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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casa de muñecas
1.
“나 왔어.”
“오늘 일은 어땠어?”
“정신없이 바빴지. 그래도 오늘은 아무도 안 죽었어. 뭔가 타는 것 같은데?”
“잘 익어 가고 있는 거야.”
때마침 오븐 타이머가 울리고, 목소리는 다시 부엌 안쪽으로 멀어졌다. 알레한드라는 집 열쇠를 거실 탁자에 내려놓고 귀고리와 팔찌를 차례로 풀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화장대에는 장신구 보관함이 아침에 출근할 때 꺼내둔 위치 그대로 놓여 있었다. 외투를 옷걸이에 걸고, 가방을 선반에 올려두고, 스타킹을 벗고 머리를 풀면 비로소 퇴근했다는 실감이 났고, 잔뜩 경직되었던 몸의 긴장도 풀렸다.
거실로 나가자 고소하고 짭조름한 냄새가 풍겨 왔다. 예민하지 않은 미각으로 고향의 맛을 완벽히 재현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므로, 요리는 인접한 국가의 퀴진을 공략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오늘의 메뉴는 버섯과 양파가 들어간 크림 리소토였다. 정통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식사에서는 프랜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의 맛이 났다. 하지만 갓 익힌 쌀과 양송이는 따끈따끈하고 부드러웠고, 그것만으로도 진실되게 감사할 수 있었다.
“구직 활동은 잘 되어 가?”
“불경기라서 그런지 쉽지 않네.”
“너무 조급해 하지 마.”
물론 그들은 닷컴 버블이나 리먼 브라더스 사태가 삶의 기반을 뒤흔든 세계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다만 넵투누스의 가호가 사라진 뒤 서로 적대하고 반목하는 세상에 적응해 나갈 뿐이었다.
핌리코의 더블룸 아파트는 인근 대형 마트와 농부들이 직접 생산물을 가지고 나와 파는 시장 모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애스턴 마틴과 메르세데스 벤츠가 달리는 도로는 반듯했고 거리마다 잘 가꿔진 가로수가 보도에 응달을 드리웠다. 금융 회사나 다국적 기업에 재직하는 젊은 부부가 다수 거주하는 구역이었다. 월세는 아슬아슬하게 홀로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두 세계의 동맹 이후로, 환율이 폭등한 화폐는 오히려 갈레온이 아니라 파운드였다. 인류의 절대다수는 거의 강박적인 수준으로 숨겨져 왔던 세계에 무관심했다. 알레한드라는 늘 그 유난스러움이, 저들만이 유별하고 중대한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외부인으로부터 감추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마법사들의 선민의식이 꼴불견이라고 여겨 왔기에, 그린고츠의 환전소에서 같은 무게의 금으로 등치되는 지폐의 두께가 나날이 줄어들어도 별 위기감 없이 순응했다.
식탁 한구석에는 오늘 자 조간신문이 반듯하게 접혀 놓여 있었다. 요 며칠간 언론의 헤드라인은 노동당 출신 전 총리의 비자금 소재지로 도배되었다. 이어지는 기사 내용은 온통 제3의 길이 어떻게 대처리즘의 후과를 수습하는 데 실패했는지를 다루었다. 이민자도 아닌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뜻 일자리를 내줄 인심은 당분간 이곳 런던에서 찾아보기 힘들 성싶었다.
다시 지팡이를 드는, 확연히 간편한 방법을 권할 수도 있었다. 살짝 잡아서 끌어당기기만 해도 이분되지 않은 세계의 불분명한 선을 건너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레한드라는 묻지 않았고 그 역시 그녀가 매일 같이 출퇴근하기 위해 현관을 나서지 않고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체했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짓거리를 모아 개수대에 갖다 놓으며 알레한드라가 가볍게 제안했다.
“소파를 새로 바꿀까 봐.”
“왜? 지금 것도 멀쩡한데.”
“넌 겨자색을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
“레하, 소파는 앉으라고 있는 거지. 보통의 남자들은 거기서 대단한 심미성을 기대하진 않아.”
“그래도 네 마음에 들면 좋겠어.”
금방이라도 왜냐고 물을 것처럼 에두아르도가 돌아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변명도 나오지 않았다.
2.
문틈이 벌어지는 것과 동시에 맹수처럼 잠복해 있던 불청객이 베개를 날려 보냈다. 방의 주인은 얼굴을 정통으로 겨냥한 발사체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그리핀도르의 주전 추격꾼께서 드디어 행차하셨네.”
“알레호.” 시야가 가로막힌 채로도 방을 무단 점거한 이가 사촌임을 알아차린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에두아르도가 베개를 원래의 자리를 향해 도로 던졌다. 개인실의 비좁은 면적에 맞지 않게 난폭한 위력이었다. 가파른 궤도의 끝에서, 미드필더의 날카로운 패스를 받아 득점을 시도하는 포워드처럼 알레한드로가 그것을 민첩하게 받아 안고는 느물거리며 다리를 뻗었다. 알레한드로는 어릴 적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컸고, 성장의 폭은 나이가 들어서도 줄어들지 않아 여전히 사지가 에두아르도보다 기름했다. 어깨 아래에 베개를 깔아 받치고 모로 기대 누운 그는 하인이 가져올 벨로네와 석류를 담은 주석 쟁반을 기다리는 고대 로마의 데카당트처럼 거만했다.
“연습이 좀 길어졌어.”
“새 주장이 또 히스테리야?”
말총머리를 조여 묶은 두 학년 위 선배는 유독 꼬장꼬장하고 엄격했다. 뻣뻣한 막대 같은 성미일수록 손쉽게 꺾인다는 법칙을 알레한드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가 상념에 잠겨 입가를 매만지자, 에두아르도가 유니폼을 벗어 옷걸이에 걸면서 부정했다.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촌을 곁눈질하며 그가 벽에 빗자루를 기대 세웠다. 그 사이 알레한드로는 나름의 판단을 내린 듯했고, 에두아르도에게는 그 영역에 개입할 권한이 없었다. 그럴 때는 혈육이라는 증표마저도 무용했다.
“씻으러 가냐?”
“어.”
“그 전에 빗자루 타자.”
오후 수업이 끝나자마자 줄곧 비상과 하강을 반복하다 몇 번은 잔디밭에 구르며 피로로 녹진해진 채였으나, 권유를 듣자 금세 활력이 돌았다.
교내 스포츠팀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어른들을 졸라 변변한 님부스를 장만한 에두아르도와 달리 알레한드로에게는 여태껏 개인 빗자루가 없었다. 사촌은 스포츠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역시 데르비 세비야노가 기른 안달루시아의 소년이었고 곧잘 공을 쫓아 달리고는 했으나, 필드 내에 적용되는 복잡한 룰과 매너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규칙에 순응하고 협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건 오로지 그로부터 취할 이득이 존재하는 선까지만이었다. “안 해. 우습잖아.” 입단 테스트를 신청하지 않을 거냐는 질문에 언젠가 그가 대답했었다.
그러나 다음날 바로 어디선가 괜찮은 기종의 탈것을 마련해 와 밤하늘에 동행할 의사를 묻는 이도 그였다. 빗자루의 출처는 미상이었고 고정적이지도 않았지만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구할 손속이 알레한드로에게는 있었다.
에두아르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갈아입을 옷 대신 빗자루를 챙겨 들자 알레한드로가 씩 웃으며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 삐걱거리는 철제 프레임 아래에 에두아르도의 님부스와 같은 모델이 숨겨져 있었다. 새것이라기에는 이미 사용감이 심했고, 막대 끝에 금빛 잉크로 누군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교내에 빗자루를 소유하고 있는 학생은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에두아르도는 금세 알파벳을 조합해 특정인의 얼굴과 연결할 수 있었다.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들 사이에 어떤 거래가 이루어졌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브리튼섬 북부의 고지대에는 밤이 이르게 찾아왔다. 해가 저물면 낮 동안 가려졌던 서슬 퍼런 청백색 빛이 백야처럼 사위를 밝혔는데, 태양과 불온한 위성의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지기 전의 찰나에는 만물의 윤곽이 잠시간 흐려졌다.
두 사람은 그림자극의 배경처럼 검게 뭉개진 산림을 스치고 교정을 넓게 한 바퀴 돌았다. 에두아르도는 습관적으로 고도를 높이고 쏜살같이 나아갔는데, 그에 반해 알레한드로는 지형지물 가까이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기를 즐겼다. 한동안은 평행 상태를 유지하던 그가 예고 없이 방향을 틀어 호수 위로 전진했다. 에두아르도는 사촌의 경로 이탈을 뒤늦게 인지했고, 그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속력을 키웠다.
먼저 호수에 도달한 알레한드로는 태평하게 손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치고 허리를 젖혀 빗자루에 몸을 누인 채로 그를 기다렸다. 멀리서 에두아르도가 탄환처럼 돌진해 왔다.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위아래로 이 미터 남짓한 간격이 있었다. 점처럼 작았던 인영이 선명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알레한드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그리고 두 소년의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에, 빗자루를 딛고 뛰어올랐다.
발밑에서 검푸른 수면이 요동쳤다. 사냥의 기회를 포착한 이름 모를 생물이 먹잇감을 놓치고 신경질적으로 지느러미를 휘저었다. 에두아르도는 그의 님부스를 한 팔로 껴안아 매달리듯 지탱하고는 알레한드로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정교한 설계였든 천운이었든, 타이밍을 절묘하게 맞춘 것까지는 좋았으나 덜 여문 몸은 형제의 무게를 버틸 만큼 강인하지 못했다.
“놓치겠어!”
“괜찮아, 카이덴.”
매달린 소년은 손바닥이 죽 미끄러지는데도 빙글거리는 미소만 태평히 띠었다. 이윽고 하체로 반동을 주더니 남은 팔로 기어이 자루를 움켜쥐었다. 매끄럽게 상반신을 뒤집어 올라타기까지의 동작은 곡예보다는 격정적인 바일레와 근사했다.
은신하거나 여유를 만끽하기에는 가늘고 위태롭고 불편한 나무 자루 위에 그들은 마주 보고 앉았다. 알레한드로가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 에두아르도 역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코틀랜드의 산중에서 몸을 그 리듬으로 다룰 수 있는 이는 둘뿐이었다.
다른 누군가는 필요치 않았다.
3.
“널 너무 자주 만나고 있어.”
자량은 이번에도 정확히 알레한드라가 이 만남으로부터 느끼고 있던 감상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읊었다. 그 탓에 알레한드라는 가장 공손해야 할 순간에도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그의 말대로였다. 그들은 너무 자주 만나고 있고, 양측 누구에게도 달갑지 않은 조우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순전히 자량의 호의에 기대는 형국이었기에, 알레한드라는 번번이 성질을 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 아냐.”
펑퍼짐한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자량이 부연했다.
“알아. 조심하고 있어. 말했잖아.”
“그걸 어떻게 믿지?”
“믿을 필요 없어.”
알레한드라는 그에게 병원의 근태 기록을 복사해 보여 줄 수도 있었다. 혹은 약의 용량과 그것을 소진하기까지의 기간을 계산하여 결백을 호소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예 해명을 거부하기를 택했다. 자량이 거절한다면, 그녀를 포기한다면, 그렇다면 그렇게 끝낼 셈이었다.
그러나 자량은 한숨을 내쉬고는 뒷덜미를 문지르더니 결국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냈다. 특징 없는 병은 얼핏 비어 있는 듯 보였다. 코카인에 불순물이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바이어처럼 그녀는 병을 받아 흔들었다. 투명한 액체는 곧 반짝이는 금빛으로 물들었다가, 움직임이 잠잠해지면 다시 본래의 무색무취한 상태로 돌아갔다.
자량은 여전히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무언가를 염려하는 듯했다. 때로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금전이든 무엇이든 돌려받는다면, 그래서 이 선의의 행동이 정말로 정식 거래가 되어 버린다면, 공급자인 그에게도 일종의 채무가 발생하리라고 믿는 것 같았다.
“캄란에게 안부 전해 줘.”
“…네가 직접 연락해.”
자리가 불편해 못 견디겠다는 투로, 적절한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자량은 불시에 떠났다.
그리고 삶은 이어진다. 파고들어 진정으로 이해해야 했던 결단의 대상도 더는 곁에 존재하지 않기에, 무명의 수면제는 정직하게 잠을 재촉하는 용도로만 소비되었다. 의료진 틈바구니에서 흡연은 양해할 만한 취미였고 마법의 힘을 빌리면 과음한 다음 날에도 아무런 여파 없이 멀쩡히 출근할 수 있었지만, 밤과 어둠과 숱한 상념을 견디지 않아도 되게끔 하는 약효는 어떤 중독보다도 유혹적이었다.
꿈은 다채로웠고 절반 이상은 의식 세계로 건너오며 바스러졌다. 번번이 눈물을 흘리면서 깼기에, 얼마 이후에는 구태여 문질러 닦는 수고도 들이지 않게 되었다.
환자들은 참을성 있게 처방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통증을 호소하고 간호인들에게 발길질을 했다. 치유사들은 신경질적으로 증상을 확인하고 진단을 내리고 또 그 사이사이에 그들 역시 비명을 질렀다. 세뇌에 걸린 동안에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하고 확고하게 자리 잡혀 있던 질서가 완전한 혼돈으로 대체되었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갔다. 삶의 주체성을 회복했다. 이제 이 나날이 그들의 정상이었다.
그런데 알레한드라는 저주의 객체이지 못했다. 상실된 의지가 주는 평온함을 누리지 못했다. 그녀는 망가진 채로, 그 모든 일들을 맨정신으로 감내했고 모든 것이 ‘원상으로 복구’된 뒤에도 그 위력이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지치고 외롭고 혼자였다.
그녀가 끔찍이도 두려워하던 현실이었다.
얼굴들 las caras
1.
과달키비르를 끼고 소년들은 달린다. 종려와 오렌지 나무가 수호성인처럼 그들을 굽어보는 아담한 도시에는 두려울 구석이 없었다. 새까매진 발꿈치에 벗겨질 듯 아슬아슬하게 걸린 샌들이 타일 바닥을 박찼다. 세비야는 중세의 유적을 간직하고도 산업화의 물결을 탔다. 구교의 신앙은 이성과 합리에 대한 맹신으로 치환되고, 유람선을 실어 나르는 청록색 강에서는 희미하게 중유의 냄새가 났다.
딱지 앉은 무릎이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를 입고 곱슬머리를 늘어뜨린 사촌들은 데칼코마니의 양면으로, 거울상으로, 정오의 짙은 그림자와 그 주인처럼 떨어지지 않는 한 쌍으로 보였다.
먼저 숨을 헐떡이며 멈춰 선 쪽은 에두아르도였다.
“알레호, 잠깐만 기다려.”
“하지만 곧 시작된단 말이야.”
스페인 광장에서 그들 고모가 즐겨 보는 연속극 배우가 광고를 촬영할 예정이라는 소식은 세비야 시내의 모든 교육기관을 휩쓸었다. 상급생들로부터 시작된 소문은 학년을 타고 내려가 엉성한 텔레노벨라보다는 미국산 만화영화를 틀어 달라고 졸라야 할 나이대의 아이들까지 덩달아 열광하게끔 했고, 그 주 수요일쯤부터는 광장에 토요일 몇 시쯤 도착해야 관람에 가장 유리한 지대를 차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토론으로 온 학교가 들끓었다.
배우의 서명을 받아 엘레나에게 선물하자는 건 알레한드라의 발상이었다.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로 쫓기듯 짐을 챙겨 세비야로 돌아온 게 불과 지난달의 일이었다. 마리아 호세파의 집은 언제나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그곳이 영구한 은신처가 될 수는 없었다. 교회는 이혼을 허하지 않았고, 마리아 호세파는 폰티악을 몰고 마르케도나로 장을 보러 나가면서도 근대의 새로운 교리는 선택적으로 거부했다. 엘레나는 환영받았지만 성년이 된 외아들은 데 라 코사에 편입되지 못했다. 알레한드라와 에두아르도는 그의 이름이 미겔이라는 것과, 안경을 쓴 샌님이었다는 것 정도는 떠올려 냈고 그게 전부였다. 그는 외부인이었다. 하지만 엘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페드로와 카를로스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언성을 높일 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둘을 중재했고,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모친을 대신해 팔로마 알리시아를 욕실로 데려갔다. 그녀는 가족의 일원이었다. 헌신은 보답받아 마땅했다. 알레한드라는 그 명제를 일찌감치, 에두아르도보다도 한발 빠르게 터득했다.
에두아르도는 늘 날래고 유연한 아이였지만, 민첩성만으로는 근래 들어 부쩍 길쭉해진 알레한드라의 보폭을 따라잡기에 역부족이었다. 알레한드라는 둘의 신장 차가 한 뼘을 넘어가면서부터 그 사실을 시도 때도 없이 고의로나 무의식적으로 강조하고는 했는데, 치사하게도 꼭 이런 순간에만 완전히 잊어버린 듯 굴었다.
한 번 더 조르고 나서야 멈추고 돌아선 알레한드라가 과시적으로 팔을 들어 올리면, 그들은 비로소 분리된 개체로 존재했다. 그의 손목에는 지난 주현절에 선물로 받은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뻔뻔스레 웃는 벅스 버니의 큼직한 앞니 아래로 당근 모양의 분침이 빙글 돌아 들어갔다. <루니 툰>의 등장인물들이 그려진 푸른 시곗줄은 그들 사촌에게 동등하게 수여되었다. 자아 정체감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들을 두고 어른들은 제법 안이하고 편리한 길을 택했는데, 덕분에 탄생 연도뿐만 아니라 월일까지도 근사한 동갑내기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도 한두 해는 명절마다 동일한 선물을 받았다.
에두아르도의 손등 위가 비어 있는 건 그가 거추장스럽게 몸에 무언갈 더하는 걸 꺼리고 유행이나 멋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탓이었다. 그에게는 또래 소년들과 달라지고 싶다는 욕망이 부재했다. 반면 알레한드라는 벌써 군중 속에서 눈에 띄고 싶어 하는 낌새를 내비쳤고, 평소에는 군말 없이 손위 형제들로부터 물려받은 널널한 셔츠를 걸치다가도 가족 나들이에선 확고하게 사진으로 남기고픈 신발이나 모자의 색을 지정했다. 취향과 선호의 정립은 이미 은근하지만 꾸준하게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래도 에두아르도는 아날로그 시계의 길고 짧은 침이 가리키는 암호를 사촌보다 더 능숙하게 해독할 수 있었고, 알레한드라는 습관적으로 그에게 손목을 들이밀며 시간을 물었다. 아직은 스스로 시간을 읽는 법을 익히거나 그 부탁을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전이었고 냉전이 영속하리라 믿은 각국 원수들은 군비 경쟁에 박차를 가했으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오백 주년을 딱 이 년 앞둔 해였다. 이따금 건드리지도 않은 베개 속 솜이 터져 눈처럼 흩날려 혼나거나 계단에서 구르고도 다음 순간 멍 하나 들지 않고 착지하는 일들이 사촌들에게 일어나고는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어떤 징조로 읽지 않았다.
에두아르도는 호흡을 가다듬고 신발 끈을 조였다. 그 앞에서 알레한드라는 조금은 지루해하는 얼굴로, 그러나 어린아이치고는 훌륭하게 인내하며 그를 기다렸다. 허리를 세우자 알레한드라가 손을 내밀었다. 바지춤에 손바닥의 땀을 닦고 맞잡았다. 그리고 누구랄 것 없이 앞서고 또 뒤지며 서로를 잡아 이끌었다.
2.
카를로스 데 라 코사는 언제나 ‘거기에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든지 대화 중에 카를로스가 언급되거나 그를 설명해야 할 때면 그가 장미가 그려진 식탁 의자에, 현관 앞 계단에, 거실 소파에 착석한 모습을 묘사했다. 다리에 장애가 있어 기립 상태로는 곧잘 피로해졌기 때문에 생긴 버릇인데, 그 부상은 이십 대 중반을 넘겨서 입은 것이기에 어딘가에 무기력하게 걸터앉은 카를로스는 특정한 나이 이후로만 상상되어야 마땅했다. 이 조건은 그즈음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그의 막내 조카들에게는 의식할 여지조차 없이 당연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아 왔고 유소년 축구부의 연습 경기에 꼬박꼬박 참관하러 와 응원석 한 구역을 전부 차지했으며 여름마다 함께 시립 수영장으로 헤엄을 치러 다녔던 이들이 그를 정적인 아이로 회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카를로스가 기억을 정정하면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사과하고는 한동안 주의를 기울였다. 어릴 적 그가 얼마나 활달한 소년이었으며 날쌔게 몸을 놀리는 데 있어서는 그들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탁월했는지를 즐겁게 나누었다. 하지만 과장된 배려는 곧 사려 깊은 정도를 넘어 그의 눈치를 살펴 가며 말을 고르는 일로 변질되었고, 스무 살 언저리에 그가 얼마나 활기차고 전도유망한 청년이었는지를 다루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정정하기를 관두었을 때, 카를로스는 음주를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내쳐지지 않았다.
가족의 범주란 섬세한 장력으로 유지되었다. 물리적인 틀이 존재하지 않기에, 성원들이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경계하며 꾸준히 가꾸어야 했다. 어떤 이들은 그 안에서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또 누군가는 억지로 몸을 구겨 지정된 위치에 자신을 맞추었다. 카를로스는 양측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자각이 생긴 어린 시절 무렵부터 천치 동생을 지켜봐 왔다. 그의 역할은 언제까지나 밖으로 나가 뛰어놀고 열을 발산하고 돌아오는 것이지, 돌봄이 그의 몫이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실내에 머무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알리시아와 나란히 놓이게 되었다. 오래 걷거나 뛰지 못하고 이따금 가혹한 통증에 시달릴 뿐, 카를로스는 여전히 카를로스인데도 집안 사내들과 영원히 동등해질 수 없었다.
한량의 지위를 받아들인 뒤에는 어머니의 집을 나왔다. 모아둔 자산은 푼돈에 불과했고 여행을 떠날 엄두는 나지 않았다. 결국 친구들과 친지들의 거처를 순회하다 가장 오래 묵은 곳은 장남 페드로의 집이 되었다.
아이들이 어른들을 평가하는 것처럼, 어른들도 아이들을 판단한다. 낯은 가리지 않지만 카를로스에게 크게 관심이 없고 기본적으로 되바라진 작은형의 둘째 딸 알레한드라와 달리, 같은 해에 태어난 에두아르도는 난데없이 방의 절반을 앗아간 삼촌의 등장에도 호의적이었다. 그 아이는 물총새처럼 말이 많았다. 새끼 사슴 같은 팔다리로 종일 펄쩍펄쩍 뛰어다니다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기 직전까지 재잘거리느라 입을 벌리고 잠들기 일쑤였다.
때때로 에두아르도의 부모가 저녁 약속이나 부부 동반 모임을 위해 집을 비우면, 그 애의 안전은 카를로스의 책임이 되었다. 보호자의 대리인 지위를 떠맡았지만 사실 카를로스는 스스로가 진짜 어른이라고 체감한 적이 없었다. 좋은 짝을 만나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고, 집과 차를 사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삶에서는 너무나도 멀어져 버려서,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는 중에는 도무지 원래의 궤도로 복귀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에두아르도는 달랐다. 그 아이는 아직 너무나도 어렸고,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었으며, 불안을 알지 못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건강하고 유연한 소년이었다.
“에두아르도, 넌 분명 좋은 군인이 될 거다.”
좋은 군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경력은 길지 않았지만, 카를로스는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자격이 불충분한 삼촌의 예언을 듣고도 에두아르도는 빈정거리거나 의심하는 대신 매번 환호성을 지르며 눈동자를 빛냈다.
그러면 미지근한 만족감이 가슴께를 채웠다.
견진성사를 마치고, 다시금 공항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데 라 코사의 자녀는 한 명뿐이었다.
촉박한 일정 중에 조카가 그를 찾아왔다기에 당연히 에두아르도를 예상했던 카를로스는 조카딸을 마주하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짐작했던 반응이었는지 알레한드라는 멋쩍게 미소 지으며 그를 끌어안았다.
“치키타, 네가 웬일이냐?”
“삼촌한테 드릴 게 있어서요. 다리는 좀 어떠세요?”
“늘 똑같지. 나아질 때도 있고, 나빠질 때도 있고….”
의식하는 순간 신체는 순식간에 부자유스러워졌다. 인상을 찡그리는 카를로스를 보고 알레한드라가 서둘러 가방에서 약병을 꺼냈다.
눈썹 한쪽을 올리며 의구심을 표하자 그녀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병을 채운 알약은 실험적인 제조법을 따랐는데, 증상을 고치지는 못하지만 통증만큼은 확실하게 완화해 준다는 것이다. 중독성이 없으니 걱정하지 않고 복용해도 되고, 신약 유통 허가를 받기 전까지는 그녀가 얼마든지 따로 공급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생신을 잘 못 챙겨 드렸잖아요.” 그녀가 불편한 얼굴로 의중을 밝혔다. 지나간 생일 선물은 아무래도 좋았고, 부작용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지만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을 건네받았다.
“카이덴에게는…” 알레한드라가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카이덴한테는 얘기하지 마세요, 삼촌.”
“왜, 위험하기라도 한 거냐?”
“아니에요!” 조카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카이덴은 그렇다고 생각할 거예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희 싸웠니?”
그러자 그녀가 힘없이 웃었다. “왜 다들 그게 중요하다는 듯이 묻는지 모르겠어요.”
성숙한 어른답게 갈등을 봉합하려고 시도하는 대신 카를로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알레한드라의 말에 동의했다. 조카를 떠나보내고는 그녀가 내민 약을 개봉해 한 알 삼켰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카를로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비타민 정을 내밀고는 플라시보 효과라도 노렸나 싶었다. 그러나 세워 둔 차를 가지러 너른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 그의 오른 다리는 왼 다리에 전혀 뒤처지지 않고 완벽히 훈련받은 보병처럼 스텝을 따랐다. 그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진통제를 더 요청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 조카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의 무심한 구습이 어떻게 그 아이들을 속박했는지 한 번쯤은 의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통증은, 조작된 현실에서 오직 그것만이 진실인데, 그조차도 잊히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3.
<디아리오 데 세비야>
2000년 12월 12일 화요일
후안 카를로스 1세가 테러 유가족을 기리는 성명을 발표하다
부고
마리아 호세파 리베라 라스 카사스
1924. 11. 5. - 2000. 12. 11.
마리아 호세파 리베라 라스 카사스가 2000년 12월 11일 일흔여섯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마리아 호세파는 지난 1979년에 36년간 함께한 남편 라몬 데 라 코사 반데라스 대장과 사별하고 홀로 다섯 자녀를 훌륭히 길러냈다. 라몬은 정년에 퇴역할 때까지 에스파냐를 수호하는 해군 장군이었으며, 마리아 호세파는 가정과 지역 사회를 수호하는 역할에 충실했다. 그녀는 그라나다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에 남편을 따라 세비야로 이주하였으며, 영면할 때까지 일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녀는 가족을 마음 깊이 사랑했고, 이웃을 돌보았으며 자선과 나눔을 실천하는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다.
마리아 호세파의 다섯 자녀, 페드로(올리비아), 엘레나, 에밀리아노(이사벨라), 카를로스, 그리고 알리시아와 그녀의 여섯 명의 손주, 알렉시스, 다리오, 에두아르도, 미겔, 카밀라, 알레한드라, 그녀의 시누이 다니아 데 라 코사와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증손주들의 가슴 속에 고인은 영원토록 살아갈 것이다.
유족은 그녀를 깊이 그리워하고 슬퍼하지만 그녀가 하나님의 품에서 남편 라몬과, 먼저 떠나간 가족들과 재회하여 평안하기를 기원한다.
장례 미사는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3시에 산타 마리나 성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니초가 끝난 뒤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고인의 집에 모여 그녀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곳은 이제 계량화를 거쳐 가치를 따지고 후손들에게 분배될 유산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장녀 엘레나와 차녀 알리시아가 거주하는 삶의 공간이기도 했다. 에두아르도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로는 카를로스도 큰형의 집을 나와 본가로 돌아갔다.
작별은 전부터 예비되었기에 세비야를 떠나지 않은 이들은 모두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눈물은 그쳤다가도 수시로 다시 흘렀지만 누군가 한 명은 꼭 옆에서 대기하다가 손수건을 건네거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꽃다발을 채운 화병이 모퉁이마다 놓였고 부엌은 상차림 준비로 분주해졌다. 입맞춤과 포옹이 곳곳에 흩뿌려졌다.
가족들은 자꾸만 현관을 돌아보았다. 미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친지들이 뒤늦게나마 속속들이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의 마리아 호세파는 영영 얼굴을 비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다시 모두가 떠나고 가족들만이 남겨졌다. 그들은 거실에 둘러앉아 손과 어깨를 포갰다. 엘레나가 협탁에서 성경을 꺼내 펼쳤다.
“카이덴, 묵주 좀 가져다주겠니? 고모 방 화장대에 있을 거란다.”
“네, 고모.”
무릎을 꿇고 소파의 팔걸이에 기대어 팔로마의 손길을 받던 에두아르도는 일어나 익숙한 복도를 가로질렀다.
카를로스나 팔로마가 아닌 큰고모의 방은 처음이었기에 어둠 속에서 구조가 눈에 익지 않았다. 그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켰고, 맞은편에 놓여 있는 고목으로 빚은 경대를 발견했다. 큼직한 거울에는 어느새 청년으로 자라 문틀 꼭대기에 정수리가 닿는 그 자신이 비쳤고, 그리고,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있었다.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삼류 스타의 흑백 포스터였다. 유성 잉크로 쓰인 이름이 광대뼈 위를 가로질렀다. 사진도 서명도 세월에 바랬지만, 엘레나는 관성으로 혹은 성심과 사랑으로 그것을 여전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은 것 같아 에두아르도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고, 또 모두가 거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en algún otro lugar
다시 어두운 방. 그들을 감싼 고요는 박엽지처럼 연약하다.
가장 내밀한 소망을 밝히는 건 왜 이루어 주기를 기대하지 않는 상대에게만 쉬울까?
애초에 사람을 정복할 영토로 보아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에두아르도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위협은 사라진다. 세계는 적정한 수준으로 평화롭고 또 위태롭다. 군대는 소멸하지 않고 열강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병력 규모를 키운다. 돌아오라는 초대는, 그리하여 그를 위태롭게 만들어도 된다는 허락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그녀는 여전히 순간이동의 귀재다. 영혼은 늘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을 방랑했다.
그러나 영영 정박하지 못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면. 어머니들의 어머니의 역사를 그녀는 반복할 수 없다면.
불능은 차라리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절한 팔을 뻗어 맞닿은 얼굴을 감싼다.
집은 집이다. 늘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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