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을 떠나는 천사들 (220812)
"한 번 더 할래?"
"지금?" 미아는 브래지어를 차다 말고 눈썹을 들어올렸다. 롱비치 모텔의 체크 아웃 시간은 11시. 그러나 그녀는 이웃 투숙객과 마주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아니, 내일 말이야." 다니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버지 요트를 빌려볼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년 — 아니, 5년? 시간이 그만큼 흐르면 어떤 강렬한 경험도 먼지가 더께로 쌓인 가물가물한 과거의 일부분으로 전락할 뿐이었다. 다니엘 해밍턴과의 섹스는 그다지 인상 깊지도 않았지만. — 만에, 재학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동급생과 침대에서 몸을 겹쳐봤자 명징해지는 건 그 시절은 이미 끝이 났다는 감각뿐이었다. 다니엘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이었다. 멍청한 남자애. 주제에 스탠포드에 들어갔다지. 이제 그는 마지막 봄 방학을 맞았고 의기양양하게 고향으로 돌아와 칭찬과 환호 속에 섞인 질시 어린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별다른 반응을 끌어내지 못하자 다니엘은 재빨리 다른 전략을 취했다.
"트릭시와는 연락해?"
이 방법은 늘 먹혔다. 자주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다니엘이 침대 끄트머리에 삐딱하게 걸터앉아 미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아는 그의 얼굴을 밀어내고 신발을 주워 신었다. 컨버스의 뻣뻣한 뒤축에 어떻게든 발 뒤꿈치를 욱여 넣으려다 마음이 급해져 포기했다.
"아니. 졸업식 이후로 한 번도."
"잘 안 됐나 봐. LA에서. 곧 돌아올 거라던데."
미아는 서랍장 위에서 귀고리와 차 키를 낚아챘다. 침대 맞은 편의 거울이 얼간이 다니엘의 빙그레 웃는 얼굴을 비추었다.
"어쩌면 이번 여름에는 다같이 모일 수도 있겠군. 너, 나, 패트리샤, 바네사, 그리고 몇몇 그리운 얼굴들 말이야."
개자식.
인정한다. 열두세 살 언저리의 미아는 웃을 때 근사하게 볼우물이 파이고 다른 남자애들보다 먼저 — 여자애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의식하기 시작한 — 여자와 남자의 본질적인 차이를 깨달은, 그리고 영악하게도 그 깨달음을 몇 달 동안이나 혼자서만 만끽한 동갑내기 소년을 조금은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미아는 매일 밤 <록키 레인즈>의 레인 여덟 개와 볼링공 여든아홉 개를 걸레로 닦아야 했고 자꾸만 시동이 꺼지는 자동차 엔진에 어떻게든 숨을 불어 넣어야 했고 반쯤은 조롱에 가까운 코찔찔이 고등학생들의 추파를 적절히 상대해 주어야 했다.
다니엘 해밍턴이나 바네사 퀸처럼 서부의 유명 대학을 졸업하지는 못했어도 미아 디안젤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잃은 것과 여전히 쥐고 있는 것, 감당할 수 있는 권태와 모욕의 무게, 미래를 위한 유보와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충동과 욕망을, 양말 사이에 돌돌 말아 넣어둔 지폐의 두께를 늘 셈하며 살았다. 동시에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영영 인지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패트리샤의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바네사가 졸업생 대표로서 남긴 연설의 마지막 구절을, 다니엘의 요트에서 맞는 바람의 온도를 잊어버리고도 싶었다. 그래서 눈앞의 남자가 불안했다. 왜냐하면 앙헬은 거기 없었으니까. 당신은 불쑥 나타났듯이 또 떠날 수 있을 테니까.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미국인은 아닌 남자. 미아와 같이 다세대 주택 단지에 머무르며 롱비치에 적을 두어도 여전히 외지인인 사람.
그는 이미 모래 묻은 보드워크에서 벗어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른 건? 프롬 킹과 퀸이 춤 실력으로 결정된다고 믿는 남자가 그녀를 평가할 계제가 되겠는가? 타성에 젖어 있다고? 고작 핫도그를 굽고 멋대로 스냅 사진을 찍어 호객 행위를 하는 걸 즐거워하면서? 미아는 그를 적극적으로 오해하기로 선택한다. — 유년기에는 기껏 해 봤자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레슬링 선수들을 흉내 내고 <라 쿠카라차>나 불러댔겠지. — 무례한 생각을 하면서.
이방인의 시선을 상상하는 일은 두렵다.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건 불공평해. 미아는 생각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 자신을 탈피할 수는 없잖아.
그래도 그녀는 걸음을 서둘러 그 밤의 데이트를 따라잡았다. 흥미로운 대답을 내놓으려 애쓰면서. 그저 그런 여자애들처럼….
"마이애미에 가서, 악어 주둥이에 머리를 들이밀어 볼까."
BIG GIRLS DON'T CRY (220814)
아홉 번째 음성 메시지를 받은 뒤, 더는 재회를 미룰 수 없겠다고 미아는 직감했다. 살인마가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늘 삶의 주인공이었던 패트리샤는 다음 희생자가 자신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러니 매일 미아가 연락에 회신할 때까지 선착장이며 다운타운의 다이너에서 기다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일 테지.
벌건 대낮, 연이은 뉴스 속보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 때문에 더더욱 몰려든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해변을 따라 늘어선 점포들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드디어 대치했다. 패트리샤는 일부러 이곳을 골랐을 것이다. 모두가 지켜볼 수 있도록. 친구의 그런 점이 미아는 넌더리가 났지만 어쩌면 이 지리멸렬한 감정은 애정과 맞닿아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으면서도 개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려둘 만큼 모질지도 못했다.
못 본 사이 패트리샤는 훨씬 가늘어져 있었다. 어떻게 해냈는지 키도 자란 것 같았다.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윤이 났고, 지난주 잡지에서 본 디자이너 브랜드의 옷이 매우 맵시 있게 잘 어울렸다. 아마 짝퉁이겠지만.
금방 떠날 셈으로 미아는 아버지의 트럭을 길가에 대충 세워두고 내렸다. 팔짱을 낀 채 신경질적으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던 패트리샤가 때마침 돌아보았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패트리샤는 미아가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그녀를 발견하지 못한 척했다.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학교 신체 검사에서 미아의 키가 그녀를 앞질렀을 때, 패트리샤에게 예고하지 않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을 때, 홈커밍 드레스를 맞추러 간 매장에서 직원으로부터 패트리샤가 고른 원피스가 미아에게 더 잘 어울리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패트리샤는 기분이 풀릴 때까지 미아를 무시했고, 미아 역시 자존심을 세우며 버티다가 결국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는 했다. 한때는 그렇게 우월감을 느꼈다.
이제 패트리샤는 비록 비좁고 좀먹은 데다 어마어마하게 비싸지만 그래도 LA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있었고, 내킨다면 타이레놀과 코코아 퍼프의 TV 광고 출연자를 뽑는 오디션의 최종 단계까지 '갈 뻔한' 경험이나, 미남과 미녀만을 직원으로 뽑는 그녀의 전 직장에서 한 번 톰 크루즈를 목격한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사람이었다.
"패트리샤." 미아는 눈썹을 찡그리며 친구에게 다가갔다.
"안녕, 미아. 잘 지냈나 보다." 패트리샤는 그제야 미아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듯이, 조금은 놀란 시늉을 하면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면면에는 미처 지우지 못한 경멸과 배신감이 떠올라 있었고, 그것은 수화기 너머에서 꼭 한 번 얼굴을 보고 싶다며 부드럽고 달콤하게 회유하던 목소리와는 영 딴판이었다.
"저런. 나는 다니엘에게서 네 안부를 계속 전해 듣고 있었는데."
한껏 빈정거리자 패트리샤가 상처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그 애와 만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어?"
거짓말을 해야 할 차례였지만, 누군가의 말마따나 미아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게 중요하니?"
감독의 큐를 받은 것처럼 패트리샤는 공중으로 손을 들어올렸고, 내리쳤다. 공교롭게도 축제를 맞아 설치된 간이 회전목마가 정해진 수만큼의 회전을 마치고 이번 회차 운행을 끝내면서 장내가 고요해진 순간이었다. 찰싹. 유니콘의 등뼈를 붙들고 앉은 아이들이 입을 헤 벌린 채 다른 손의 아이스크림이 녹아 가는 줄도 모르고 그저 그런 연속극을 재현하는 두 여자를 쳐다보았다. 미아는 진부한 교리를 떠올렸다. '네 왼편 뺨마저 돌려대라.' 하지만 그녀의 옛 절친이 특별할 것 없는 오른손잡이이기에, 이미 왼뺨을 맞은 뒤라면?
잘 손질된, 당장 걸치고 있는 터키석 색 페이크 퍼 코트와 같은 빛깔의 아몬드 모양 손톱이 뺨을 스쳤다. 주연 배우와 합을 맞추는 스턴트 배우처럼 미아는 마찰음에 맞추어 한껏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패트리샤는 입술을 깨문 채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붙잡고 주물렀다. 그녀의 연약한 몸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행위를 저질렀다는 듯이. 길고 섬세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패트리샤는 여전히 예뻤다. 십 대 때만 해도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고 예쁘장한 정도였지만, 얼마 안 되는 웨이트리스 월급을 긁어모아 LA의 최신 유행 살롱에 전부 투자한 덕을 톡톡히 보았는지 이제는 아메리칸 이글의 월간 카탈로그에 오르는 이름 없는 모델로는 보였다.
그러니 문제는 저렴한 연기력일 것이다. 미아가 기억하기로 패트리샤가 이수한 연기 수업은 늘 비어 있던 미아의 집 거실에 배를 깔고 드러누워 제이미 리 커티스의 비명 소리를 흉내 내던 게 전부였다. 고교 시절 한 편의 입센도 심지어는 셰익스피어조차도 읽어본 적 없는 프롬 퀸이 연기자가 되겠다며 고향을 뛰쳐나갔을 때, 그녀의 성공을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딸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주는 저 애의 멍청한 부모? 무턱대고 낙관하는 저 애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 상냥하고 똑똑한 친구? 저 애가 구체적으로 허황된 꿈을 조잘거리는 동안 그저 조수석 시트를 뒤로 젖히고 가슴팍의 단추를 풀어헤칠 생각 뿐인 애인?
미아는 진심으로 그녀가 실패하기를 바랐다. 왜냐하면 그녀만이 패트리샤가 가진 반짝임을, 결코 그녀 자신의 것은 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줄곧 시기해 왔던 재능과 전망을 알아보았으니까. 그녀만큼은 패트리샤가 할리우드의 거식증 걸린 희멀건 여배우들보다 가치 있는 소녀임을 이해했으니까. 패트리샤 브라운이 새로운 밀레니엄의 얼굴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온 마음을 다해 믿은 사람은 미아 디안젤로뿐이니까.
그러나 이미 모두 지난 일이었다.
희게 질린 패트리샤를 판잣길에 내버려두고 미아는 돌아섰다.
태양이 따가웠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물질) 세계는 널 저버릴 거야 (220816)
"네가?"
지중해의 해풍을 맞으며 자란 레몬 나무, 뉴저지 사투리와 뒤섞여 종잡을 수 없어진 남부 이탈리아의 억양, 만져보기는커녕 스크린 밖에서는 본 적조차 없는 사파이어 반지, 길고 매끄러운 머리카락, 눈이 마주치면 푸르르 떨며 살갑게 짖는, 털이 푹신푹신하고 발바닥이 말랑한 개, 분홍색 스포츠카가 딸린 백금발의 플라스틱 인형, 컨스티튜션 애비뉴의 크고 흰 저택….
미아는 해변의 벤치에서 일어나 앙헬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땀과 소금과 올리브 기름이 밴 기념품 티셔츠가 볼품없이 우그러졌다. 아바나에서도 시칠리아에서도 종려나무는 자라고 그것들은 분명 마젠타 같이 허황된 색을 띠지는 않겠지만 그녀 자신이 두 눈으로 확인할 일은 아마 영영 없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그녀가 관측한 바에 따르면 관광객들은 저 멍청한 티셔츠를 사서 곧장 입고 돌아다니기보다는 쇼핑백에 고이 넣어두기를 택했다. 마침내 휴가의 끝에 집으로 돌아가면 그간 저지른 충동적인 구매를 후회하며 어디가 나쁜지 콕 집어 말하기 어려운 값싼 (그러나 그 품질에 비하면 오, 정말 너무나도 비싼) 기념품들을 장식장에 밀어 넣고 잊어버렸다.
모두가 숨 가쁘게 소비하고 가꾸고 전쟁이 끝나기를, 그리고 진짜 전쟁이 다시 시작되기를 빌고 어딘가로 떠나거나 탕자가 되어 돌아오거나 과감히 사랑에 빠지거나 일생의 원한을 되갚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과연 그중에서 무엇만이 진실된 욕망이고 또 무엇이 그녀를 충족시킬 수 있을까?
관절이 헌 노인들만이 거리를 배회하는 한산한 평일 낮, 패션 잡지를 뒤적이면서 꾸는 백일몽은 꿈이 아닌가?
일찌감치 분수에 맞는 삶을 깨달았다고 해서 그걸 외로움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나?
축구공을 차고 냄비를 휘젓고 살사를 추는 그 모든 행위를 추동하는 뜨거운 심장은 차양을 내걸고 소리 높여 룸바와 맘보를 튼 푸드 트럭 안에서라면 단 한 순간도 쓸쓸해지지 않는다고 이 남자는 그렇게나 당당하게 자부할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뭔데?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그를 놓아주었다. 구김이 간 목둘레를 문질러 정돈하고 뒤로 물러섰다. 앙헬이 맞았다. 너무나 명명백백해서 또는 소위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 소리 내 말한 적이 없다 한들 적어도 그가 줄곧 암시해 온 대로 떠나는 일은, 새로운 출발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더더욱.
"그래도,"
부와 권력을 움켜쥐겠다는 야망이 없다거나 그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격 요건조차 충족하지 못하거나 — 아무리 아메리칸 드림을 주창한다 해도 어쨌거나 미국인들의 대통령이 미국인이 아닐 수는 없으므로 — 혹은 페라리는커녕 차고조차 딸리지 않은 허름한 빌라에 살고 있다고 해도.
"당신이 조금은 마음에 들었는데…."
우리 안의 잘못 (220817)
바보 같은 바네사.
그 애가 죽었다. 기어이.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 롱비치 고등학교의 너른 운동장에 설치된 무대 위에 오른 그녀의 졸업식 축사를 미아는 기억한다. 전날 그들은 한 무리의 중학생들처럼 패트리샤의 방에 모여 함께 잠들었고, 불을 끄기 직전까지도 바네사는 원고에 줄을 그어가며 그것을 다듬었었다. 축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여러분, 도전은 늘 어렵고 또한 두렵습니다…> 그 뒤로 달 착륙과 아파르트헤이트, 시트콤 <별난 커플> 시리즈에 대한 약간은 진부하고 감상적이지만 여전히 재치 있는 논평이 이어졌고, 참관객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유독 바람이 강한 날이었다. 코발트 블루 색의 졸업 가운이 공기의 흐름을 따라 힘차게 펄럭였다. 바네사는 자신의 흑갈색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 넘기며 동급생들을 마주보고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나 새로운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롱비치 고등학교의 80년도 졸업생 여러분은 그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나갈 것입니다.> 패트리샤와 다니엘, 바네사의 당시 남자친구가 장난스럽게 환호성을 지르며 공중에 주먹을 휘둘러댔다.
<여러분, 졸업을 축하합니다.>
그녀가 누리는 한없는 애정, 그것을 다시 그녀 주변을 향한 헌신으로 전환하는 재량, 그녀의 영특함을, 미아는 무르고 산패하기 쉬운 구석이라고 비웃기도 했던 것 같다.
이제 바네사는 죽었고, 그녀를 기다리는 미래는 없다. 다만 그녀가 없는 미래가 남겨진 사람들의 어깨를 움켜쥐고 질질 끌고 나갈 뿐이었다.
미아가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에이샤에 관한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바네사의 동생은 모두에게 다루기 까다로운 존재였고, 미아는 그 애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바네사는 마을을 떠날 때 그녀에게 동생을 돌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 중에서 롱비치에 남는 사람은 미아뿐이었으니까.
그 부탁이 얼마나 모멸적이었는지, 바네사는 이해할까?
축제 첫날, 통금이 아슬아슬하게 가까워 올 때까지 에이샤를 붙잡고, 그 애가 미아에게 느끼는 경멸과 동질감과 그 모든 것을 눈치 채거나 눈치 채지 못한 척하며 시시덕거릴 때, 바네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바네사는 죽었고 여기에 없다.
퀸 부부는 영영 딸을 잃었다.
경찰과 정보국과 부검의들과 TV 전도사들이 무어라 떠들어대든 좆같은 사실은, 모든 죽음은 미제 사건이라는 것이다.
미아는 그녀가 결코, 에이샤가 한때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상냥하고 똑똑하고 어쩌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바네사를 대신할 수는 없음을 깨닫는다.
'어쩌면 틀린 사람이 죽었을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한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가족을 잃은 어린 소녀가 여전히 심장이 터져나갈 듯 흐느끼고 있었다.
미아는 그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바네사의 졸업식 축사를 생각하면서. 어떤 미래와 어떤 별난 커플과 어떤 차별과 어떤 신화를 곱씹으면서.
CRASH MY CAR (220818)
'내게 그런 걸 묻는 건 직무유기예요.' 미아는 생각한다. '당신에게는 나보다 더 긴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그러나 조금 움츠러든 채,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지는 재를 쫓아 눈길을 돌리는 남자에게, 그녀는 약간의 연민을 느낀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한 명의 여인으로 성장하는 동안 정작 자신은 여태 자라지 못한 불쌍한 소년. 네버랜드의 피터와 반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당신을 미워할 수 있는 운 좋은 여자는 누구일까?
미아는 문득 그녀가 기민하게 유추해낸 만큼이나 눈앞의 남자에게도 그녀 자신이 드러났을지 궁금해졌다. 그럴 확률은 희박해 보였다. 그녀는 패트리샤가 그립지 않았다. 그녀는 등을 떠밀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다지 간절한 필요가 아님에도 이 연극에 어울린 이유는, 글쎄. 그녀 자신도 이해하기 어려운 때때로의 충동에 불과했다.
그들 자신이 베푸는 친절이 스스로 어떠한 부담도 되지 않는 것처럼 구는 사람들을 미아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좋은 사람들. 훌륭한 이웃. 타의 모범이 되는 시민들. 삶은 원래 지속하는 것이다. 호의는 필연적으로 고갈되기 마련이었다. 그것에 기대어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스티브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당신은 내게 새 차를 사 줘서는 안 되고, 나는 당신과 떠날 수 없어."
타다 남은 꽁초를 던져 밟는다. 불티가 밤바람에 흩날렸다.
"하지만 내 낡은 포드 트럭은 때때로 변덕스럽게 정신을 차리고, PCH를 따라 계기판의 숫자가 아슬아슬해질 때까지 달릴 수는 있죠."
채 식지 않은 전원 꺼진 네온 사인이 지직 떨며 소리를 냈다.
"해가 뜨기 전에 돌아와야만 한다는 걸 당신이 기억하기만 한다면."
자매처럼 연인처럼 (220819)
패트리샤 브라운, 그녀는 수평선이 내다보이는 업타운의 멀끔한 2층 주택에 사는 전형적인 밸리 걸이었다. 기분이 좋을 때면 아이들에게도 샹그리아를 한 잔씩 내주는 늘씬한 어머니는 전업 주부, 아버지는 점잖고 유능한 가정의학과 의사로 롱비치의 모든 어린아이들은 한 번쯤은 그의 앞에서 수두에 걸린 알몸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부재와 방치가 양육의 기본 골조인 가정에서 자란 미아 디안젤로가 그녀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들 덕분이었다. 수년 전 안드레아 디안젤로가 로저 브라운의 <작은 부탁>을 들어준 뒤로, 패트리샤의 아버지는 딸과 동급생인 미아를 꾸준히 챙겨주었다. 닥터 브라운이 딸아이를 통해 미아를 불러 매년 독감 예방주사를 맞히고 회충약 따위를 챙겨주지 않았다면, 글쎄, 미아는 이미 한참 전에 죽은 목숨일지도 몰랐다.
패트리샤는 어른들 간의 공모에 의한 반강제적인 우정을 그녀의 성질머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고분고분하게 수용했다. "네 곱슬머리 참 근사하다." 첫 만남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도 같았다. 어쨌든 학교의 코흘리개들은 곁에 두기에는 너무 유치하거나 너무 못생겼거나 너무 사나웠고, 패트리샤의 마음에 들었다는 건 어쨌거나 미아가 그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했다는 뜻이었다.
첫인상 테스트를 통과하고도 그 애와 쭉 함께 어울리려면 아주 변덕스럽고 불규칙적이며 자주 서로 충돌하는 많은 규칙들을 지켜야 했다. 예컨대 성적표에서 매겨지는 등급은, 그 이상이나 이하는 '섹시하지 않은 수준의' 똑똑함이거나 덜떨어짐이었기 때문에, A-에서 C+ 사이여야 했고, 패트리샤가 좋아하는 과목(체육, 보건, 화학)에서는 그녀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아서는 안 됐다. 체중이 눈에 띄게 불었다든지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은 친구로서 솔직하게, 아주 솔직하게 알려주어야 했지만 그 대상이 패트리샤인 경우 괜한 참견은 금물이었다. 물론 그 규칙들 간의 모순을 지적하지 않는 것도 규칙 중 한 가지였다.
그러한 복잡다단하고 하등 쓸모없는 법칙과 규율이 외부 세계에서는 한없이 멍청하게 여겨지리라는 것을 미아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패트리샤를 용인했다. 모두가 생각하듯이 패트리샤가 꼭 그렇게 못되거나 얄팍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미아는 기억을 더듬어 패트리샤가 그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것은 내던져 버렸던 몇몇 사건들이나, 또는 아주 어릴 적, 그녀가 처음 미아의 집에 초대 받았을 때, 마주 앉아 마텔 사의 빼빼 마른 인형들의 머리를 빗겨 주며 패트리샤가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으로 얼룩진 시선을 한 곳에 정착시키고 무례한 질문들을 애써 삼키던 모습을, 그 앳되고 경솔하고 어리석은 소녀가 친구에 대한 의리로 보였던 모습을 성토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걸 해명하는 게 이제 다 무슨 소용이지?
패트리샤는 죽었고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데.
누가 그녀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사건의 전말은 미아에게도 전달되었다. 패트리샤는 클래식 바에서 발견되었다. 그 애가 머리를 가격당하고 그곳으로 질질 끌려오기 고작 몇 시간 전에, 미아는 바로 그곳에서 바텐더 슐츠와 시시덕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질문과 답을 교환하는 시답잖은 놀이로 남자의 과거를 맞혀보다가, 진상이 밝혀지자 그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변변찮은 농담으로 무마하려 했었다. 술값 12달러에, 그녀가 고집스럽게 주장하여 8달러를 팁으로 더 냈고, 비틀거리며 집까지 걸어 돌아갔다.
그 바로 옆 골목에서, 범인은 패트리샤를 데리고 바의 직원들이 주정뱅이들을 몰아내고 영업을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때 패트리샤는 정신이 든 채였나? 은색 덕테이프로 입을 가로막힌 채, 알딸딸하게 취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미아가 그 어둠 속으로 단 한 순간만, 단 한 번만 고개를 돌려 주기를, 눈을 맞춰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무슨 악취미인지 살인마는 얼음 위에 패트리샤를 세워놓고 천천히 교수형을 집행할 생각이었다가 돌연 변심하여 이마에 총을 쏴 갈겼댄다. 미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하긴 패트리샤는 만만찮은 여자애가 아니기는 했다. 무엇이 그 살인마의 마음을 바꾸었을까? 너무 시끄럽게 비명을 질러대서? 아니면 목이 너무 가늘어 올가미를 빠져나올 것 같았나? 자신을 기절시키고 납치한 살인마에게도 코가 너무 뭉툭하다느니 입에서 고약한 냄새가 난다느니 조롱해대서 심기를 거슬렀나?
표적을 뚫고 지나가는 동안에도 총알은 회전을 멈추지 않아서, 뒤통수를 완전히 헤집어 곤죽을 만들고 바의 벽에 박혔다. 도무지 관을 열고 장례식을 진행할 수가 없어서 패트리샤는 부검이 끝나는 대로 6피트 아래에 묻힐 예정이었다. 브라운 부부는 미아에게 추도사를 써 주겠냐고 물었다.
미아는 그 부탁을 거절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실은 그 애가 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스무디를 만드는 '로라'의 딸이나 키드 맥카티, 마이애미에서 온 4월의 청년 또는 제인 파커가 아니라 패트리샤 브라운이어서. 생전에 그렇게나 간절하게 유명해지고 또 사랑 받기를 바랐지만 결국 아주 미미한 충격파만을 남긴 죽음이어서.
패트리샤가 더는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권리도,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 그녀 자신 말고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해서 때때로 미아조차도 속아넘어갈 뻔했지만 기실 오래전부터 그래왔다는 것, 미아 디안젤로는 늘 자유로웠고 늘 제정신이었고 늘 스스로 선택을 내려왔다는 사실은, 그렇게 증명되었다.
DOWNTOWN GIRL & MAN-ABOUT-TOWN (220821)
"여기가 어디죠?" 크리스토발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내 집." 미아가 속삭였다.
"아하." 크리스토발이 웃었다. 입가에 새끼손톱만 한 볼우물이 파였다. "내가 당신 마음에 들었군요."
빌라 단지로 걸어오며 취기는 밤공기에 옅어졌지만 나머지 두 사람보다 두 잔은 더 마신 크리스토발은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현관문이 완전히 닫힌 다음, 얇은 벽 너머에서 그의 사촌형이 층계를 따라 내려가 기척이 사라진 다음에야 미아는 크리스토발을 부축해 다시 움직였다. 목적지는 거실의 녹색 천 소파였다. 크리스토발을 침실에 데려갈 계획은 없었다. 피와 체액으로 시트가 더러워지는 건 상관없었지만, 토사물은 싫었다. 그건 낭만의 산물도, 열정의 산물도 아닌 데다 냄새마저 지독했다.
집이 넓지 않은 덕에 거실로의 이동은 힘든 여정은 아니었다. 크리스토발은 두서없이 미아의 외모를 칭찬하거나 오늘밤이 얼마나 완벽한지, 또 앙헬이 보호자 행세를 하면서 그를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주어섬겼다. 미아는 그런 속이 보이는 달콤한 말과 친구에 대한 강도 낮은 험담을 즐겼으므로 크리스를 만류하는 대신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그를 소파에 앉혔다.
"당신이 말을 걸어줘서 기뻐요. 칙칙하게 앙헬과 단 둘이서 마시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크리스토발이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그녀의 반응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아는 대답했다. "천만에요. 오늘 즐거웠어요."
"이제 우리 자는 건가요? 그러니까, 내 말은." 크리스토발이 왼손 검지와 엄지로 고리를 만들고 오른손 검지를 그 사이로 통과시켰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공짜 숙박 서비스를 제공하겠어?' 생각하면서, 미아는 남자를 마주 보고 웃었다.
"할 수 있겠어요?"
"당연하죠."
잔뜩 취해 비몽사몽한 채로도 자신감을 드러낼 때 크리스토발의 목소리는 무척 오만하게 들렸다. 그가 허리를 들추고 주섬주섬 벨트를 풀었다. 미아는 그녀의 청바지 지퍼를 내렸다. 긴 전희를 기대했다면 얌전히 귀가하는 대신 옆옆 건물로 갔을 것이다. 크리스토발이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미아는 몸을 기울여 그에게 입맞췄다. 입술을 빨고 치열을 핥는 동안 크리스토발은 제 아랫도리에 나머지 한쪽 손을 집어넣고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크리스토발의 그것은 고집스럽게도 서지 않았다.
"오, 이런." 크리스토발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오, 이런. 미안해요, 미아. 이런 적 없었는데."
그건 남자들이 하는 가장 흔한 거짓말 중 하나였고, 미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크리스." 크리스토발은 수치심과 모욕감, 그 반작용으로 수반되는 기묘한 흥분으로 인해 거의 흐느끼듯 무어라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아는 계속 괜찮다고, 조금 더 해 보자고 대답해 주었지만 실은 한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팔목에 끼고 있었던 끈으로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묶고는 거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거실은 좁았고 탁자와 소파 사이의 공간은 사람 하나가 들어가기에도 빠듯해서, 무릎과 등이 전후면의 가구에 눌려 불편했다. 그러나 크리스토발은 눈치 채지 못한 듯했고, 그저 약간의 주저와 기대가 섞인 눈빛으로 다음에 벌어질 일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아는 그와 눈을 맞추며 드로즈를 끌어내렸다. 서늘한 손이 좆을 감싸쥐자 크리스토발이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미아는 그것을 쓸어내리고, 살짝 힘주어 압박했다가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멋쩍게 수그려 있던 그것이 점차 고개를 들었다. 얇은 피부 아래의 혈관이 도드라지고, 이전보다 살짝 부풀어 입에 넣기에 너무 볼품없는 형태에서 벗어났을 때, 미아는 입술을 벌렸다. 크리스토발이 스페인어로 무언가 짧은 문장을 내뱉었다. 미아는 그것을 기억해두었다 다음날 그의 사촌형에게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으나, 입속에 들어찬 뜨겁고 물컹한 이물감과 엇박의 가쁜 호흡이 낳는 일종의 트랜스 탓에 금세 그것을 잊어버렸다. 낮게 끊기는 신음과 함께 정수리 위에서 파텍 필립의 손목시계와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클래스 링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하룻밤 만에 그는 벌써 과거의 남자가 되었고, 오늘 그녀를 따라 문턱을 넘은 사람은 또 다른 라라였다. 앙헬은 취해서 허둥거리거나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기다렸고, 빠르게 목욕도 마쳤다. 미아는 또래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이가 많은, 그래서 딱 그만큼의 연륜을 가지고 이끄는 연상의 남자들을 선호했고, 그런 경향성을 굳이 감추지도 않았다 — 적어도 안드레아 디안젤로가 마을에 없는 동안에는. 그녀는 사 분의 일쯤 남은 맥주를 말끔히 비우는 대신 미지근하게 김이 빠지도록 바닥에 내려놓고 그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방은 협소했다. 색 바랜 벽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제일하우스 록>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한쪽에는 서랍장과 화장대, 맞은편에는 침대가 놓여 있었다. 불은 켜지 않았지만 거리로 난 창문으로 가로등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서랍장 위에서 희끄무레한 노란 빛이 반사되었다. 표면이 반질반질하게 닳은 금반지였다. 앙헬은 잠시 그 반짝임에 시선을 두었다가 고개를 돌렸다. 미아가 허리춤에 느슨하게 묶여 있던 끈을 풀고 있었다.
"저거 엘비스야?"
포스터에 적힌 이름 열두 글자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앙헬은 새까만 머리에 잔뜩 왁스칠을 한 남자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가 보기에는 느끼한 데다 머리카락이 너무 딱딱하고 가식적인 모양새였다. '미국 여자애들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어쨌든 앙헬에게는 그 자신의 밤색 곱슬머리가 훨씬 매력적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미아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호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 사이 목욕 가운은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고, 그녀의 손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기 위해 등 뒤로 넘어간 채였다. 잡념에 정신이 팔려 타이밍을 놓칠 뻔한 앙헬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깐, 아가씨señorita. 돕게 해줘."
"네 바지를 벗는 데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니고, 파피토papito?"
미아가 짓궂게 되물었다. 앙헬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에 부르르 떨면서 그것이 섹시한지, 아니면 분위기를 완전히 망치는 요소인지 고민했고, 짧은 판단 끝에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앙헬이 등을 더듬어 브래지어를 벗기고 그녀를 침대에 눕히자, 미아는 문득 얼굴을 일그러뜨리듯 코끝과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앙헬이 고개를 들어 그녀에게 의문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앙헬이 말했다.
"알아. 아무것도 아냐." 미아가 대꾸했다.
앙헬의 몸은 제법 다부졌고, 그녀가 그다지도 질색하는 기념품 티셔츠를 입지 않은 채로는 더욱 봐줄 만했다. 그가 가슴을 지분거리거나 허벅지 사이의 골에 성기를 비비면 원초적인 쾌감이 치솟았지만, 그와 동시에 제삼자의 시선에서 그들의 모습을 자꾸만 그리게 되었고, 어딘가 잘못된 것만 같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창틀 너머 어두운 거리에 두 사람 분의 나체의 윤곽이 비춰지고 있을 것만 같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앙헬."
호명되자 배꼽 주변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문지르던 앙헬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됐어. 그냥 넣어줘."
"벌써?" 그가 탐탁지 않아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미아는 완고했고 두 사람은 적어도 그럴 때 그녀의 고집과 맞서려는 시도가 무용하다는 것을 알 정도로는 친밀한 사이였다.
다행히 앙헬에게는 보조가 필요 없었고 — 보조라니! 언제는 이 집이 요양원이라도 됐단 말인가? — 이윽고 그가 미아의 두 다리를 밀어 젖히고 잔뜩 발기한 그의 것을 삽입했다. 미아의 손은 침대 시트 위를 헤메다 남자의 목덜미에 감겼다. 앙헬이 양 팔뚝으로 제 몸을 받치고 하반신을 느릿느릿 쳐올렸다. 속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콧대를 타고 뚝뚝 떨어졌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어스름한 빛에 의존한 눈동자는 산호나 석양보다는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었고, 미아는 그것을 가만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녀는 그를 끌어당겨 안고 턱을, 목젖과 쇄골을 입술로 더듬었다. 앙헬은 꾹 눌러 담은 듯한 신음을 띄엄띄엄 토해냈고, 이따금 그녀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으나, 미아는 그것이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로 된 것처럼, 마치 지구 반대편에서는 자신이 미아가 아니기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답을 삼켰다.
매트리스는 삐걱거렸고 후끈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실내는 조금 쌀쌀했지만, 미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그녀는 앙헬이 신경쓰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았다. 십 대 시절부터 쓰던 방, 낡은 포스터, 구겨진 이불, 담배 냄새가 밴 벽지. 그가 그런 것들을 이해하는 남자이기 때문에 그를 초대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를 내보내야 할 것이다.
조금은 서글픈 기분으로 미아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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