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라고요?"
몇 번이고 되묻자 택시 기사가 눈에 띄게 짜증을 냈다. 요한은 거의 쫓겨나다시피 택시에서 내렸다. 청라동으로 가 달라고 하자마자 냉큼 미터기를 누를 때부터 묘하게 불안하더라니. 제자리에서 달리는 푸른 말 옆의 숫자는 계속 계속 커지다가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드디어 멈췄다. 지갑을 탈탈 털어 동전과 지폐를 섞어 내자 택시 기사도 황당하다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네는 외지인이 봐도 그린 듯한 부촌이었다. 철가방을 채운 빨간 대림 시티가 한두 대 세워져 있고 창문에는 반투명한 가림막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동네 중국집을 상상하던 요한은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 앞에서 머뭇거렸다. 간판에 커다랗게 흘림체로 가게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한자라고는 월화수목금토일 일곱 글자 읽는 게 최선인 그에게는 그림이나 다름 없었다.
하긴 동네 중국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명함이기는 했다. 요한에게 그런 양식미를 알아볼 만한 미감이 있겠냐만은 평범한 찌라시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런 그도 분별할 수 있었다.
유리문에 달린 풍경이 달랑거렸다. 카운터에는 치파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서 있었다. 유니폼 같은 것이겠지만, 요한은 괜히 자신의 후줄근한 남방 매무새를 정리했다.
"도와드릴까요?"
여자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오전 열 시, 중식당이 문을 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당연하게도 요한은 이곳의 주 고객층에 해당되지도 않았다. 애초에 홀로 오는 손님이 드물 뿐더러 고작 이십 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끼니 채우려는 목적으로 실수로 들어오기에는 출입구부터 장벽이 높았다. 접객이나 회식 차원에서 단체로 찾아오는 사업가들이 아니라면 부친의 승진 또는 큰딸의 국제고 입학을 축하하는 가족 단위 손님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남자는 예약을 확인하러 온 샐러리맨 같지도 않았다.
"저… 소개를 받아서."
요한이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종업원이 상냥하게 되물었다.
"무슨 일로?"
"서위리… 를 찾으러 왔는데요."
다정한 사람
"야, 신병. 몇 살이야?"
"스무 살이요!"
"다나까 안 하냐?"
"스무 살입니다!"
요한은 침상에 앉아 빨래를 개고 있었다. TV에서는 어설프게 피칠갑을 한 귀신이 으리으리한 저택 구석에 웅크려 집주인인 재벌 남자를 겁 주고 있었다. 지난 달 <너의 목소리가 들려>가 종영한 뒤 방영을 시작한 후속작 <주군의 태양>이었다. 제목도 작가도 남녀 주인공 배우도 달랐지만 요한에게는 다 거기서 거기로 느껴졌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트라우마가 있는데 사실 두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얽혀 있었고 어른이 되어 우연찮게 재회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지고 해피 엔딩. 가당치도 않다고 요한은 혀를 찼다. 이 세상 로맨스가 죄 그렇게 이루어지는 거라면 고백 편지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은 전국 부대의 중대장이어야 했다. 주마다 불평 불만이 적힌 편지함을 열어 보니까. 그러나 요한의 의사와는 달리 분대장은 요일별 시간별로 챙겨 보는 방송사가 다른 드라마 중독자였고 근무를 서느라 자리를 비우는 날에 그가 놓친 방영분 줄거리를 요약 전달하는 건 분대 막내인 요한의 몫이었다.
분대장에게는 주제에 까다로운 습성이 있었는데 등장인물을 배우 이름으로 부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몰입이 깨진다나 뭐라나. "지난 화에서 이종석이 이보영에게 키스하지 않았습니까," 하면 "네가 무슨 연예가중계야? 강심장이야? 헷갈리니까 지랄하지 말고 배역 이름으로 말해." 라고 시비를 털었다. 본명을 들먹이면 기억 안 나는 척 짜증을 내는 버릇은 주연은 물론 엑스트라와 까메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돼서 요한은 관심도 없는 드라마 배역과 내용을 줄줄이 읊고 다녀야 했다.
한 번 길들여진 루틴은 쉽게 벗어나지지가 않아서 이번 여름 분대장이 드디어 전역을 하고도 요한은 습관적으로 오늘자 드라마의 내용을 속으로 요약하고 있었다.
어리바리한 이등병 시절에서 일병 달고 상병 진급 직전까지도 침대는 문 바로 앞 쓰레기통 옆자리, 행정반에서 작업 인원을 모으면 빠지지 않고 불려 나가고 후임 하나 없이 별 같잖은 꼬투리를 잡는 선임들에게 사사건건 기합을 받는 게 지난 8개월간 요한의 일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신병이 들어왔다. 척 봐도 앳되어서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신병은 생활관 끄트머리 요한의 자리 건너편에 짐을 풀었다.
최 상병이 그를 불러 호구조사를 했다. 관등성명은 의외로 제대로 대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첫 질문부터 저 꼬라지가 났다. 요한은 적절히 끼어들 타이밍을 재며 TV 화면에서 눈길을 돌렸다. 이등병의 뒷짐 진 손이 부산스럽게 꼼지락거렸다. 그뿐만 아니라 뒷굽을 슬며시 올렸다 내리거나 무릎을 움찔거리는 둥 안절부절못하고 자꾸만 움직이는 꼴이 겁에 질린 것 같지는 않았고 수업 시간 30분을 못 견디는 초등학교 저학년 같았다.
액면가 중학생에서 하는 짓은 초등 3학년으로 가차없이 감점하며 귀찮게 됐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에이스가 두 명은 더 붙어도 모자랄 판에 반 년 넘게 걸려 겨우 들어온 막내가 정자세를 5분도 유지하지 못하는 애새끼라니. 자대 배치 받고 첫날 바로 요상한 별명이 붙었을 때부터 요한의 군 생활은 단단히 꼬인 게 분명했다.
"대학은?"
"안 다닙니다!"
"떨어졌어?"
"아뇨! 그냥 안 다니는데요?"
최 상병의 두툼한 손바닥이 위리의 뒤통수를 퍽 가격했다. 원체 손버릇이 나쁜 새끼였는데 멍이 들거나 뼈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고 꼭 항상 기분만 더럽게 이마나 뺨 같은 데를 골라 툭툭 건드렸다.
아버지 없이 자란 요한은 누군가 그런 식으로 자길 때리는 게 난생 처음이었다. 애초에 크게 혼날 만큼 비행을 저지르는 불량아도 아니었거니와 어머니 모말희는 매를 들기도 전에 전부 자기 잘못이라며 아들을 얼싸안고 눈물 흘리는 심약하고 다정한 여자였다. 생김새가 다르다고 놀림 당하던 것도 나이가 한 자릿수이던 시절에나 그랬지 중학교 들어갈 즈음부터는 머리털과 눈동자의 옅은 색소가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 사춘기 여자애들 사고 체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는 실은 요한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고 어쨌든 원만한 교우관계와 무난한 학창 시절을 거쳐 온 덕에 주먹다짐이라고는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어안이 벙벙해 최 상병, 당시 일병을 바라보았다가 이게 어딜 감히 눈을 부라리냐고 정수리를 한 대 더 얻어맞았다. 그 다음부터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법을 익혔다. 신병도 금세 배우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말투 똑바로 하라고."
"그냥 안 다닙니다!"
"꼴통 새끼. 그럼 사회에 있을 때 뭐 했어?"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뭐? 장난하냐?"
"진짜예요! 히키코모리였습니다!"
신병이 억울해하며 외쳤다. 그 목소리가 상당히 진정성 있어 요한은 깜짝 놀랐다. 신병의 태도는 요한이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허세나 과시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진실을 까발리는 데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내밀하든지,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연약한 치부이든지 간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자식 골 때리네."
그제야 최 역시 신입이 영 만만찮은 부류라는 걸 알았는지 맥이 빠져서는 혀를 찼다. 요한은 그것이 일종의 신호임을 알아차리고 개키던 수건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짱깨. 네 맞후임이니까 네가 책임져라. 제대로 못 하면 짤 없이 연대 책임인 거 알지?"
최 상병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병을 인계했다.
"예, 똑바로 가르치겠습니다. "
요한은 담배나 한 대 피우자며 이병을 데리고 나섰다. 눈치가 그 모양인 것으로 보아 '저 담배 안 피우는데요?' 따위의 되바라진 말대꾸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꼴에 또 흡연자이기는 한 건지 순순히 따라오는 듯하다가 결국 문간을 넘기도 전에 일을 쳤다.
"그런데 모요한 일병님은 중국인이에요? 아니, 중국인이십니까?"
이 편견 없이 덜떨어진 새끼 봐라. 요한은 그가 일부러 엿을 먹이는 건지, 그린 캠프에라도 가고 싶어 수작질을 부리는 건지 가만 노려 보았으나 신병은 무구하게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방금까지 혼나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는 녀석을 최 상병은 당최 어떻게 기선제압 하려 들었던 걸까? 주눅 들지도 않고 낯조차 가리지 않아 목소리는 또 어찌나 큰지 아무리 면박을 줘봤자 칼로 물을 베는 꼴이었다.
"중국인이 군대를 어떻게 오냐?"
요한이 한숨을 참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저희 엄마 아빠도 화교인데요? 인천에서 중국집 하세요. 그럼 왜 모요한 일병님을 짱깨라고 부릅니까? 모요한 일병님 부모님도 중국집 하십니까?"
생활관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순간 요한은 이종석 아니 박수하처럼 남의 생각이 읽히는 경험을 했다. '씨발 좆됐다.' 신병은 제 발언의 여파를 아는지 모르는지 멀뚱멀뚱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적이 내려앉은 가운데 브라운관 속 소지섭이 눈치 없이 공효진한테 막 호통을 쳤다. “너 머리 언제 감았어? 누굴 유혹하려면 머리나 좀 감고 해!”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그 얘기가 소대장 귀에까지 들어가서, 결국 이병 위로 전부 집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가뜩이나 군대 내 부조리니 가혹 행위니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인종차별이라는 신개념 괴롭힘으로 사단 마크 8시 뉴스에 띄워보고 싶은 거냐고 소대장이 길길이 날뛰었다. 개막장 부대라고 전국구로 소문 나고 싶은 게 아니면 알아서 잘들 좀 사리라고도 고함 쳤다. 병장도 상병도 뒷짐 지고 침묵을 지키는 와중에 요한은 또 한 번 속마음이 읽히는 경험을 했다. '씨발 왜 우리한테 지랄이야.' 요한은 그 '우리'에 포함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후폭풍이 딱히 두렵지 않았다.
그 사이에 요한은 맡은 임무가 바뀌었다. 매일 드라마를 요약하는 것에서 신병을 전담 마크 하고 1303에 전화 거는 일 없도록 미리 케어하기. 듣자 하니 사정인 즉 화교라는 게 어그로를 끌기 위한 생구라는 아니었고 부모가 2대째 화교 출신에 귀화한 집안이라 동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외국인 학교 다니고 중국어 쓰면서 자랐다고 했다. 귀화자이므로 군 면제인 데다 훈련소에서 수류탄 훈련 열외자로 꼽힌 결격 사유도 있다는데 굳이 자처해서 군대에 들어온 또라이 새끼를 누구도 전면으로 상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경계 근무 서러 나갔다가 부대원이 눈앞에서 입에 소총 넣고 갈기면 그만큼 꺼림칙한 일도 없을 테니까.
결국 이병 서위리 관리는 전적으로 요한의 몫이 되었고 그 덕에 모택동이니 짱깨니 하면서 요한을 구워 삶던 선임들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게다가 그 관리라는 게 그렇게 품이 크게 드는 것도 아니었다. 보기보다 체력 쌩쌩해서 구보할 때 뒤처지지도 않고(오히려 대열 안 맞추고 앞서나갈까 걱정이었다), 작업 안 하겠다 꾀병 부리며 내빼지도 않고(자꾸 한두 가지씩 빼먹고 잘못하는 게 문제였지만) 눈치 없다고 갈구는 선임들에게 불만을 품는 것 같지도 않았다(물론 요한이 보기에는 그것조차 눈치가 없는 덕이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말투 안 고쳐지고 기강 안 잡히는 건 최대한 상병 위로 마주치지 않게만 하면 됐다. 뒤치다꺼리 한다고 업무가 야금야금 늘어나기는 했으나 지칠 즈음이면 포상 휴가가 나와서 괜찮았다.
어쨌든 위리에게도 생존 본능 정도는 있어서, 다른 선임들 앞에서는 입 꾹 다물고 있다가 둘이서 보초 서러 나갔을 때 제일 말이 많아지고는 했다. 소총 끌어안고 어둠 속을 노려보는 동안 위리는 시키지 않아도 자기 얘기를 털어놨다. 요한은 적당히 대꾸해주거나 듣고 무시했는데 종종 구미가 당기면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누나 있냐?"
"한 명 있어요!"
"예뻐?"
"저랑 닮았습니다!"
"에라이."
요한이 혀를 차자 위리가 눈이 동그래져서는 누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엄청 착해요! 나이차가 크거든요. 첫째라서 어릴 때부터 밥도 챙겨주고 숙제도 같이 해줬어요."
위리가 병실에서 깨어났을 때도 그의 곁에는 누나 태미가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은 사례는 아니었고, 병원에서 내어주는 아침밥을 먹고 다시 잠들었다가 느긋하게 눈을 떴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식당 일로 바빠서 올 수 없었다. 둘째 민형은 늘 행방이 묘연했다. 그는 집안에 부담도 보탬도 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는 공평한 아이였다. 일찍이 철이 들어 부모의 편에 선 장녀 태미와 막무가내에 철부지인 막내 위리 사이에서 민형만이 중도를 지켰다.
민형은 문자를 보내도 전화를 걸어도 내킬 때만 확인했다. 중학생 때부터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오거나 새벽같이 나가고는 했는데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은 전혀 눈치를 못 챘다. 태미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어슴푸레하게 동이 틀 즈음 현관의 센서등이 켜지고 꺼지는 것을 관측할 수 있는 사람도 위리뿐이었다.
어리광을 되는 대로 부리며 자란 어수룩한 막내가 제대로 입원과 퇴원 수속 과정을 밟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태미가 동생을 돌보러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목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태미는 기숙사를 나와 인천행 지하철에 올라탔다.
평일 낮이라서 그런지 찻간은 한산했다. 딱히 목적지가 없어 보이는 허리 굽은 노인들이 이따금 자리를 채우고 또 비웠다. 전철은 지상과 지하를 오가며 남하했다.
병원은 본가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이었다. 중학교 담임 선생님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반장으로서 방문했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당시 무척 크고 낯설어 무섭기까지 했던 공간이 다 자라고 나서 돌아가 보니 평범한 건물, 예컨대 은행이나 관공서 내부와 그다지 다를 바 없게 느껴졌다.
때마침 위리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주치의가 다녀갔다. 여기저기를 눌러보고 통증 정도를 묻더니 깁스는 2주 뒤 풀고 당장 내일 퇴원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태미는 의사의 말을 수첩에 꼼꼼히 적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떠나고, 태미가 매몰차게 입을 열었다.
"너 언제까지 이럴 거니?"
"뭘?"
누나가 깎아둔 사과를 태연하게 집어 먹던 위리가 대답했다. 위리의 질문에는 언제나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 점이 듣는 이를 번번이 한숨 짓게 만들었다.
남매는 다섯 살 차이가 났다. 태미는 위리의 손을 잡고 주판 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아파트 사이의 빈 공터를, 굴다리 아래를 누비던 십 년 전의 여름을 떠올렸다. 땀이 밴 손바닥, 흙먼지가 흩날리던 하천 주변의 산책로, 샌들 사이로 발가락을 꿈지럭대며 자꾸만 신발 밑창을 질질 끌던 막내동생. 몇 번이고 똑바로 걸으라고 단단히 일렀지만 끝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번 산책에 나서면 끊임없이 조잘거리고 눈에 띄는 모든 걸 만져대는 위리 때문에 태미는 자주 좌절감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시내의 영화관에 간다는데 그녀는 돌봐줄 어른이 없다는 이유로 가뜩이나 말도 듣지 않는 동생과 단둘이 처박힌 신세였다.
아니나 다를까 위리는 얼마 안 가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앉아 버텼다. 태미는 결국 흙투성이가 된 동생을 업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힘껏 걸었지만 집에 가까워질수록 등 위의 동생은 점점 무거워졌다. 이마에서 뚝뚝 흐른 물방울이 눈을 따갑게 찔렀다. 위리는 태미에게 매달려서도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았다.
"누나, 누나!"
어깨 너머에서 위리가 버둥거렸다.
"또 왜?"
태미가 한껏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줄게."
불쑥 내민 손에 쥐여 있는 것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아까 위리가 길가에서 꺾은 강아지풀이었다.
남매 중에서 민형에게만 허락되었던 태권도 수업이 끝나면 셋은 상가의 비디오 대여점으로 가서 부모님이 퇴근할 때까지 만화를 읽었다. 태미는 여자애답게 순정 만화를 읽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한글을 읽을 줄 모르던 위리는 허영만의 <식객>에서 음식 그림이 나오는 페이지만 찾아 넘겼다. 민형은 그 시절에도 만화보다는 영화에 더 관심이 있어서 비디오 기계가 있는 가게에 딸린 방으로 어느샌가 사라지고는 했다.
<궁>은 무사히 완결이 났을까? <오디션>과 <풀하우스>는? 순정만화 속의 반짝반짝하고 허풍스러운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 나이가 된 지도 한참이 지났다. 이제 태미는 신촌과 종로가, 압구정과 이태원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그렇게 번듯하고 멋지기만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흑백의 선과 면, 부록의 수채화로 꾸려진 가상의 거리가 아닌 진짜 서울에는 수많은 삶이 있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살아내는 삶. 그리고 그녀의 동생은 누구보다도 그 현실에서 유리되어 있었다.
"배달 오토바이 타다 그랬다며. 용돈이 부족해? 나쁜 애들이랑 어울리니? 부모님은 아셔?"
위리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침묵 속에서 태미는 답을 읽어냈다.
"돈은 어디서 나서 면허를 땄어?"
"세뱃돈 모았어."
뿌듯하게 대답하는 동생을 보며, 이왕 종합병원에 온 김에 이 녀석의 머리를 반으로 갈라 검사해 보면 참 좋겠다고 태미는 생각했다.
부모님은 위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싶어 했다. 성격이 약간 제멋대로에 집중력이 약할 뿐, 그들에게 위리는 언제까지나 착하고 애교 많은 아들이었다. 연애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들이 으레 그렇듯 서인호와 허이도는 결혼 25년 차에도 기복 없이 사이가 좋았고, 아이들에게도 불평할 수 없는 부모였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위리가 이곳에서, 이마와 목과 팔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을 리가 없었다.
태미는 손을 뻗어 위리의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붕대 아래 상처를 건드렸는지 위리가 조금 움찔거렸지만 누나의 손길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부모님도 그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사랑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명한 사람들이니까. 그들도 위리가 없는 5년을 경험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위리야."
"응."
"제발 똑바로 좀 살아."
한 달 뒤 어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창 수업 중이던 태미는 과외 학생 어머니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양해를 구하고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어머니는 대뜸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그래요, 엄마?"
태미가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이도가 입을 열었다.
위리가 학교를 그만뒀다고. 다니나 마나 한 똥통 공업계 고등학교였지만 어쨌든 자퇴서를 내고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는다고 했다. 무척 당혹스러웠으나 태미는 우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머니를 달랬다. 위리는 한 가지에 꽂히면 주변은 돌아보지 않고 돌진하는 성격이지만 쉽게 질리고 또 잊어버리니까 그 시기 역시 금세 지나갈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위리의 방문은 반년이 지나도록 열릴 줄을 몰랐다. 새해가 밝고 이제는 저 문의 경첩을 뜯어버리겠다는 아버지를 어머니가 한사코 말렸다. 춘절에도 위리는 밤 사이 문 앞에 놓인 명절 음식을 챙기러 나온 게 다였다. 건너건너 위리의 고교 동창들이 찍어 올린 졸업식 사진이 태미의 페이스북 피드에 떴다. 그 해 그들 가족 몫의 꽃다발은 없었다.
어느 밤에 태미가 위리의 방 문틀에 기대어 서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위리야, 누나야. 잠깐 얘기 좀 해."
방 너머는 고요했다. 자그맣게 게임 캐릭터가 통통 뛰는 효과음이 들려 왔지만, 위리는 말이 없었다. 태미는 문틈에 대고 필사적으로 동생을 회유했다. 나오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 대화만이라도 하자.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는데, 욕실에서 머리를 감고 나온 민형이 그녀를 지나쳐 제 방으로 가며 심드렁하게 충고했다.
"소용 없어."
"왜?"
"안에 없거든."
열어보라는 듯 민형이 턱짓을 했다. 잡고 돌리자 손잡이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돌아갔다. 컴퓨터 화면이 켜져 있었고 방바닥에는 빈 과자 봉투와 휴지 조각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고 있을 거면 군대나 가라고 했어."
"……."
"그러니까 진짜 가겠다던데. 입영 신청하는 거 도와주고 왔어.”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는 민형을 태미가 붙잡았다.
"기다려. 넌 어쩜 늘 그렇게 제멋대로니? 위리가 군대 같은 델 가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대체 무슨 생각이야?"
"넌 걔를 전혀 몰라. 아니, 들어봐." 태미가 반박하려 입을 열었지만 민형이 기회를 주지 않고 막았다. "위리를 네 마음대로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난 그냥 그 애한테 잘해주고 싶을 뿐이야."
태미가 좌절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알아." 민형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위리가 원하는 게 아니잖아."
머리를 바투 깎고 각 잡힌 군복을 입은 동생은 제법 군인 태가 났다. 목소리가 씩씩했고 얼굴도 반질반질했다. 오토바이 타다 넘어져 오른쪽 관자놀이부터 정수리까지 아스팔트에 갈렸을 때나 밤새 게임만 하느라 눈 밑이 퀭하던 시절과는 낯빛이 달랐다. 소대원들 사이에서 폐급으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정보는 다행히 외부인인 태미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누나, 울어? 왜?"
맞고 지내는 것 같지도 않고.
"울지 마. 나 잘 지내! 감옥 들어간 것도 아니고 평생 있을 것도 아닌데 왜 그래."
위리가 너스레를 떨었다. 남의 기분 살피며 맞춰주는 말 같은 건 할 줄도 모르던 애가.
"저번 주에 성당 가서 초코파이도 먹었고 다음 달에는 걸그룹 위문 공연도 올 거래! 그리고 맞선임이 되게 잘해줘."
태미는 화장이 번질까 봐 눈을 비비지도 못하고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을 떨어뜨렸다. 갑작스러운 서러움의 이유가 꼭 전방에서 고생 중인 동생이 안타까워서만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할 수 있는 거였으면서.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거였으면서.
위리는 거기까지 관측하지는 못한 것 같았다. 드물게 펑펑 우는 누나 앞에서 허둥지둥 휴지를 뜯어와 막무가내로 얼굴에 문댈 뿐이었다. 바보 멍청이. 태미는 훌쩍거리며 생각했다. 잘 지내서 다행이라고.
"서태미예요."
"모요한… 입니다."
"네. 위리 군대 맞선임이셨다면서요."
요한의 첫 감상은 위리의 누나라는 사람이 그녀의 동생과 별로 닮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위리는 군대에서 요구하는 길이로 짧게 깎아 자고 일어나면 인정사정 없이 뻗치는 곱슬머리에다 뺨은 주근깨 투성이, 예의범절이라고는 모르는 듯한 도발적인 표정이 기본값이었다면 그의 누나는 차분한 긴 생머리에 창백하고 얌전한 인상이었다. 키는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인기가 아예 없을 법한 유형은 아니었다. 요한은 내심 배신감을 느꼈다. 관심 끄라고 돌려 말한 건가? 걔 주제에? 그럴 깜냥이 되는 애였어?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조리 있는 말투를 들으니 서위리가 자기 누나는 본인과는 다르게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닌다는 얘길 했던 기억이 났다. 요한보다도 나이가 많으니 이미 졸업한 지 오래겠지만. 그런데 졸업하고 한참 뒤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물을 만큼 넉살이 좋지도 않아서, 요한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더 까다로운 손님도 자주 응대해 본 태미는 곤란한 기색도 없이 말을 이었다.
"위리는 지금 집일 거예요. 불러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요한은 꾸벅 인사하고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원탁이 지그재그로 놓여 있는 홀은 텅 비어 있었고, 한쪽 구석의 주방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원체 성정이 무던한 요한도 불청객이 되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태미는 별다른 안내 없이 카운터 뒤의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요한은 홀로 남겨져 봉황 무늬 자수가 들어간 흰 테이블보로 덮인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전역 후 요한은 내리갈굼이나 그 아래의 후임들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특히 바로 밑의 문제아는 더더욱. 전역모 받으면서 시간 나면 한 번쯤 보러 오겠다고 분위기에 휩쓸린 소리도 지껄였던 것 같은데 말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딱히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래 군대에서의 삶은 사회에 복귀할 땐 두고 오는 것이고 군대물 같은 건 빨리 빠지면 빠질수록 좋은 법이니까. 무엇보다 바빴고, 강원도는 너무 멀고, 최고참쯤 됐으면 휴가도 제법 자주 나왔을 텐데 말출까지 먼저 연락 한 번 없는 게 조금 괘씸하기도 했다.
"모요한 병장님이 여긴 웬일이에요?"
그랬으면서 거진 일 년 만에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저랬다.
"너… 너… 대학 안 다닌다며."
"안 다니는데요? 친구 만나러 온 거예요."
강북의 어느 대학 캠퍼스 근처였다. 서울 토박이인 요한은 근방의 토익 학원에서 스터디를 했다. 집에서 그리 가까운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 성격에 나서서 외부 모임에 끼어들 의사는 없었고 불알 친구의 추천을 받아 반쯤 강제로 들어간 그룹이었다.
종강 후 첫 금요일 저녁 일곱 시. 스터디원들 모두 일 초라도 빨리 책 덮고 밤거리로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표정이었다. 스물일곱 살, 고득점이 제일 간절한 스터디장이 못 본 척 지문을 분석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모임이 파하자마자 가방에 필기구를 쓸어담고 애인이니 동기들이니 전화를 돌리며 헐레벌떡 스터디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도 계획도 달리 없는 요한은 뒤쳐져 터덜터덜 학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여느 대학가가 그렇듯이 촘촘한 상가와 지저분한 거리는 번잡하고 시끄러웠다. 곳곳에 고인 웅덩이에 노래방이며 술집의 오색으로 번쩍이는 간판의 빛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섞여 고여 있었다. 요한이 더럽고 가파른 공용 계단을 따라 내려와 보도에 발을 디딜 때, 비좁은 출입구로 들어오며 그와 어깨를 부딪친 날렵한 인영이 있었다.
아주 잠깐을 기다리는 것도 못해서 섣불리 움직이다 기어이 일을 치고 마는 버릇을, 그런 천성을 가진 인간을 요한은 알고 있었다.
돌아보자 거짓말처럼 위리가 어깻죽지를 문지르며 서 있었다.
"나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냐."
"핸드폰 바꿨는데 번호를 까먹었어요!"
그다운 이유라 별로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지금이라도 번호를 알려줄까, 군 생활이 딱히 좋은 추억도 아닌데 그냥 헤어질까 고민을 하는 짧은 사이에 위리는 이미 다른 생각을 떠올린 것 같았다.
"모요한 병장님 게임 좀 하십니까?"
"무슨 게임?"
"아무거나요. 저 히키코모리일 때 안 해 본 게임이 없어요! 넥슨 홈페이지 들어가면 맨 위에 게임 목록 열 줄씩 뜨는 거, 매일 하나씩 클릭해서 다 해봤거든요. 근데 카트라이더만 한 게 없더라고요."
"친구 만난다며."
위리가 어깨를 으쓱였다.
"바람 맞았어요."
고등학교 중퇴 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인데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급한 일이 있으니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 어 내가 중국어 교양을 듣는데 발표 수업이 있거든. 짧은 스킷 짜서 시연하는 거. 그런데 하필 전날 김포인지 김해인지 어디에 할머니 제사가 있어서 못 나갈 것 같으니까 대신 좀 해줄 수 있겠냐는 얘기였다. 대형 강의라 교수님은 얼굴도 몰라. 조원이랑은 얘기 맞춰뒀으니까 대충 내 이름 대고 들어가서 해주라. 위리 너야 원래 중국어는 하니까 일도 아닐 테고 끝나면 밥 한 번 거하게 사겠다고 졸라서 나갔던 게 2주 전. 그리고 미루고 미뤄 오늘은 꼭 얼굴 보자고 불러낸 자리까지도 별 핑계를 대가며 상대방 쪽에서 먼저 취소했다.
아무리 봐도 호구 잡힌 게 맞았다. 이런 녀석도 쓸모가 있어서 호구를 잡힌다니 신기하다고 요한은 생각했다. 등쳐먹는 입장으로서는 아무래도 맘 편하긴 할 테다. 높은 확률로 본인이 엿 먹었단 사실을 인지하지도 못할 뿐더러 알아차려도 별 생각 없이 넘어갈 테니까.
그래도 그게 왠지 마음 쓰여서 요한은 위리를 따라 대학가 지하의 PC방에 자리를 잡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스타크래프트의 왕국이 저물고 너도 나도 롤을 하던 시기였다. 두 사람은 컴퓨터를 켜고 3, 2, 1, 숫자에 맞춰 색상이 바뀌는 신호등을 노려보았다.
사회에 있을 때 웬만한 게임은 다 건드려봤다는 얘기도 마냥 허풍은 아니었는지, 위리의 카트는 오색으로 반짝거리는 데다 웬 날개와 풍선까지 달려 있었다. 반면 요한은 중학생 때 쓰던 아이디를 겨우 찾아 구색만 맞춘 게 전부였다. 사방에서 종강한 대학생들이 미친 듯이 총을 갈기고 욕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가운데 앉아 군필 둘이서 유치한 멜로디에 맞춰 물풍선을 쏘고 있자니 여간 민망한 꼴이 아니었다.
그 짓을 두세 시간쯤 했다. 중간에 출출해서 짜파게티 한 그릇씩 시켜 먹고 담배도 한 대 태우고 들어왔다. 길 건너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유행가가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황금 같은 금요일에 이게 무슨 꼴이지. 이대로 그냥 튈까. 가방이야 내일 돌아와서 찾아가면 되는 거고. 그런데 요한은 꽁초를 던져 끄고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그냥, 한 판도 못 이기고 가기는 아쉬웠다.
문제는 위리가 만만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새로 나왔다는 맵도 줄줄이 꿰고 있고 아이템전이든 스피드전이든 틈을 한 번 안 내줬다.
"너 운전 잘하겠다. 운전병 하지 그랬냐?"
요한이 궁시렁거리자 위리가 깔깔 웃었다.
"저 오토바이 몰다 사고 냈었잖아요!"
가만 보면 위리는 거짓말을 좀처럼 안 했다. 그래서 대하기 쉽다가도 또 한없이 어려워졌다.
다시 침묵. 카운트 다운과 출발을 알리는 경적 소리. 병장님 콜라 남았으면 저 마셔도 됩니까? 어 그래.
"근데요, 모요한 병장님."
"어."
일병에서 상병, 상병에서 병장으로는 잘만 바꿔 불렀으면서 요한이 전역한 지 일 년이 넘어가는 지금까지 여태 변환 안 된 호칭을 어떻게 고쳐줘야 할지 고민이었다. 말출 다녀와서도 왠지 징그럽단 이유로 말 놓지 못하게 했던 게 탈이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멀끔한 표정으로 위리가 선언했다.
"이제 저 안 챙겨주셔도 돼요."
"…어?"
"포상 휴가 받으려고 잘해준 거 아니에요? 여기 군대도 아니고 이제 맞후임도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옆 자리를 돌아보느라 회전할 타이밍을 놓친 요한의 캐릭터가 가드레일에 머리를 박았다. 그 사이에도 위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양 손가락을 민첩하게 움직였다. 쉬프트 키 누르고 드리프트. 다리 건너자마자 아이템 먹고 컨트롤. 부스터를 뽑은 위리는 기어이 1등으로 결승선을 넘었다.
"저 막차 타야 해서 이제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위리가 주섬주섬 화면을 끄고 일어나더니 어깨에 멘 메신저 백 끈을 붙잡고 꾸벅 인사했다. 그리고 깜빡 잊을 뻔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구겨진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엄마가 고맙다고 인천 들를 일 있으면 식사하러 오래요!"
붙잡을 새도 없이 위리가 돌아섰다. 짜장면 한 그릇 먹자고 인천에 들를 일이 있겠냐고. 선임 다니는 대학도 모르냐고 완전 반대 방향이라고 핀잔하려 했는데.
요한의 캐릭터가 동그란 머리통 위에 <LOSE>를 띄우고 자괴하는 동안 옆 레인에서 위리의 캐릭터는 트로피를 들고 팔짝팔짝 뛰었다. 홀로 남겨진 요한은 우측 하단의 메신저 창을 열어 친구 추가 버튼을 눌렀다. <'말랑이94' 님을 친구로 추가하시겠습니까?>
예.
그 뒤로 생각이 날 때마다 한 번씩 게임에 들어가서 메신저 창을 켜봤다. 동시 접속 중이면 닉네임 옆에 파란 불이 켜지는데 초등학교 때 얼굴도 기억 안 나는 동창들이 추가해 둔 계정이 한두 번 깜빡였을 뿐 위리는 그 뒤로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말마따나 금세 질려 버리고는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 버린 걸지도 몰랐다.
할 만큼 했다. 이대로 잊어버려도 아무도 요한을 나무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일 년간 옆구리에 잠재적 관심사병 끼고 지내면서 사고 안 내게 관리하느라 고생했다고 표창장을 주면 모를까. 그래도 어쩐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게 양심인지 빌어먹을 전우애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가슴이 답답했다.
포상 휴가 받으려고 잘해준 거 아니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해명해야 할 것 같았다.
알고 있었으면 너도 좀 잘하지 그랬냐고 따지고도 싶었다.
그래서 인천에 온 거였다. 짜장 짬뽕 유산슬 그런 걸 얻어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탁보 덮인 널찍한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은 지 이십 분 만에 입구에 달린 풍경이 딸랑 울렸다. 위리였다. 누나에게 미리 언질을 받아 그리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우리 가게는 배달 안 해요."
그가 대뜸 해명했다. 요한은 불만스럽게 눈썹을 뒤틀었다.
"배달하다가 어깨 나갔다는 건?"
"그건 진짜예요! 다른 가게였지만. 저쪽 사거리에서 구르는 거 그때 CCTV에도 찍혀서 뉴스에 엄청 크게 났어요. 가 볼래요?"
"됐어 인마."
"모요한 병장님 화나셨습니까?"
위리가 흘끔거리며 물었다.
"저 부모님 가게에서 배달한다고는 안 했어요. 부모님이 중국집 하시고, 중국집에서 알바 해본 적 있다고만 했지."
솔직히 요한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속았다는 기분이 들 이유가 없었다. 위리와 지내면서 그런 걸 이유로 일일이 목청 높이고 손을 올렸으면 이미 영창을 두 번 가고도 남았다.
"됐고, 핸드폰 줘 봐."
위리가 순순히 전화기를 내밀었다. 언뜻 본 배경화면에는 온갖 어플이 알림 배지와 함께 난잡하게 늘어져 있었다. 요한은 자판을 꾹꾹 눌러 제 번호를 입력하고는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형이라고 불러."
그러자 위리가 한쪽 입꼬리만 비틀어 올리면서, 송곳니를 슬쩍 내 보이며 씩 웃었다. 어라, 저 표정, 언제 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해 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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