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IA MUNDO (240608)
half a world
아홉 살 생일에, 알레한드라는 새 책가방을 선물로 받았다. 상급 학교에서 한창 유행하는 브랜드였는데, 초등학생이 들기에는 조숙한 디자인이었지만 언니의 도움으로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다. 뒤뜰에는 알록달록한 팔찌를 만들 수 있는 공작용 테이블과 옆 동네 아이들의 방해 없이 종일 뛰어놀아도 괜찮은 에어바운스가 설치되었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면 으레 벌어지곤 하는 드라마도 그날은 낌새가 없었다. 모두가 그녀의 정수리를 쓰다듬고 축복의 말을 속삭이고 그녀가 입은 원피스가 얼마나 깜찍한지 말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주말이 지나 학교에 가자 다들 그녀의 가방을 탐냈고, 알레한드라는 잠시간 몹시 행복했다. 그리고 몇 주 뒤에 카이덴의 생일이 있었다. 이번에는 온 가족이 카이덴네 집 거실에 모였다. 포장지를 뜯기도 전에 조부모가 건넨 길쭉한 꾸러미가 새 스케이트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 카이덴은 잔뜩 신나 소리를 질렀다. 엄격한 큰아버지도 오늘만큼은 카이덴이 먼저 식탁에서 물러나도록 허락했다. 그는 생일을 축하하러 찾아온 몇 명의 사내애들을 끌고 나섰다.
“같이 가.”
“안 돼.”
“왜?”
카이덴이 루카스와 시선을 교환했다.
“강가로 갈 거란 말이야.”
어머니와는 멀리 가지 않고 집 근처의 공터에서 연습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강변 둔치로 내려가는 길고 널따란 계단을 타고 싶었다. 편평한 땅에서 바퀴를 굴리는 건 이미 익숙하고 지루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른들은 겁이 너무 많았다. 그럴 때면 카이덴은 늘 편법을 택했다. 허락을 구하지 않으면 금지당할 일도 없었다.
알레한드라를 데려가지 않는 건 그녀가 고자질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카이덴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카이덴은 강가로 간다고 목적지만을 말했다.
하지만 알레한드라는 그녀가 그의 여자 사촌이기 때문에 거절당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방을 빠져나가고, 집은 여전히 왁자지껄했지만 그건 다른 종류의 소란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만이 이해하는 주파수가 있기에 알레한드라는 그곳이 무척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의자를 밀어 일어나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었다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닫을 때까지 누구도 쫓아오지 않았다.
강가에 카이덴은 혼자 있었다.
그는 계단 난간을 타고 위태롭게 하강하는 무모한 묘기를 시도하지도 않았고, 강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쭉 뻗은 산책로를 달리지도 않았다. 대신 제자리에서 보드의 끄트머리를 밟아 뒤집는 기술에 제대로 성공할 때까지 연마 중이었는데, 알레한드라는 그 동작을 무어라 부르는지 몰랐다.
“카이덴.”
“알레호!”
발동작에 주의를 기울이던 카이덴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가 그녀를 거부하고 집에 내버려둔 일은 이미 잊어버렸다.
“다른 애들은 다 어디 갔어?”
“오는 길에 체코가 손가락을 부러뜨려서, 걘 병원에 갔고 나머지는 튀었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생일의 특권을 누리는 중인 카이덴만 책임을 피할 수 있었던 듯싶었다. 알레한드라는 계단에 걸터앉아 카이덴이 보드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이제 나도 타게 해 줘.”
알레한드라가 말했다.
“싫어.”
카이덴이 대답했다.
“왜?”
카이덴의 얼굴에 처음 보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게 곤혹스러움인지, 성가셔하는 건지 도통 읽어낼 수 없었다. 알레한드라는 짜증이 나서 카이덴의 어깨를 밀쳤고 카이덴도 같은 방식으로 반격했다. 그땐 지금보다도 알레한드라의 키가 카이덴보다 훨씬 컸다.
싸움이 고조되려던 찰나,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찾으러 온 카이덴의 형들이 둘을 발견하고 떼어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알레한드라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그다음 날 숙모가 카이덴을 데려와 사과하게 했고, 알레한드라 역시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의 잘못을 시인했다. 그리고 카이덴은 알레한드라에게 그의 스케이트보드를 타게 해 주었다. 불과 한 달도 되기 전에 알레한드라의 생일 파티가 열렸던 그녀의 집 뒤뜰에서. 알레한드라는 카이덴의 도움을 받아 뒤뚱거리며 보드 위에서 균형을 잡았고, 기대했던 것만큼 재밌지 않아 실망한 채로 내려왔다.
카이덴과 숙모가 떠나고 그녀는 그녀의 생일날 카이덴이 뒤뜰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기억해 내려 애썼다. 도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알레한드라의 가방은 아직도 잘 맞았고, 유행이 한 차례 휩쓴 뒤에 오히려 인기가 더 치솟았지만, 그녀는 그 가방을 영국에 들고 오지 않았다.
함께 온 건 천이 닳아 반질반질해진 가방이나 그걸 멘 뒷모습만 보고도 그녀를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던 친구들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카이덴과 그녀뿐이었다.
그런데 때로 카이덴은 그 사실을 망각한 것처럼, 아니 그게 사실조차 아닌 것처럼 군다.
그녀의 세계는 때로 카이덴이 관측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반쪽짜리가 되는데도. ■
태양의 그림자 (240609)
verano '92
뜨겁게 달궈진 모래사장에 얼굴을 처박고 있다가 카이덴은 비척비척 일어섰다. 시로코 열풍의 영향으로 여름에도 건조한 세비야에서 땀은 흐르지 않고 스며 나온다. 하지만 말라가는 지중해에 인접한 도시였고,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눅눅한 해풍이 파도와 같은 방향으로부터 끝없이 불어왔다. 자외선 차단제가 녹아 끈적끈적해진 뺨에 모래 알갱이가 들러붙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손등으로 뺨을 무심하게 훔쳤다. 모래알은 말끔히 떨어지는 대신 까끌까끌하게 마찰을 일으키며 얼굴 가장자리로 미끄러졌다.
파라솔 아래에는 피부가 옅거나 짙은, 흑갈색 머리카락에 눈썹뼈가 도드라지는 에스파냐의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연달아 아이 다섯을 낳고 향유고래처럼 출렁이는 거대한 허벅지를 갖게 된 중년의 카탈루냐 여자. 이민 간 부모를 적도 반대편에 두고 이베리아로 돌아온 우루과이 사내. 빛이 바래지 않은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직 고통을 모르는 천진한 꼬마 애들. 그들은 모두 카이덴과 얼핏 닮은 윤곽을 가졌지만, 찬찬히 뜯어 보면 완벽한 타인이었다. 익숙한 언어가 들린다고 해서 돌아봐도 일행을 발견하리란 보장이 없었다. 카이덴은 그제야 에스파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일일이 관계를 읊자면 너무나도 복잡다단한 그의 가족들은 근처를 지나가던 아이스크림 장수의 아이스박스를 열고 어떤 맛을 먹을지 고르는 중이었다. 파피토! 저 멀리서 어머니가 그에게 손짓했다. 카이덴은 고개를 젓고는 물가로 발걸음을 돌렸다.
알레한드라는 학교에서 친구들을 제법 만들었다. 그녀는 분별없이 남국으로의 초대장을 뿌리고 다녔다. 바캉스 시즌을 맞아 속속들이 도착하는 손님들이 전부 장남 데 라 코사의 집으로 모이게 될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낙원에 거의 근접한 휴양지로의 초대를 거절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녀는 카이덴이 이미 카를로스 삼촌과 한방을 쓰는 것 또한 잘 알았다. 그들 사촌 남매가 고향을 떠난 동안, 비좁은 2인실로서 세력 다툼의 온상이었던 방의 주도권은 자리를 비우지 않은 자에게로 자연히 이양되었다. 카를로스 삼촌은 카이덴에게 축구를 가르쳤고 유랑 극단에서 묘기로 선보여도 될 만큼 뛰어난 트래핑의 권위자였지만 너무 게으르고 무심했다. 더부살이를 하는 주제에 조카의 물건을 함부로 다뤘고, 카이덴이 몹시 아끼는 축구화―그토록 원하던 아디다스 코파―를 어느 술집 내기에 가져다 걸었다가 본전도 찾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래도 카이덴은 부모에게 그 일을 일러바치지 않았다. 삼촌이 인대 파열로 의병 제대한 뒤 무척 상심해 엇나간다는 걸 이해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었다. 출생은 자의가 아니지만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는 건 선택의 문제였다. 카이덴은 의문하지 않기를 택했다.
그런데 알레한드라는 여름 내내 에스파냐어를 모르는 손님들의 곁에 붙어 종일 통역사 노릇을 했다. 이방인들에게 공간과 음식을 제공하고 불편함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상대가 수영을 할 줄 모르면 시립 수영장의 얕은 풀에 데리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카이덴이 모르는 지침서를 독점하기라도 한 양 주변을 돌봤고, 그럴 땐 조모와 똑 닮아 보였다.
애초에, 초대장을 작성하는 손은 두 쌍이어야 했다. 알레한드라는 카이덴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그녀는 멋대로 그들의 집, 아니 그의 집을 개방했다.
"네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초대한 줄은 몰랐어." 히스로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다 함께 놀아야 재밌는걸. 사람은 많을수록 좋아." 그녀가 대꾸했다. 카이덴은 어렵지 않게 행간을 읽어냈다. '어차피 너도 그걸 바랐잖아, 안 그래?' 하지만 알레한드라가 틀렸다. 그녀는 카이덴이 무엇을 바라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 자신조차 모르는 걸 알레한드라가 더듬어 찾아낼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방문객들은 오고 또 떠났다. 개중에는 안달루시아를 벗어난 데 라 코사의 탕아들도 있었다. 세비야 대학이 아닌 마드리드 콤플루텐세를 고른 알레한드라의 언니, 결혼으로 새로운 가족에 편입된 고모들, 몸이 약해 이탈리아로 요양을 떠났던 사촌. 하지만 의무를 저버린 사내는 없었다.
섬나라의 억양을 쓰는 소년들의 얼굴도 격주로 바뀌었다. 어른들은 그 애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고 자주 서로 혼동했지만 그건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집은 온통 '부인', '얘야', '아저씨', '거기 너'가 수류탄처럼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대명사들의 전장이 되었다. 고요할 틈을 내주지 않는 혼돈은 카이덴이 귀중히 여기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이 난장판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덴은 젖은 발자국을 남기며 흰 거품을 따라 걸었다.
아이들은 금세 수영을 배웠다. 짠물을 코로 들이마시지 않으면서 물개처럼 헤엄하는 법을 놀라우리만치 빠르게 터득했다.
그들은 해변 가장자리의 깎여 나간 퇴적암 주변에 모여 있었다. 카이덴의 사촌은 바위에 걸터앉아 무리를 진두지휘했다. 아이들은 수면 아래로 얼굴을 넣고 자유형의 기본 동작을 뽐내다 숨이 찰 때쯤 고개를 들었고 알레한드라는 즐거운 듯이 모자란 점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그중 한 명이 휴식을 연장할 핑계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 카이덴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했다. 그에게 손짓하는 외국인 소년들을 향해 카이덴은 속도를 높여 달려갔다.
"랄로, 얼굴이 엉망이야." 알레한드라가 그를 가까이 불러 젖은 엄지로 뺨을 문질렀다. 모래는 닦여 나갔지만 짭조름한 소금기가 남았다.
그들은 다 같이 서프보드를 빌렸고 몇 번이고 거꾸로 뒤집어져 가며 지중해의 수평선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이 가상의 선을 넘는 게 두려워 신의 힘을 빌리던 시대도 있었다. 이제 대륙과 대양을 건너는 건 고난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하지만 파도는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소년 소녀들을 자꾸만 뭍으로, 익숙한 곳으로 밀어 돌려보냈다. ■
SPANISH ROOM (240615)
El argumento de la habitación española
세 번의 긴 방학을 거치는 동안, 그들은 망설임 없이 헤어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재회했다. 세비야 집의 문지방이 수없이 들고 나는 방문객들의 뒤꿈치에 쓸려 반질반질해져도 그 호두나무 문틀의 질감을 캄란이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무도회장의 맞은편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청년들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한 번쯤은 춤을 청해도 좋겠지만, 악곡이 끝나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원래의 거리로 돌아갈 사이에 불과했다.
캄란이 집으로 여자애를 초대하지 않는 건, 그 애의 기호가 거짓이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생활상을 공유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비좁은 집과 손님맞이에는 턱없이 부족한 침실, 편의를 봐 줄 수 없는 집안 사정을 줄줄이 늘어놓지 않아도 알레한드라는 그걸 손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캄란에게 거절의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애초부터 놀러 오라는 제안을 입에 올리지도 않을 만큼은 세심했지만, 비행기표를 끊기 곤란한 상대를 위해 플루 가루의 사용처를 알아봐 줄 만큼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리본은 초대장의 편리한 대체품이었다.
명민한 소년은 좀처럼 심기를 거스르지도 않는다. 무모하게 헤집지 않은 데 대한 답례로 알레한드라는 캄란에게 고독의 연원을 헤아려 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대신 에스파냐어를 가르친다.
그들의 언어는 피상적이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단어를 교환한다.
서쪽의 7층 탑, 김 서린 유리창 안쪽에서 회화 시험은 시 낭송회처럼 치러진다.
"노래와 춤singing and dancing."
"노래와 춤el canto y el baile."
"나는 노래와 춤to sing and to dance을 좋아해요."
"나는 노래와 춤cantar y bailar을 좋아해요."
입력한 대로 곧잘 출력하는 캄란은 쓸 만한 중고 카세트 플레이어 같다. 가끔 테이프가 걸려 버벅거려도 뚜껑을 열어 꼬인 선을 풀어주면 다시금 매끄럽게 돌아간다. 누굴 가르칠 만큼 스스로 탐구해 본 바 없는 알레한드라의 역할은 자주 번역에 그치지만, 캄란은 답안지에 스스로 해설을 달 만큼 영리했다. ("그러니까 칸토canto는 노래함이라는 개념, 칸타르cantar는 행위 그 자체를 가리킨다는 거구나!")
밖에서 들여다보면 그들은 마치 서로를 몹시 잘 이해하는 듯 보인다.
알레한드라는 왈츠의 스텝을 모르지만 기꺼이 가면을 쓰고 고전적인 안무의 형식을 흉내 낸다. 캄란의 리드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고 그녀는 능숙한 파트너로 비추어질 것이다.
중요한 건 그뿐.
"대답해 줄게."
"난 딱 절반만큼의 데 라 코사야."
"내 어머니와 숙모들과 할머니도 모두 그렇지."
알레한드라 마리아 호세파 데 라 코사 히메네스가 차이타냐 캄란 카에게 부드럽게 미소한다.
같은 시각, 교정 건너편에서는 온실로 날아 들어간 도손청띠제비나비 한 마리가 네펜데스 벤트리코사의 포충망 가장자리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다시 무사히 비행을 재개했다. 그 날갯짓이 너무나 고요해 두 개체의 조우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푸른 섬광 (240620)
¿Eso es todo lo que hay?
지금으로부터 387년 전, 에스파냐 남단의 작은 바위산, 지브롤터를 둘러싼 해협에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탄이 발사되었다. 격렬한 해전은 불과 네 시간 만에 막을 내렸고 무적함대를 표방한 에스파냐의 해군 함선은 기습에 못 이겨 섬멸당했다. 항복이 선언된 뒤에도 일렁이는 붉은 화염은 꺼지지 않고 좁은 반도의 해변을 뒤덮었다.
321광년 너머에서, 남십자성의 알파성이 쏘아 보낸 청색 광선은 꾸준히 지구에 근접하고 있다. 82년 전 한 탐험가가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는 유언을 남기고 베이스캠프를 떠났을 때, 그의 눈동자를 마지막으로 비춘 광원은 그를 찾아온 동료들의 손전등이 아닌 천구에 박힌, 반짝이는 또렷한 점이었다.
지난주 토요일, 런던의 한 자산관리사 부부가 드물게 주말 출근을 마다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시내의 영화관에서 서로의 어깨에 오붓하게 기대어 새로이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를 관람했다. 영화의 마지막에 주인공은 폭우 속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처절히 포효하지만, 결말에 이르는 2시간 22분의 여정이 시작되기 전 그들 부부가 보고 있던 건 영사기가 뿜어내는 흰 빛과 거기 비친 부유하는 먼지 조각이었다.
1994년 11월의 어느 주말, 두 소년 소녀가 스산한 골목에 멈추어 서 있었다. 그들은 정처 없이 걷다 인파에 떠밀려 길을 잃고 추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코끝이 벌게질 만큼 어리숙했다. 해가 기울어 거리는 어둑해지고 드문드문 건물마다 내걸린 램프에 주홍색 불이 켜졌다. 늦가을의 싸늘한 바람이 한차례 대지의 모든 생물을 뒤흔드는데, 물리 법칙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각 유리 함 속 불꽃은 흔들림 없이 두 사람의 머리꼭지를 밝혔다. 교복 셔츠 소매 아래로 무신경하게 드러난 손목이 시체처럼 차가워 알레한드라는 덜컥 겁을 먹었다. 빽빽한 녹음 속에 철저히 숨겨진 하이랜드의 고성, 외부와 차단된 비밀스러운 기숙학교에서 맞이하는 벌써 네 번째 겨울인데도. 그녀는 날이 무더워지면 타는 듯한 열기를 피해 꿈속으로 피하는 관습을 가진 지방으로부터 왔다. 무디고 싱겁고 메마른 것은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곳이었다. 에드윈 위버는 세비야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였다. 그는 격정, 열망, 강렬하게 타오르는 것, 칸토와 바일레, 투지와 정복욕과 안달루시아가 숭배하고 상징하는 그 모든 것의 반대였다.
태어나기도 이전에 한 세대를 명명할 이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외곽을 돌고 돌아 시선을 피해 도달한 구석진 길목에서도 달을 가린 거대한 푸른 천체의 감시를 피할 수는 없었다. 한밤에도 완전한 암흑을 얻지 못하는 이상한 세계에서, 알레한드라는 마법을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 이곳을 집으로 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가 운명의 의미를 미처 제대로 알지도 못할 때의 결심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옳고 그른 방식 같은 건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당장 이 소년이 어리고 애틋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때때로 솔직해질 용기를 내는 것뿐이었다.
"근데 그냥… 네가 즐거웠으면 좋겠어."
이게 전부일지언정, 장막 뒤에 무언가 근사한 것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으로 연소하며 결국은 아무것도, 타고 남은 재조차도 남지 않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
¹ 지브롤터 해전 (1607)
² 로런스 오츠 (1880-1912)
³ <쇼생크 탈출> (1994)
⁴ Is That All There Is?, 페기 리 (1969)
새로운 에스파냐 (240624)
Nueva España
세계의 단절은 방학마다 반복되었다. 알레한드라는 기차에 올라타자마자 망토를 벗어 짐 가방에 개켜 넣었다. 매 학기의 시작과 끝에 입고 나타나는 옷이 동일했던 적은 없는데, 한 해가 멀다 하고 키가 쑥쑥 자라 이미 고향 여자애들의 평균을 웃돌게 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매번 다르게 차려입는 편이 훨씬 즐겁기 때문이었다. 환복 마법을 익히기 전까지는 번번이 사촌을 찻간 밖으로 쫓아내고 입구를 지키게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면서 학기 중과 방학의 구분을 철저히 했다.
반면 맞은편에 앉은 에두아르도는 아직도 흙으로 더럽혀진 교복 차림이었다. 종업식 직전 두 사람은 시선이 닿지 않는 교정 한구석의 비탈에서 뒤엉켜 굴렀다. '한 대 쳐 보지 그래?' 에두아르도의 눈빛은 그렇게 도발하는 듯했지만, 알레한드라는 결국 비틀어 쥔 멱살을 놓아 줄 수밖에 없었다. 지팡이가 아니라 손과 발을 쓴다면 에두아르도는 반격하지 않을 테고, 그가 주먹을 내지르지 않는다면 결코 동등한 싸움이 될 수 없었다. 알레한드라가 손을 떼고 물러나자 사촌의 몸은 힘없이 잔디밭에 툭 눕혀졌고, 그녀는 실망한 기색이 만연한, 자신과 무척 닮은 얼굴을 외면하며 돌아섰다.
몸싸움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같은 칸에 올랐다. 승객으로 꽉 찬 버스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옆에 앉았다가 한산해진 뒤에도 자리를 옮길 타이밍을 놓쳐 버린 낯선 이들처럼 어색한 거리를 유지했다.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한마디도 교환하지 않았다. 알레한드라는 사촌을 역사에 남겨 두고 미리 계획했던 대로 비행기 시간이 되기 전까지 나리와 웨이벌리를 만나 쇼핑을 하러 떠났다.
부모님께 미국행을 설득하는 건 런던 시내를 누비며 쓸 용돈을 타 내는 것보다 어려웠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현장학습이라는 명목 하에, 모범적인 학생들답게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교양을 가득 쌓아 오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겨우 허락이 떨어졌다. 수도의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알레한드라의 언니 카밀라 데 라 코사가 한발 빠르게 맨해튼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면 달러하이드의 경비 지원 약속에도 여행을 성사시키는 데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어른들에게는 고상한 문화적 체험으로 마음의 양식을 채우겠다는 조건을 걸었지만, 한편으로 알레한드라는 딘에게 동시대 문화를 경험하게끔 인도할 의무가 있었다. 그들은 중간 지점에서 만났다. 뉴욕 주립 극장에서 뉴욕시티발레단의 실험적인 무용극을 관람하는 대신 같은 장소에서 상연되는 번스타인과 손드하임의 뮤지컬을 예매했다. 드레스 코드조차 없는 대중예술을 위해 박스석을 잡는 건 그녀로서는 지나친 사치처럼 느껴졌는데, 달러하이드 도련님은 교내에 파이어볼트를 들여올 때처럼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알레한드라는 파벨을 제외한 학급 하나의 주머니를 전부 털어도 얻지 못할, 장인이 연마한 최고급 빗자루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자량의 뒤에 올라탔고, 마찬가지로 손에 쥔 표가 상징하는 특권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엄격한 교육을 받은 극장 직원의 세심한 안내를 받아 도착한 좌석이 몹시 편안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잘 제련된 광물처럼 반짝였다. 색색의 드레스는 속치마를 몇 겹으로 덧대 한 번 회전할 때마다 만화경처럼 화려한 장면을 연출했다. 금욕을 외치는 감독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체육관에서의 맘보는 정열적이었다. 그러나 군무는 지나치게 빨리 끝났고, 붉은 조명이 한 쌍의 스포트라이트로 교체되며 주인공 두 사람이 서로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넘어가자 극은 금세 지루해졌다.
알레한드라는 푸에르토리코인들이 다시금 등장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들은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고, 산후안으로 돌아가도 이미 모두가 떠난 뒤일 거라는 가사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객석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옆자리의 사촌을 돌아보았다. 에두아르도는 푹신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앉아 심드렁하게 무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에게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각배가 있는데, 항해 끝에 도달한 곳에는 아무도 없는 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
기척을 느꼈든 느끼지 못했든, 에두아르도는 그녀를 마주 보지 않았고 알레한드라는 이내 다시 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에스파냐의 손길은 아메리카에도, 카리브해에도 닿았다. 이제 신대륙은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그들을 다시 거두어 삼키려 하고 있었다.
여행객들은 게걸스럽게 관광 명소들을 둘러보았다. 록펠러 센터 앞에서 고개를 젖히고 마천루의 봉우리를 찾았고 센트럴 파크에서는 오리들에게 빵가루를 뿌려 주었다. 밀라노 출신 이민자들이 대대로 운영하는 피체리아에서 정통 이탈리안 피자를 먹었다. 펄 스트리트의 벼룩시장에서 타로점을 봐 주는 여인이 과연 일버르모니를 자퇴한 마법사일지 아닐지 토론했다. 때로는 카밀라의 감독하에, 그녀가 강의를 들으러 가면 달러하이드 가의 수행 기사와 함께, 그리고 또 늦은 저녁에는 아무도 모르게 둘이서만 움직였다. 사촌 남매는 대저택에 머무를 권리를 정중히 거절하고 첼시에 적당한 호텔을 잡았는데, 우습게도 어른들이 알레한드라의 안위를 염려한 결과였다.
일정 중 하루는 서브웨이 시리즈가 개최되는 날이었기에, 남자애들은 메츠와 양키스의 승부를 구경하기 위해 퀸스로 우르르 몰려갔다. 알레한드라는 줄무늬 유니폼의 밑단을 귀엽게 묶어 입고 선수들이 등판할 때마다 이름과 규칙을 물으며 동행을 귀찮게 하는 대신 홀로 맨해튼으로 향했다.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아더를 만나 뉴욕의 미술관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는데, 구겐하임을 언급했을 때 에두아르도가 몹시 무덤덤하게 "그래, 좋아." 라고 했기 때문에 그와 함께 방문하고 싶지는 않았다.
모든 모험은 발견을, 새로운 경험과 인연을,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이었다. 알레한드라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기를 원하는 소녀였다. 지금은 가질 수 없는 것들, 깜찍한 옷과 남자 친구를, 운전면허와 쇼윈도 너머의 구두와 휘황찬란한 진열장 속 반지를 원했다. 파도에 휩쓸리기 싫다고 해서 모래에 두 발을 파묻고 버티고 싶지는 않았다. 상황과 사람이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그녀는 여전히 가족을 끔찍이 생각했다. 그녀는 에두아르도를 변함없이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그가 그녀를 비난한다 해도 먼저 변절한 쪽은 그녀의 사촌이었다. 그는 알레한드라와 함께 있을 때 그녀의 요구를 고분고분하게 따르면서도 더는 지겹다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았다. 가혹해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알레한드라는 상처받았다고 호소하는 대신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그녀는 꼭대기 층에서부터 시작해 회전 경사로를 빙글빙글 돌며 내려왔다. 평일 오후의 미술관은 비교적 한산했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움직였다.
마법 사회의 회화나 조각은 심미성이나 메시지를 추구하는 예술 작품보다는 마법사의 기교를 뽐내는 도구에 가까웠다. 호그와트의 내벽을 빼곡히 채운 움직이는 초상화들은 심지어 가만히 감상 되기를 거부했다. 반면 구겐하임의 소장품은, 그것들이 아무리 비마법사들의 예술사에 중요한 획을 그었다 한들, 그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거장이고 또 현대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안겼다 한들 정적이었다. 기분을 물을 수도, 작가의 연력을 설명해 달라 요청할 수도 없는 침묵하는 그림들 앞에서 알레한드라는 무엇을 느껴야 할지 몰라 헤맸다.
그녀를 당혹감으로부터 건져 올린 것은 동향의 익숙한 입체파 화풍이었다. 알레한드라의 걸음이 느려졌다. 여태 주위를 배회하다 틈을 발견한 소년이 옆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말을 붙여왔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피카소를 보는 건 따분하지 않아?"
알레한드라는 그제야 소년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돌아보았다. 짙은 갈색 머리에 뻔뻔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미국인이었다. 그녀는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카소는 마드리드에도, 런던에도 있어. 난 피카소를 보는 게 아니야. 이 그림이 내 친구를 닮아서 보는 거지."
"네 친구가 도라 마르를 닮았다고?"
의심의 눈초리에도 알레한드라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스스로를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방인의 특권을 별 보잘것없는 남자애를 위해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적극적으로 쫓아내지도 않았고, 알레한드라가 눈길을 두는 작품마다 요청한 적 없는 설명을 부연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때때로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거나 별것 아닌 질문을 무시하고 먼저 다음 작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1층에 도착했고, 소년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오늘 우리 형이 파티를 여는데, 올래?"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소년이 최대한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를 가장해 대수롭지 않게 물어 와서, 알레한드라 역시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새침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세 시간 뒤, 그녀는 소년들을 닦달해 땀과 탄산음료에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전달받은 주소로 향했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브루클린의 옛 소방서 건물을 개조한 붉은 벽돌 아파트였다. 뉴욕의 건물 대다수가 그렇듯이 승강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계단은 오르는 사람의 목적지에 맞춰 움직이지 않았다. 홑겹의 원피스나 얇은 티셔츠와 청바지에는 지팡이를 숨길 수조차 없었다.
여섯 층을 거슬러 가는 동안 딘은 그새 알레한드라가 미국인 친구를 사귀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자꾸만 질문을 해댔고, 에두아르도는 야구만으로도 모자라 저녁에 열리는 하키 경기에 참석하지 못해 불만스러운 상태였다.
계단을 전부 오르자 복도에서부터 커다랗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은 활짝 열려 있었고, 초대를 받았든 아니든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듯했다.
알레한드라를 선두로 셋은 아파트에 들어섰다. 그녀는 낮의 소년을 찾아 내부를 둘러보았지만, 그는커녕 그를 닮은 파티의 주최자조차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붉은 플라스틱 컵과 투명한 볼에 든 펀치, 부엌 아일랜드에 놓인 생맥주 케그는 MTV의 리얼리티 쇼와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이는 그대로였고, 그들이 불청객일지도 모른다는 자기 의심은 낯을 가리지 않는 미국인들의 스몰 토크 속에 금세 녹아 사라졌다.
거실 한가운데의 소파에 자리 잡은 에두아르도는 발로 흑백의 공을 걷어차는 종목은 사커가 아니라 풋볼이라고 불려야 한다며 열을 올렸다. 전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십 대 초반의 전직 육군으로부터 생생한 걸프전 이야기를 듣고 눈을 빛냈다. 어느샌가 그의 손에는 자연스럽게 맥주병 하나가 쥐여져 있었고, 남미가 아닌 남유럽에 근본을 둔 억양은 얕잡힐 만한 취약한 특징이 아니라 근사한 액세서리가 되어 그를 장식했다. 여자애들이 그의 풀 네임을 물을 때 목소리의 열의는 한풀 꺾였지만 그래도 그는 예의 바르게 미소하며 미들 네임과 모계 성까지 읊어 주고는 다시 전쟁과 스포츠에 관한 대화로 돌아갔다.
알레한드라는 그를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를 떴다. 비좁은 화장실에서 그녀는 조금 운다. 기차에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도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눈가를 훔치고 나오면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른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누군가 LP판을 교체했다. 장르는 뉴잭스윙에서 산뜻한 하우스 뮤직으로 넘어간다. 그녀가 딘에게 약속했듯이.
"알레한드라!"
거실 건너편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과 떠들던 딘이 그녀를 소리 높여 부르고 알레한드라는 치마에 손바닥의 물기를 닦고는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딘은 딱딱하게 예의를 차린 본래의 말투를 허물처럼 벗어 버리고 격없이 유쾌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무도 그가 달러하이드의 유일한 후계자라고는 의심치 않았다.
세 사람은 정말이지 완벽하게 평범한 십 대처럼 보였다. 마녀도 마법사도, 해군의 후예도 부잣집 도련님도 아닌 미국과 유럽의 소년 소녀들.
초대받은 손님들은 모두 능숙하게 맡은 역할을 연기했다.
밤 열 시가 넘어 겨우 연락이 닿은 남매를 데리러 온 카밀라가 두 사람을 택시에 밀어 넣고 야단쳤다. 그녀는 딘의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겠다며 번호를 요구했고, 딘은 다시 롤스로이스의 뒷좌석이 익숙한 상류층 자제의 외피를 입고 카밀라를 논리정연하게 설득했다. 카밀라의 신경질적인 표정은 차차 누그러졌고, 내일은 이탈하지 않고 얌전히 공항으로 직행하겠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나서야 택시를 출발시켰다.
"왜 반대하지 않았니? 카이덴, 너희 둘 중 하나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지."
"그러지 마, 언니. 에두아르도는 내가 원해서 따라온 거야."
알레한드라가 그를 변호하는데도 에두아르도는 묵묵부답이었다. 카밀라가 룸미러로 눈빛을 보냈지만 알레한드라는 혹시 싸웠느냐는 묵언의 질문을 못 본 체했다.
택시 안에서도, 대서양을 건너는 비행기에서도 에두아르도는 내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여름과 함께 끝난 짧은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달라진 뒤였다.■
* 실제 역사에서 1995년부터 뉴욕 주립 극장에서 상연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1997년 6월 15일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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