가로등을 껐다. 미국인들은, 지금까지의 이력과는 완전히 반대로,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행동했다. 마치 뒤늦게나마 그렇게 참회하면 청교도 윤리가 그들을 구원하기라도 할 것처럼.

  어둠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이사라의 머릿속에 이런 정신 없는 밤에 여자애들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괴담 같은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차하면 다시 안으로 뛰어 들어갈 셈으로 문고리를 힘주어 쥐었다.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벽에 기대어 서 있던 누군가가 출입문 위에 달린 비상등의 좁은 불빛 아래로 나타났다.

  같은 학년의 아그네이였다. 그녀는 비대칭으로 재단된 치마 밑단이 동그랗게 부풀려진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눈동자와 똑같은 새파란 색이었다.

  “안녕, 아그네이. 의외네.”

  이사라는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어차피 몇 달 뒤에는 모두 죽을 처지인데도 당장의 고통이 두려울 수 있다는 사실에서 주의를 돌리려 애썼다.

  “참가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을 텐데?”

  아그네이가 팔짱을 끼고 되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미리 접수 받은 참가자 명단에는 아그네이 또한 등록되어 있었고, 기억하기로 그녀에게는 파트너가 없었다. 명단을 보지 않았더라도 아그네이가 홀로 졸업 무도회에 왔다는 점은 그리 놀랍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네가 여기 왔다는 거 말고.” 이사라가 습관적으로 한쪽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겼다. “내 말은, 글쎄. 난 그냥 네가 드레스를 입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봐. 바보 같지.”

  “아하.” 아그네이가 특유의 깔보는 듯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것도 어떤 실험의 일부야.” 그녀가 가슴 안으로 손을 쑥 넣더니 담뱃갑을 꺼냈다. 한쪽 가슴이 우스꽝스럽게 움푹 꺼졌다. 이사라는 아그네이가 제 몫을 챙기고 내민 담배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그네이는 상자를 도로 제자리에 집어넣고는 손으로 모양을 잡으며 가슴팍을 봉긋하게 폈다. “별로 편하지는 않네. 이로써 할리우드의 극작가들은 죄다 얼간이라는 게 증명되었군.”

  이사라는 그것이 아그네이 식의 농담이라는 것을 알아들었고, 조금 즐거워져 웃었다.

  “춤은 안 추니?”

  “나는 남과 닿는 게 싫어. 몸을 말도 안 되는 각도로 꺾는 것도.”

  “달리기는 잘하던데.”

  이사라가 무심코 뱉었다.

  “너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아그네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사라는 당황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주 아이들을 지켜봐. 부회장이니까. 그게 내 일이야.”

  “아, 그러셔.” 그보다 따분한 일은 없을 거라는 듯한 표정으로 아그네이가 벽에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러면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원칙적으로는.” 이사라가 순순히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 원칙이 다 무슨 소용이니?”

  “그거 네가 오늘 밤 한 말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든다.” 아그네이가 입술을 비죽였다. 겉보기에는 비웃는 듯했지만, 진심이었다.

 

 
 
 

 

  졸업식은 시시했다. 졸업생 대표가 준비해 온 답사를 읽던 와중 울음을 터뜨려 분위기가 한층 더 뒤숭숭해졌다. 학교를 떠나는 게 슬퍼서가 아니라, 다가올 종말이 두려워 흘리는 눈물에는 건넬 수 있는 위로도 농담도 없었다. 학생들은 음울한 표정으로 학사모를 공중으로 던졌다. 하늘을 향해 일제히 떠오른 마름모꼴의 모자가 짧은 순간 태양을 가리며 졸업생들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그대로 추락했다.

  바로 몇 시간 전, 그날 새벽에 나사에서 쏘아 올린 소행성 제거용 로켓이 별 소득 없이 대기권에서 불타 사라졌다는 뉴스가 전 세계적으로 보도되었었다. 종말의 카운트다운도 이제 본격적으로 끝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케인이 예일에서 보낼 시간에 행운을 빌어주고, 시시한 두 단어로 그것을 돌려받은 다음, 이사라는 모든 것이 한결 가벼워진 듯한 감각을 느끼며 돌아섰다.

  식장 한쪽에서 아그네이가 그녀의 대가족과 또 한 번 논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 목격됐다.

  “저 애 비위를 맞추는 것보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수발을 드는 게 훨씬 편했어! 정각마다 그분의 기저귀를 갈아드려야 했는데도!”

  아그네이의 이모, 나나루가 이마를 치며 아랍어로 높고 빠르게 중얼거렸다.

  “저 아랍어 알아들을 수 있거든요?”

  아그네이 역시 아랍어로 쏘아붙였다.

  “알고서 하는 말이란다, 얘야. 아무렴!”

  나나루가 대꾸했다. 이번에는 영어였다.

  입가에 막 주름이 생기기 시작한 중년의 나나루는 다 포기했다는 듯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젓고는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몰아 주차장으로 떠났다.

  이사라는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아버지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아빠, 저 먼저 가볼게요.”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꽃다발을 품에 안은 채 아그네이를 향해 달렸다.

  아그네이는 그녀의 청록색 쉐비 트럭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이사라는 앞 유리창을 똑똑 두드렸다. 아그네이가 그녀를 흘긋 쳐다보고는 조수석에 두었던 감자 칩 봉지를 무릎 위로 옮겼다. 이사라는 그것이 자리를 내어주는 무언의 권유라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은 똑똑했다.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졸업 축하해.”

  운전석 옆자리에 냉큼 올라타며 이사라가 말했다.

  “천만에.”

  아그네이가 대답했다. 관습적으로 전혀 올바르지 않은 말이었고, 그래서 이사라는 작게 웃었다.

  차는 마을 외곽의 산으로 향했다. 서부에는 그런 크고 작은 산이 산맥을 따라 솟아 있었고, 아직 부모의 집에서 독립하지 못한 젊은 청년들은 적당히 전망이 좋은 지점에 차를 대고 여유를 즐겼다.

  연인들이 밀회를 즐기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산 중턱의 공터는 비어 있었다. 아그네이는 차를 세우고 햇살을 받아 따끈따끈한 보닛에 담요를 깔았다.

  트럭 안에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왔다. 이사라는 그것이 아그네이의 취향일지, 혹은 무작위로 맞춰진 주파수에서 재생된 음악일지 궁금했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아그네이의 앞에서는 멍청해진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녀를 좋아하더라도. 어쩌면 그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아그네이는 타인의 호의에도 적의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었고 인류는 본능적으로 정복 불가능한 미지를 증오해 왔으니까.

  아그네이도 먼 곳의 학교에 갈까?

  마지막 순간까지 쫓아 해갈해야 할 질문이 그녀에게는 있을까?

  하지만 그런 걸 곧이곧대로 묻는 건 멍청한 짓 같았다.

  이사라는 질문을 고쳐 이렇게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있어?”

  아그네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애써 에두른 속마음을 가차 없이 뜯었다.

  “내가 어디에 합격했는지 궁금해?”

  “응.” 대답하며 이사라는 생각했다. ‘그게 의미가 있다면.’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스탠포드, MIT, 캘텍. 동부까지 가지는 않을 거야. 추운 건 질색이거든.”

  아그네이가 손가락을 꼽아가며 대답했다.

  “나는 네가 제도 교육에는 반대할 줄 알았어.” 이사라가 조심스럽게 털어놓았다. “실은, 모든 규범과 제도에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틀린 감상은 아니었는지 아그네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나키즘에 관심이 없진 않아.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멍청하고, 그들을 맨몸으로 들판에 내몰아봤자 더 큰 혼돈이 기다릴 뿐이라는 게 내 의견이야. 그러니까 아직은 통제를 포기할 때가 아니라는 거지.”

  “FBI가 이 대화를 듣고 있지 않아서 감사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

  이사라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 순간, 갑자기 카 오디오가 지직거리더니 흘러나오던 노래의 음량이 홀로 커졌다. 그들이 나누고 있던 대화의 성질 탓에 지레 긴장한 이사라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손봤더니 가끔 저래.” 별일 아니라는 듯 아그네이가 입에 감자 칩을 던져 넣으며 말했다.

  멋대로 오작동하는 라디오를 고치는 것 정도는 아그네이에게는 심심풀이만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보았길래 고장 나 지직거리는 상태를 정상으로 판명할 수 있는 걸까? 이사라는 잠시 의문하다 고개를 저었다.

  절벽 위에서 그들의 작은 도시는 너무나 하찮고 또 갸륵해 보였다. 아동용 완구 같은 전신주와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 상점 사이를 누비는 조그마한 자동차들. 저기 어딘가에서는 이사라의 아버지와 아그네이의 사촌 동생들이 불안한 일과를 보내고 있을 것이다.

  “너는?” 아그네이가 물었다.

  “나는….” 이사라가 망설였다.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야.”

  “왜?”

  “그래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아그네이가 눈썹을 뒤틀었다. “그 주장은 논리가 빈약해.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다’는 명제로 바로 반박될 수 있잖아.”

  “네 말이 맞아, 아그네이.” 이사라가 말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휩쓰는 어떤 감정을 정의 내리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

 

 
 
 

 

  봄이 끝나고 종말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사라에게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전히 아침마다 토스트를 구웠고, 이사라는 그를 위해 저녁으로 오믈렛이나 라자냐를 만들었다. 아버지가 출근하고 홀로 남은 집에서 이사라는 쓸 만한 구인 광고가 있는지 지역 신문을 뒤적이며 동그라미와 가위표를 쳤다.

  6월 중순쯤, 그녀는 케인과 헤어졌다. 세상이 망해 가는 와중에는 이별만이 아주 타당하고 마땅한 선택 같았다. 소행성 충돌은 모두에게 무척 편리한 핑계로 쓰였다. 프롬 킹과 퀸도 한 달을 가지 못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구천삼백만 마일 너머로부터 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열기가 대지를 달구었다. 열대야에 사람들은 잠을 못 이루었다. 이사라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예감 – 그녀의 삶에 언제나 수반되었고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져 왔지만 이제 더는 무시할 수 없이 커져 버린 – 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면의 밤, 자정에 가까운 시각. 빗줄기가 창틀을 두드렸다.

  ‘아니, 비는 아냐.’ 이맘때 이 도시의 하늘은 사탕을 쥔 갓난아기의 얼굴처럼 말끔했다.

  이사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쳤다. 하품하며 슬리퍼를 꿰신는 동안에도 창문은 탕, 탕, 규칙적으로 울리다가, 그녀가 창가에 다가가자 비로소 잦아들었다.

  뒤뜰에서 아그네이가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그네이? 거기서 뭐 해?”

  “조수가 필요해.” 아그네이가 남은 돌을 위로 던졌다 받으며 작게 소리쳤다. “그리고 너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일 똑똑하고.”

  중학생이 된 것처럼, 안방의 아버지를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걸어 나오면서 이사라는 생각했다. ‘이런 건 나답지 않아.’

  그러나 오 분 뒤 이사라는 또 한 번 아그네이의 청록색 픽업트럭 조수석에 탑승한 채였다.

  “어디로 가는 거야? 오래 걸릴까?”

  “학교. 관점에 따라 오래 걸릴 수도, 눈 깜짝할 새일 수도 있어.”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거지. 재밌네.” 이사라가 드물게 비꼬듯이 평했다. “갑자기 학교는 왜?” 

  “설마 내가 정말로 <미스터 앤드 미세스 스미스>의 실현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무도회에 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운전대를 잡고 있던 아그네이가 이사라를 홱 돌아봤다.

  이사라는 푸른 드레스 차림으로 담배를 피우던 아그네이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무도회장 안에서는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가?

  “나는 네게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어…. 귀여운 옷을 입고 친구들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려는, 그런 십 대다운 욕망 말이야.”

  아그네이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그 추측이 훨씬 끔찍해. 아니, 최악이야.”

  운전자의 기분을 반영하듯이 트럭이 거칠게 세워졌다.

  학교는 텅 비어 있었고, 아그네이가 차를 댄 곳은 주차장조차 아니었다. 그녀는 차를 체육관 바로 앞으로 몰았다. 체육 교사들조차도 그 장소에는 차를 댈 수 없었다.

  아그네이는 주머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열쇠를 꺼내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무도회가 학교에서 열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학기 중에는 멍청한 농구부가 주말에도 체육관을 써서 작업 시간이 부족했단 말이지. 무도회 준비 위원회에서 출입을 금지한 덕에 마지막 한 달은 편했어.”

  이사라가 바로 무도회 준비 위원회였다.

  “내가 무언가 불법적인 일에 가담했다는 뜻이니?”

  아그네이가 느릿느릿 말했다. “그래. 아주, 아주 불법적이고 나쁜 일 말이야.”

  그 말이 반어법인지 아닌지 이사라가 판단할 겨를도 없이, 아그네이는 거침없이 농구 코트를 가로질렀다. 다다른 곳에는 보일러실로 내려가는 문이 있었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꺼낸 열쇠 꾸러미로 능숙하게 그곳의 자물쇠도 땄다.

  그들은 미로 같은 깜깜한 복도에 들어섰다. 아그네이가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켜 앞을 비추었다. 오래된 건물의 지하를 상상할 때 으레 떠올리는 구조와 별다를 바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두 사람은 곰팡이와 먼지가 핀 배수관을 따라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조명은 양해해 줘. 전력은 모두 기계에 집중시키고 있거든.”

  “무슨 기계?”

  앞서가던 아그네이가 말없이 우뚝 멈춰 섰다. ‘대마초 대량생산을 위한 온실’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까 이사라가 두려움에 떠는 동안, 아그네이가 버튼 여러 개를 누르며 무언가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섬광이 번쩍여 이사라는 잠시 눈을 감아야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앞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기계 – 첨단화된 에니악 같기도, 거대한 공장용 냉장고 같기도 한 – 가 윙윙 진동하며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사라 양, 종말학개론의 기초를 알려주지.” 아그네이가 한껏 젠체하며 돌아섰다. “제1법칙. 피할 수 없는 종말은 돌이켜라.”

  “그러니까 네 말은….”

  이사라는, 스스로 주춤거리며 물러섰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자성에 이끌리듯 기계장치에 다가가 손으로 그것을 짚고 있었다.

  기계 – 타임머신으로부터 푸른 빛이 흘렀다.

  어깨 너머에서, 아그네이의 목소리는 거의 섬뜩하게 들렸다. 

  “그래. 과거로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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