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Familia

1997

 

 

 

봄, 산타 마리나 성당

 

"요즘 예수가 스큅이었다고 주장하는 세력이 성행하는 거 알아?"

"예수가 백인이었다고 주장하는 무리도 있는데, 뭐."

에두아르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갈레온 하나를 공중으로 튕겼다가 낚아챘다. 금화에 양각으로 새겨진 이름 모를 마법사의 얼굴이 봄날의 볕을 받아 반짝였다.

"내 말은, 학사 일정이 이렇게 짜인 게 이상하다는 거야. 자기들 종교도 아니면서."

에두아르도는 그제야 나란히 걷고 있던 사촌을 돌아보았다. 알레한드라의 지적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한편으로 호그와트의 비마법사 태생 재학생 비율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이므로 현상이 제도를 따라잡은 지금에 와서 딴지를 걸 명분은 부족했다. 그가 보기에 진짜 문제는 그녀가 요즘 들어 부쩍 래번클로의 모범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역시, 에두아르도에게도 개입할 근거는 충분치 않았다. 그는 한 번 더 동전을 튕겼다 받아서 주머니에 넣으며 시선을 다시 앞으로 옮겼다.

"그래도 집에 돌아갈 수 있으니 잘된 거 아냐?"

부활절 주간이 다가오자 호그와트 역시 짧은 방학을 맞았다. 시험을 앞둔 대부분의 상급생들은 학교에 남아 부족한 공부량을 채우기를 택했지만, 두 사촌은 아침 식사가 끝나자마자 조막만 한 꼬마들 틈바구니에 끼어 기차역으로 향했다. 독실한 친조모 치하에서 부활절과 성탄절에 귀국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올해는 일정에 맞춰 돌아가는 게 특히나 중요했다. 청첩장이 그들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알렉시스는 그들 남매가 우러러보는 사내의 전형이었다. 아들들 중의 아들, 데 라 코사의 가장 우수한 장남. 아버지 페드로를 닮아 호쾌한 미남인 데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성격으로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내성적이고 예민한 카밀라마저도 알렉시스를 만나면 언제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식이 학기 중간으로 예정되었더라면, 알레한드라와 에두아르도는 불법 포트키를 청탁해서라도 식에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탈 행위 없이 정당하게, 떳떳한 마음으로 형제를 축하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혼인성사는 그들 가족에게 있어 가장 성스러운 행사였고, 그 어떠한 흠결도 존재해서는 안 됐다.

세비야 국제공항에는 이사벨라 히메네스가 마중을 나왔다. 카를로스의 행방을 묻자 그가 지금 바쁘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는데, 그럴 때 카를로스는 대개 그에게 맡겨진 가장 간단한 임무조차 잊어버리고 친구들을 만나러 갔거나 어딘가에 틀어박혀 잠으로 도피하는 중이었다. 에두아르도는 굳이 삼촌의 실책을 들춰내 그의 명예를 정도 이상으로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부쩍 커 버린 뒤 들인 버릇대로 숙모의 키에 맞추어 고개를 숙였다. 

"키가 더 자란 것 같구나."

"영국에서도 잘 먹었으니까요, 숙모."

이사벨라가 조카의 양 뺨에 입 맞추고는 두 걸음 물러섰다. 그녀는 지친 듯 조금 비틀거렸고,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라도 잘 지냈으니 망정이지."

"엄마, 무슨 일 있었어요?"

"할머니가 또 편찮으셔."

알레한드라가 반응하기 전에 에두아르도가 끼어들었다. "얼마나요?"

"다행히 심하지는 않아. 이제 마리아도 나이가 드신 거지. 지금은 회복 중이시란다."

하지만 어른들은 늘 상황을 과장하거나 축소해 전했다. 이틀 뒤 마리아 호세파는 휠체어를 타고 성당에 나타났다. 기력이 쇠해 의사의 권고를 따랐을 뿐이라고 일축했지만, 그 설명을 들은 누구도 낙관하지 않았다.

 

 

사촌들은 자리를 따로 배정받았다. 알레한드라는 어머니가 준비한, 스퀘어넥에 짧은 소매를 부풀린 사랑스러운 하늘색 원피스는 죽어도 입지 않겠다고 우기다 혼나는 바람에 오전에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그러나 식장에 도착하자 마음의 먹구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싹 개었다.

성당은 유년기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높은 천장, 벽 한쪽의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 아기 천사의 부조가 세워진 화강암 성수대와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달라진 건 후각적인 측면뿐이었다. 고건물에서 으레 풍기는 먼지 냄새, 고전 라틴어와 엄숙한 의례가 불러일으키는 죽음과 역사와 모든 옛것의 무겁고 퀴퀴한 냄새 대신 가볍고 발랄한 기운이 맴돌았다. 늘어선 장의자의 열마다 장식된 흰 꽃 덕분이었다.

멀끔하게 머리를 넘긴 알렉시스가 먼저 입장했다. 제단 앞에서 성서를 들고 기다리는 나이 지긋한 사제는 알렉시스와 다리오, 카밀라에게 견진성사를 치러준 이였다. 알레한드라와 에두아르도가 유학을 이유로 교회의 숱한 의례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조모는 몹시 탐탁지 않게 여겼고, 졸업 이후의 일정을 각종 종교의식으로 빽빽하게 채워 놓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일 년도 더 남은 미래의 일이었다.

알레한드라가 어릴 때, 백부댁에 놀러 가면 알렉시스가 늘 그녀를 상대해 주었다. 턴테이블로 팝송을 크게 틀어 놓고 되도 않는 에스파냐어로 가사를 바꾸어 불러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알레한드라가 그의 발등을 밟고 올라서게 한 다음 춤을 추거나, 팔을 붙잡고 유원지의 놀이기구처럼 빙글빙글 돌려 주었다. 그녀가 아직 천진한 아이였기 때문에, 동갑 사촌과의 이질감은 표가 나지 않는 아주 좁은 틈새에 불과했고 그래서 문제없이 강변과 놀이터에서 뛰놀다 치고받고 싸우고 또 내색하지 않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지만, 사실 그녀는 도착한 사촌의 집에 알렉시스가 기다리고 있기를 내심 기대했다.

남편이 된 알렉시스는 곧 아버지가 될 테다. 데 라 코사의 새로운 아이들 역시 알레한드라를 여러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티아 알레한드라, 티아 레하, 혹은 티아 쿠에르보cuervo. 마녀들은 늘 까마귀를 대동하므로.

두 청년이 사랑의 서약을 맺는 중, 어느 시점에 숙모와 숙부가 모두 눈시울을 붉히더니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두어 줄 뒤의 장의자에 앉아 참관하던 알레한드라에게도 보였다. 에두아르도가 웃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어머니에게 건넸다.

 

 

오늘이 그들의 첫 결혼식은 아니었다. 대가족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군가는 관혼상제의 한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억하는 한 나는 언제나 결혼식을 좋아했어."

알레한드라가 샴페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백했다.

'그러시겠지.' 에두아르도는 나이프로 좀처럼 썰리지 않는 스테이크의 힘줄을 짓이기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출장 뷔페에서 제공하는 음식은 전부 질기거나 차갑거나 짜거나 싱거웠고, 그런 식사가 데 라 코사 사람들의 입에 맞을 리 없는데도 아무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다들 이미 알코올에, 또는 행복감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결국 스테이크를 포기하고 빈 와인잔을 들었다. 병마개를 따기 전 직원이 수염이 다시 비죽비죽 자라기 시작한 턱과 어울리지 않게 또렷한 눈매를 보고는 의구심에 머뭇거렸지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밀라가 보호자 자격으로 음주를 허락했다.

"고마워, 누나."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마시겠니."

학교 주방에서 요리용 와인을 한두 병씩 가져와 비우고는 한다고 굳이 해명하지는 않았다. 우선 그녀는 그런 모험담을 동경할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난 나이였고, 호감을 사고 싶은 대상도 아니었으며, 카밀라와 에두아르도는 그다지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다. 때로 카밀라는 사촌 동생이 그녀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이 행동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에 존경스러우리만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일절 신경 쓰지 않아 에두아르도는 한동안 그녀가 보기보다 아둔하거나, 그 자신이 아주 뛰어난 연기자라고 착각했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진실을 알고도 개의치 않을 뿐이었고, 그건 에두아르도가 카밀라에 관해서 거의 유이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요소였다. 나머지 하나는, 물론 그녀 또한 데 라 코사의 일원이라는 점이었다.

카밀라가 담배를 가지러 일어나고, 에두아르도는 단숨에 잔의 절반을 비웠다. 그제야 알레한드라의 목소리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그녀는 줄곧 오늘 식장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신부의 얼굴을 가린 베일은 또 얼마나 섬세하고 정교하게 직조되었는지, 그녀 역시 그 베일을 결혼식에서 착용하고 싶은데 과연 가능할지 같은,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를 열심히 떠들어 대는 중이었다.

"좀 더 많은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팔로마 고모나, 카를로스 삼촌도……."

"넌 못 써." 에두아르도가 불쑥 말을 끊고 입을 열었다. 남은 삼촌과 고모가 결혼을 한다는 가정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혹은 그저 와인을 너무 급하게 마셨거나.

"무슨 소리야?"

"베일. 그건 데 라 코사에 내려오는 거니까. 넌 네 남편 집안의 것을 물려받겠지. 반지라든가, 드레스 말이야."

종 모양의 자카란다가 성글게 수 놓아진 흰 레이스 면사포는 올케에게서 동서로,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에게로 대를 이어 가계도 위의 거미줄처럼 상속되는 물건이었다. 새로운 부부가 탄생할 때마다 끄트머리에 남편과 아내의 이름이 수 놓였고, 내전에도 망가지거나 분실되지 않고 버텼다. 베일은 이를테면 가보와도 같은 지위를 가졌다. 페드로와 올리비아, 에밀리아노와 이사벨라의 이름도 그곳에 있었고, 가장 새롭게 추가된 알렉시스와 소피아의 이름은 직전까지 그것을 갖고 있던 당숙의 맏며느리가 직접 떠 주었다.

알레한드라가 눈가를 찡그리고 입을 오므렸다. 그녀의 얼굴에서 불만과 분노를 감지했지만 에두아르도는 평소대로 그것을 못 본 체했다. 알레한드라 역시 반발하는 대신 주제에서 약간 선회하여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긴, 다리오도 곧 결혼을 하겠네. 오빠한테도 오래 사귄 애인이 있으니까."

빌바오 출신인 큰형의 아내에 대해서는 카밀라를 통해 몇 번 언급을 들은 게 전부였지만, 다리오의 여자 친구는 알레한드라와 에두아르도 역시 잘 알았다. 그녀 또한 세비야 토박이였고, 다리오와는 오랜 기간 우정을 쌓은 소꿉친구였다. 그들은 서로의 인생에 거의 이십 년 가까이 존재해 왔다. 마음을 확인한 건 다리오가 사관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이었다. 다리오가 군인으로서 자리를 잡기만 하면 언제든 식을 올릴 수 있었다.

"어떻게 한평생을 본 사람과 사귀는지 몰라. 나라면 지루해서 못 견뎌."

에두아르도는 형들에 관해서는 간접적인 험담도 꺼렸지만, 여자 친구를 데리고 양가 부모님들과 함께 앉은 작은형의 뒷모습을 보자 무심코 그런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동의를 구하며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혼자만 형과 그 애인을 모욕한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았다. 알레한드라는 이미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명 분의 시선이 대치하는 야생 동물들처럼 얽혔다.

그녀는 입술을 비죽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두아르도는 어지럼을 느끼며 남은 와인을 마저 입에 털어 넣고 큰 소리로 웨이터를 불렀다.

 

 

파티가 지속되며 슬슬 레퍼토리가 고갈되어 가자, 웨딩 밴드가 곡을 신청받기 시작했다. 젊은 데 라 코사 대위는 조모를 위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모멘토스>를 요청했다. 그는 동생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였고, 다리오와 에두아르도는 알렉시스의 양 옆구리에 껴서 어린 시절처럼, 친척 어른들을 위해 재롱을 부리던 빛바랜 사진 속 한 장면을 기꺼이 재현해 냈다.

<늘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는 순간들로 삶은 이루어져 있죠, 그리고 그걸 잃으면, 마침내 깨닫고 나면, 그 시간은 결코 되찾을 수 없어요.> 형제의 노래 실력은 너무나 끔찍해서 개구리 떼의 합창처럼 들렸고,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뼉을 치거나 화음을 더했다. 카를로스는 구석에서 캠코더를 들고 가수들이 아닌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관객들의 얼굴을 무작위로 확대해 녹화했다. 연회장 밖에서 담배를 태우던 카밀라 역시 슬며시 출입구의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았고, 이사벨라는 에밀리아노의 품에 기대어 남편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그리고 갑자기 마리아 호세파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눈물을 보이는 건 수십 년 만의 일이라, 순간 그 누구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노래하는 목소리가 끊겼고, 그보다 한 박자 늦게 기타와 드럼의 반주도 멎었다.

마리아 호세파는 평소 그렇게 중요시하던 체면도 잊고 통곡했다. 이십 년도 더 전, 남편이 뇌졸중으로 순식간에 세상을 떠났을 때보다도 거칠고 사나운 울음이었다. 길고 고통스럽고 진이 빠지는 음성에 사람들은 당혹해 머뭇거렸다.

"아부엘라, 울지 마세요. 좋은 날이잖아요."

무대에서 뛰어내린 에두아르도가 조모의 어깨를 감싸고 위로했다. 마리아 호세파는 손수건으로 주름진 눈가를 찍어 누르며 말했다.

"알고 있다, 카이덴. 하지만 좋은 날은 끝나기 마련이잖니."

친척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딸들을 불렀다. 엘레나가 인파를 헤치고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고 나갔다.

"엄마, 왜 울어요?" 팔로마 알리시아가 마리아 호세파의 손을 잡고 피로연 자리에서 퇴장하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결혼식장인 줄도 모르는 천치이기에, 그녀만이 노인의 눈물에 진정으로 슬퍼할 수 있었다.

알레한드라는 조모가 떠나간 방향을 한참이나 응시하다, 끝내 뒤쫓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에두아르도는 형들을 등지고 서서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보았다.

 

 

 

 

 

여름, 브라이턴 비치 팰리스 피어

 

"챙겨 왔다며."

"아니, 진짜 있었거든."

"그래서 어쩔 건데?"

"뭐, 그냥 이대로 들어가도 되지 않나…."

짐짓 멍청하게 굴며 뒷머리를 긁는 에두아르도의 얼굴로 돌돌 말아 개킨 감색 수영복 바지가 날아들었다.

"너, 바지 몇 벌 가져왔는데?"

"지금 입고 있는 거랑 잠옷."

"그런데 그걸 입고 들어가겠다는 게 말이 돼?"

알레한드라는 이제 얕은 짜증을 넘어 화를 내는 투였다. 아까 던진 수영복을 낚아채지 말고 뺨으로 맞아 주었으면 이 정도로 성질을 내진 않았을까? 하지만 옷은 이미 에두아르도의 손에 들려 있었고, 그걸 다시 건네 던져 달라고 부탁하는 건 그의 기준에서도 어리석은 짓 같았다.

"고집부리지 말고 입어. 이미 늦었단 말이야."

보통 준비하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쪽은 알레한드라였지만, 그녀가 분주하게 옷을 고르고 화장을 손보는 동안 잔뜩 여유 부리다 마지막 순간에 수영복이 없다는 걸 깨달은 탓에 에두아르도는 종일 질타와 핀잔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가 자초한 일이었다.

실은, 고작 작은아버지의 수영복을 빌리는 일로 고집을 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알레한드라의 아버지 역시 데 라 코사의 남자이자 에스파냐의 해군이었고, 자라면서 숙부와 서먹한 정적 속에 남겨지는 순간이 생기는 것도 그가 한 사람의 사내로서 인정받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꺼렸던 건 빌린 물건의 물성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알레한드라의 그 얼굴, 그녀의 예상이 적중했고 스스로가 가족 구성원의 필요를 예측해 응할 줄 안다고 자부하며 짓는 우쭐한 표정, 그를 어리고 갸륵한 동생으로 여기는 눈빛을 거부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 고집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은 명확한 이유를 대지도 못하고 막무가내로 고개를 저으며 시간을 끌다 강압에 못 이겨 굴복하는 식이었다.

그들 사이에 이렇게 무의미한 알력이 부쩍 늘어 가면서, 알레한드라는 자주 지쳤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측면에서는 각개의 전투에서는 이기지 못해도, 총합의 전쟁으로 봤을 때 에두아르도에게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에두아르도만큼이나 알레한드라 역시 끈질기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쨌거나 표면적으로, 오늘 1차전의 승자는 알레한드라였다.

역사에서 그들은 가까스로 일행과 합류했다. 크게 이름을 외쳐 부르자 팔짱을 끼고 있다 고개만 모로 세워 드는 카릴리는 런던 같은 대도시에서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비뚜름한 여유를 면면에 띄운 친구와는 달리 펠리치타는 기차 한 대를 보내고 성질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순발력 있게 건네진 적당히 비굴한 사과에 금세 수긍하고 표정을 풀었다. 아직 표를 예매하지 않아 금전적인 손해가 없던 게 다행이었다. 알레한드라는 에두아르도가 혼자 사과하도록 내버려두었지만, 지각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꼽아 제시하지도 않았고 도착하면 탄산음료를 사겠다고 약속했다.

기차에서 내려 해변에 다다랐을 때, 잠시간의 곤혹스러운 침묵이 있었다. 브라이턴 비치는 사장이 아니라 자갈이 깔린 우둘투둘한 해변이었다. 피서객들은 개의치 않고 그 위에 몸을 누이고 육지를 지나 푸른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이베리아에서 온 사촌들은 신호하지 않고도 시선을 교환했다.

파라솔은 네 사람에게 넉넉한 그늘을 제공하기에는 협소했다. 그들은 교대로 짐을 지키고 바다에 나갈 순서를 정했다. 청년들은 약간의 불편은 젊음으로 무마했다. 자갈이 구르는 단단한 바닥을 딛고도 공놀이를 강행했다. 펠리치타와 에두아르도가 넉살 좋게 참전하는 동안 카릴라는 아이스박스를 맨 판매원에게로 가 콜라를 사 왔고, 알레한드라는 그녀가 미리 대금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따가운 첫 모금을 목으로 넘긴 뒤에야 깨달았다. 접영 교습으로 펠리치타에게 대신 대가를 치를 수도 있었지만 그것마저 망쳐 버렸다.

점심때가 지나자 바다는 시리얼을 부은 볼처럼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소년 그리고 소녀들은 머리의 물기를 짜내고 수영복 위에 겉옷을 걸쳤다. 해변에는 잔교가 여러 개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었고 저마다 엇비슷한 노점과 놀이 기구로 꾸며져 있었다.

가장 가까운 유원지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대한 찻잔과 플라스틱 산탄총으로 맞춰 넘어뜨리는 나무 오리 과녁, 간이 회전목마 따위가 어린이 손님들을 기다렸다. 펠리치타와 알레한드라는 돈두르마를, 에두아르도는 카릴라의 손길이 서슴없이 약탈해 가는 연분홍색 솜사탕을 하나씩 들고 점포를 구경했다. 교각에는 파도가 쉬지 않고 밀려와 부서졌고, 공기는 미끈하고 축축했다.

카니발에서 으레 들려오기 마련인 친숙한 칼립소 음악이 가로등에 달린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그 선율은 대책 없는 낙천성을 띠었고, 일몰까지는 여전히 예닐곱 시간도 더 남은 이 여름을 현실로부터 유리되도록 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회전목마 따위를 타는 건 제값을 못 할뿐더러 성숙하지도 못한 행동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하등 무의미한 자존심을 걸고 과녁 맞추기 내기를 시작했다.

카릴라와 에두아르도가 입꼬리를 올려 가며 배짱을 부리다 결국은 5파운드 지폐를 한 장씩 꺼내 테이블에 턱 내려놓았다. 펠리치타는 부스를 지키는 남성을 아저씨라고 칭하며 흥정을 시도했고, 결국 구슬 총알 한 상자를 더 얻어 냈다. 전화를 걸어 런던행 티켓을 예매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의 미지근한 반응과는 달리 에두아르도는 즐거워 보이고, 그에 반비례하여 알레한드라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나는 산레모에 대해 묻지도 않았는데.' 반사적으로 생각하는 순간에 이름이 불려 그녀는 화들짝 놀다.

"알레하, 한번 해 볼래?"

사격 부스 앞에 모여서 전략 회의에 몰두하던 세 사람이 일제히 돌아보았다. 알레한드라는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상념에 잠겨 있느라 누가 그녀를 놀이에 참여시키려 했는지도 알지 못했다.

펠리치타가 예의 바르게 한 번 더 권하거나, 카릴라가 자세 잡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하기 전에 에두아르도가 선수를 쳤다. "그래, 그럼."

 

 

 

 

 

가을, 호그와트

 

횃대로 밝힌 복도는 유독 인적이 드물어 을씨년스럽다.

추방형을 받은 자는 간수도 없이 홀로 남겨진다.

비밀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곳에 어울리는 음악은 없다. 높은 천장을 타고 적막만이 흐른다.

 

 

 

 

 

그리고 지금, 겨울, 대연회장.

 

사라사테의 무곡도, 보위의 글램록도 아닌 내숭을 떠는 신사 숙녀들의 사교를 위한 어중간한 폴로네즈가 흐른다. 그곳에는 격정도 파토스도 없다. 숨 가쁜 라틴 댄스였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응어리진 무언가를 토정하기라도 했을 텐데, 안무는 다만 미온적이고 그들은 회전 목마에 올라탄 얼간이들처럼 공전과 자전을 무량히 반복한다. 악곡이 끝날 즈음에는 모두가 파트너를 되찾는다.

 

 

 

 

 

*

알렉시스: 에두아르도의 큰형.

다리오: 에두아르도의 작은형.

카밀라: 알레한드라의 언니.

소피아: 알렉시스의 아내.

페드로와 올리비아: 에두아르도의 부모.

에밀리아노와 이사벨라: 알레한드라의 부모.

엘레나: 에두아르도와 알레한드라의 큰고모.

카를로스: 에두아르도와 알레한드라의 막내삼촌.

팔로마: 에두아르도와 알레한드라의 막내고모. 본명 알리시아.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하여 비둘기를 뜻하는 팔로마로 불린다.

마리아 호세파: 사촌들의 친조모. 데 라 코사 집안의 총 책임자.

 

 

(24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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