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9
1
언제인지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깼다. 가슴이 답답하다 싶더니 검은 뱀 한 마리가 갈비뼈 위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달아날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세모꼴의 머리를 세워 혀를 낼름거렸다.
"돌아온 걸 환영해."
뱀이 말했다.
가슴을 누르는 무게에 짓눌린 채로 이시도어는 손가락을 움칠거렸다. 손바닥 밑으로 갓 돋은 연한 잔디와 촉촉한 흙이 만져졌다. 서서히 정신이 맑아지며 상황의 맥락이 떠올랐다. 그는 긴 여정의 끝을 목전에 두고 내리쬐는 봄볕과 졸음을 못 견디고 언덕에서 곯아떨어진 참이었다.
"내가 너를 알고 있어?"
이시도어가 물었다.
"아니." 뱀이 대답했다. 뾰족한 머리가 좌우로 번갈아 움직였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구나."
"왠지 이렇게 될 것만 같았거든…."
이시도어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종 간의 조우를 반기지 않는 듯 등 뒤의 숲에서 까마귀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뱀은 소란 떨지 않는 얌전한 반응에 흥미를 잃었는지 인간의 옆구리를 타고 내려가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길고 묵직한 몸뚱이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가 기묘하게 서늘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팔꿈치와 오금에 묻은 풀을 털어내고 느긋하게 비탈길을 내려갔다. 사 년 만이었다.
2
진녹색 일인용 벨벳 소파는 그의 고정석이었다. 같은 원단을 쓴 오토만까지 한 세트였는데, 사용인이 고용주 앞에서 다리를 뻗는 건 예의에 심히 어긋나는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직접 써 본 적은 없었다.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때 슬며시 손끝으로 쓸면 짧고 보드라운 솜털의 결이 역방향으로 누우며 길이 났다. 소파는 착석한 이를 껴안듯이 포근하게 받아 주었고 걷은 소매 아래 살갗에 닿는 감촉이 산뜻했다.
의자는 백작의 침대맡에 놓여 있었다. 그 방은 백작령의 성에서 연회장과 만찬실을 제외하면 가장 호화스럽고 넓은 공간이었지만 이십여 년 전 백작의 딸과 부인이 연달아 사망한 뒤로는 무자비하게 방치되어 낡아 가는 중이었다. 프랑스에서 수입한 비단 벽지는 주인의 우울을 흡수하듯 색이 바랬고 가죽을 입히고 금장을 두른 커다란 침대의 헤드는 쥐가 갉아먹은 것처럼 표면이 조금씩 뜯겨 나갔다. 백작이 침실을, 정확히는 그 침대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방은 하나의 개체로 묶여 집사가 어떻게든 손 쓸 도리 없이 세월의 풍파를 맞았다.
루퍼트 폰 바우머 백작은 외로운 사내였다. 젊은 시절에 그는 사관학교 출신의 유능한 장교였다. 나이가 든 지금도 여전히 기골이 장대해 키가 거의 이 미터에 육박했다. 다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었고 청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매번 고함을 지르듯이 말하는 버릇이 들었다. 원래도 무뚝뚝한 성격이기는 했으나 노년에 이르러서는 몸이 그 발성 습관을 받쳐주지 못해 꼭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입을 꾹 다물고 지냈다. 귀와 하체의 부상은 전부 하나의 사건에 기인했다. 포탄이 그의 참호에 떨어진 것이다. 젊은 백작은 당시 장군의 막사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이었다. "포격이다!" 겁에 질렸지만 훈련 받은 대로 누군가 외쳤고 곧이어 굉음이 들려왔다. 막사 안의 백작은 살아남았고 그가 지휘하던 사병들은 모조리 죽었다. 백작의 옆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희끗한 구레나룻 아래로 길쭉한 흉터가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그날의 피습의 증거였다. 백작이 자신이 참전한 전쟁의 정확한 연도와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 이시도어는 후에 성의 서재에서 기록을 찾아 맞추어야 했다.
누군가의 삶에 기록할 가치가 있거나 없다고 냉정하게 단언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백작의 인생은 다사다난했지만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렇기에 이시도어는 그를 골랐다. 이시도어에게는 거리의 부랑자나 오스트리아의 황후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백작은 원한다면 스스로 글을 써내려 갈 만한 교양을 갖추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지난해 백내장에 걸리면서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자서전을 출간하겠다는 결심이 말년의 난데없는 변덕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구명 행위라면 그에게는 도움이 간절히 필요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이시도어는 그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력이 쇠한 백작은 길게 이야기하지 못한다. 이시도어는 정해진 휴일 없이 매일 백작을 찾아갔고 하루에 한 시간씩 말동무를 하면 그날 업무는 끝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노인에게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해도 전부 듣고 기억할 수 있다고 반복해 장담했지만 백작은 방해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할 뿐더러 이따금 문장 하나를 마치면 그 전까지 나눈 대화는 전부 잊어버리는 듯했다. 보수에 연연하지 않고 인내심이 몹시 강한 이시도어는 그를 상대하기에 제격인 인물이었다. 노인의 침실에 밴 퀴퀴한 냄새, 죽음과 고독의 냄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집필을 시작한 그는 성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다른 사용인들과 얼굴을 익히고 친밀하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업무 강도에 비해 넉넉한 대가를 지불 받는 그로서는 충분히 미움을 살 만도 했지만 그가 하인들의 숙소가 아닌 손님 방을 배정 받은 덕에 운 좋게 텃세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성에서 이시도어의 지위는 모호했다. 그는 부엌과 세탁실, 백작의 침실과 서재를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자 이곳에서 사십 년 이상을 일한 집사를 제외하고는 백작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백작의 장녀가 다 자라 결혼을 앞두고 병사했다는 것과 그녀의 동생인 장남은 그보다도 더 일찌감치, 예닐곱 살 무렵 낙마해 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백작 부인이 헝가리 출신이며 가녀린 외모에 비해 불곰 같은 성미를 지녔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가문의 연표에 고작 한두 마디로 기록될 법한 정보 외에도 부부가 첫만남에서 어떤 밀어를 나누었는지, 그저 핏덩이 같기만 했던 어린 아들을 묻을 때 관에 그가 무엇을 넣어 주었는지, 어디선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온 딸애에게 실은 어떤 비밀이 있었다고 그가 추론하는지는 이시도어만이 들을 자격이 있었다.
백작은 놀라우리만치 솔직했다. 머리에 짙은 안개가 껴 사건의 선후와 인과를 헷갈리고는 했지만 부끄럽고 치졸한 기억도 왜곡하거나 편집하지 않고 털어놓으려 했다. 그 이야기들은 당장은 철저히 이시도어에게만 전승되었지만, 책이 완성되면 세상에 낱낱이 공개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전면으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지 이시도어는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직 영구히 떠날 사람들만이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거쳐 가족들을 하나씩 떠나보내고 진도는 이제 중년까지 나아가 백작이 폐렴에 걸려 스위스로 요양을 갔던 시기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그는 저명한 화가를 만나 곧 절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새 친구는 해가 바뀌기 전에 병환을 이겨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응접실에 걸린, 미완성으로 남은 아로자의 풍경화는 바로 그의 유작이었다. 백작은 화가의 가족이 유품을 정리하러 오기 전에 그 캔버스를 몰래 숨겨두었다가 퇴원하며 영지로 가져왔다. 그가 부당하게 그림을 훔쳤다고 원고에 꼭 써야만 한다고 연신 강조했다.
"알고 있어요… 무얼 걱정하시는지." 이시도어가 말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으실 거예요."
타인을 위해 글을 쓴다는 건 바로 그런 의미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백작이 피로에 절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이시도어는 고개를 끄덕이고 활공하는 매의 일부가 된 듯 깃털처럼 가볍게 몸을 받쳐 주던 벨벳 소파에서 일어섰다. 중력이 순식간에 그를 잡아당겼다.
실은, 이시도어는 온몸의 무게와 시름을 앗아가는 소파보다도 그의 방에 있는 딱딱한 원목 의자를 더 좋아했다. 널찍한 책상과 한 쌍으로 짜인 그 의자는 남아시아에서 가져온 적갈색 멀바우 목재를 써 탐스러운 광택이 돌았다. 그는 고급이나 사치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지만 날카로운 장인 정신과 세심히 발굴된 아름다움에 감탄할 줄 아는 심미안을 지녔다. 그러니 예술 학교에서의 삼 년도, 비록 끝물에 원치 않는 잡음이 발생했다고 해도, 무탈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이다. 검푸른 잉크로 원고지를 채울 때가 아니면 그는 의자를 벽창 앞에 끌어다 앉아 아카데미 재학 시절처럼 바깥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는 했다.
백작은 수완이 좋아 제대한 뒤에는 영지에서 본격적으로 양조장 사업을 시작했다. 바우머령의 너른 평원에는 포도 농원이 끝없이 펼쳐졌다. 늦여름에 백포도를, 한 달 반 뒤 초가을에는 적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담갔다. 영지의 주민들과는 계약을 맺어 한두 해 흉작이 들더라도 주류 수입의 일부를 배당 받아 생활이 지속 가능하게 했다. 해를 거듭하며 풍년이 이어졌고 그는 곧 가문의 재산을 두 배로 늘렸다. 백작은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그가 파악한 바, 사람들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술을 찾았다.
이시도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계절이 전환되며 바람이 막 선선해지던 참이었다. 푸르스름한 얇은 껍질에 감싸인 과육은 익을 대로 익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알차게 들어찼고 헝겊으로 무릎을 기운 바지 차림의 소년들이 갈퀴를 들고 포도송이에 달려드는 지빠귀들을 몰아냈다. 이곳에는 아직 까마귀의 마수가 미치지 않아 허수아비가 외발로 통통 튀어다니며 농장을 돌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듯했다. 이시도어는 안심했고 또 조금 쓸쓸해졌다.
그의 짐 가방, 오 년 전 고향을 떠나 로트바르트를 향할 때도, 삼 년이 흘러 로트바르트에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함께했던 사절지보다 약간 작은, 손잡이 달린 여행 가방은 늘 가볍고 단출했다. 더블 버튼 코트의 안주머니에는 추천장이 한 장 들어 있었다. 그가 남서부의 해안에서 만난 어느 노부인이 써 준 것이었다.
이시도어의 행색은 때와 장소에 따라 급변했다. 그는 몸뚱이에 무얼 걸치든 서슴이 없었고 그래서 뭐든 잘 어울렸다. 하루는 아마로 지은 하층민의 작업복을 입고 마구간의 오물을 치우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멋대로 소모해도 되는 유산을 상속 받은 친구의 배려로 연미복을 갖춰 입고서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에게는 작위나 재산은 없었지만 청중을 매혹하는 이야기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아카데미의 졸업장은 유용한 신분 증명 수단이었다. 세간의 기준으로는 하잘것없는 출신에 비해 출중한 교양과 학식은 그가 어디서 수학했는지 밝히지 않으면 더 의심 받지 않았다. 곱상한 외모 또한 거들면 거들었지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
가르니에 부인을 만났을 때 그는 오톨란을 제공하는 해변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근무하고 있었다. 멋들어진 맞춤 정장은 아니었으나 레스토랑에서 대여해 주는 유니폼은 이시도어를 멀끔한 청년으로 보이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부인이 동행으로 데려온 조카는 오십 대의 무뚝뚝한 정신분석학자로, 인정도 눈물도 많은 노인의 사근사근한 말벗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시도어는 이내 가르니에 부인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담소를 나누고 바닷바람이 너무 차가워지면 숄을 꺼내 어깨에 둘러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남편과 사별한 데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부인은 근래의 사립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제공하는지 몹시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연말에 개최되는 정기 발표회에 대해 듣는 걸 제일 좋아했다. 이시도어는 그의 전공이 극작이었다고 밝혔고 결국 어느 유명 작가와 동문임을 시인하고 말았다.
"그 작품들이 날카로운 송곳과 같다면, 제 글은…" 그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당의정에 불과했어요."
그리고 다시 화제를 바꾸어 이시도어가 밀라와 이오, 틸다의 춤을 생생하게 묘사하면 부인은 당밀을 처음 맛본 아기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여름과 함께 피서철이 끝나면 이 평화로운 마을의 부유한 관광객들은 서둘러 대도시로 귀환하고 수요에 맞춰 늘어난 임시직도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이시도어로서는, 때때로 갈매기가 정수리 가까이로 날아올 때 사람의 언어를 속삭일까 봐 신경쓰이는 것 이상으로는 걱정이 없었으나 여전히 소녀처럼 마음이 연약한 노부인은 그녀에게 친절히 대해 준 청년이 실직하는 게 몹시 염려스러운 듯했다. 기차역에서 그녀는 이시도어의 양 뺨 옆에 입맞추는 시늉을 하며 여비와 추천장이 담긴 봉투를 내밀었다. 처녀적 절친이었던 여인의 남편이 자서전을 집필한다고 하니 찾아가 보라는 권유였다. 그리하여 이시도어는 바닷바람의 소금기가 밴 웨이터 유니폼을 벗고 다시 한번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납작한 종이 봉투에는 마차를 빌리거나 기차를 타기에 충분한 돈이 들어 있었지만, 이시도어는 보다 느긋한 경로를 택했다. 그는 우선 수도의 우체국에 전보를 보내 사서함으로 들어오는 편지를 바우머령의 백작가로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지도를 펼쳐 영지까지 이르는 길의 흐름을 파악하고는 발길과 인연이 닿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루이틀 정도는 여유를 부려도 괜찮았다.
바우머령의 경계는 지도의 굵은 선과 팻말 외에 포도의 달콤쌉싸름한 향기로도 그려졌고, 눈보다도 먼저 코와 혀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감각했다. 고된 노동에 지친 일꾼들도 붉게 달아오른 뜨끈한 뺨을 구기며 웃었고 발효 중인 으깬 포도알을 용케 훔쳐 먹은 새끼 여우가 비틀거리며 숲으로 달아났다. 석양이 지면 늘어선 지주를 타고 오른 덩굴과 이파리가 금빛으로 빛났다.
수확철이 지나면 공기는 금세 쌀쌀해졌다. 해가 짧아질수록 양조장은 더욱 활발해졌다. 지난해, 그 전해, 또 그 전의 해… 그렇게 연 단위로 담근 와인을 품질에 따라 나누어 포장하고 판매하는 시기가 오기 때문이다. 성탄절을 앞두고서는 특수를 누려 더욱 분주했다. 본래 그 과정을 진두지휘하던 백작은 몇 년 전부터는 믿을 만한 대리인에게 모든 결정을 맡기고 사업에 관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긴긴밤 동안 지나온 삶을 곱씹고 그 다음날 오전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이시도어에게 정제된 회한을 털어놓았다.
임종을 앞둔 늙은 백작이 마지막 정념을 불태우는 동안 이시도어 미스트힐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나. 그는 분명 미려한 문장과 마치 그 자리에 함께였던 듯한 사실적인 묘사로 백작뿐만 아니라 그에게 추천장을 써 준 백작 부부의 오랜 친구, 팔리지 않을 책을 계약하자고 출판사를 설득할 생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가문의 법률 대리인, 휴식 중 우연히 원고를 읽기 시작한 인쇄소의 조판업자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펜촉을 움직이는 힘은 언제까지나 가벼운 연민과 흥미에 불과했다.
3
대필 작가는 반성의 기미 없이 오늘치 대담을 기록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왔다. 낮이 부쩍 짧아져 금방 해가 저물었고 방문객조차 없어 음울한 성의 복도는 더더욱 어두웠다.
몰입해 글씨를 휘갈기던 중 얼마 안 가 밖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트힐 씨."
이시도어는 문을 열었다. 복도에 키가 그와 엇비슷한 거대한 개구리가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얼마 전부터 이족보행하는 양서류로 보이게 된 집사였다. 이시도어는 이 모든 게 시답잖은 연극 같아 웃음이 나올 것 같으면서도… 근래 들어 포도원 곳곳에서 검고 긴 깃털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외면하지 못했다.
"편지가 왔습니다."
네 갈래의 흡착력 있는 손가락에 용케 맞는 흰 장갑을 구해다 낀 개구리 집사가 기품 있는 몸짓으로 은쟁반을 내밀었다.
로트바르트로부터의 초대장이었다.
집사를 물리고, 자리로 돌아와 이시도어는 장밋빛 촛불에 편지를 비추어 보았다.
백작을 둘러싼 죽음과 상실의 계보는 점차 형태가 완전해져 갔다. 이시도어는 백작이 그의 손과 귀를 통해 써내리는 글이 일종의 추도문이며 비가임을 모르지 않았다. 하등 중요해 보이지 않는 산발적인 일화들은 오로지 애도의 목적으로 선택된 것이다. 대필 작가를 불러들인 순간부터 백작은 끝을 어떻게 장식할지 결정해 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흩날리고 증발하는 대로 살아가며 신념이랄 게 희박한 그에게도 한 가지 철칙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성은 그 자체로 다정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시도어 미스트힐은 펜을 내려놓는다. 퍽 아꼈던 적갈색 멀바우 책상에 마지막 장만 비워둔 원고를 유리 문진으로 눌러 올려두고 그는 지체 없이 성을 나섰다. 여느 때와 같이 서명은 하지 않았지만 애초부터 그런 계약 조건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여정의 목적을 묻지 않았기에, 그도 어디로 떠나는지 밝히지 않았다.
230927
귀향은 유예될수록 달가웠다. 거마비를 아끼기 위해 그들은 가능한 한 도보로 이동했다. 졸업식 당일에는 하늘이 말끔했지만 마냥 희소식은 아니었다. 오전 중에 잠시 드러난 볕에 쌓인 눈이 일부 녹았다가 다시 결빙하면 그만큼 길은 미끄러운 덫이 되었다. 푹신한 곳을 골라 걸어, 이시도어가 말했다. 아니면 도로의 벽돌이 드러난 데를 딛거나. 휘적휘적 뒤따르며 펠레아스가 대꾸했다. 눈길에서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쯤은 나도 알아.
신발이 눈밭에 푹푹 빠졌다. 당장 들개에게 던져 주어도 될 만큼 정강이가 차게 식었다. 손에 든 단출한 짐 가방 안에는 반듯한 졸업장이 들어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여태 교복 차림이었다. 떠나온 장소에 대한 미련이라기보다는 절약의 연장선이었다. 아무리 살뜰히 아끼는 습관이 들었다 한들 필요한 때에 외출복으로 갈아입지 못할 만큼 아쉬운 처지는 아니었으나, 아직 젖지도 헐지도 않은 옷을 벗어 개켜둘 이유도 없었다. 다행히 겉에 걸친 코트와 목이 높은 부츠 덕에 노골적으로 학생 신분을 갓 벗어난 티가 나지는 않았다.
소도시 두 개를 지나 교외의 야트막한 산지를 건너면 비로소 고향이었다.
얻어탄 짐마차에서 뛰어내려 마을 어귀에서부터 걸어 들어가는 길은 금의환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함박눈 속에서 이시도어의 희멀건 뒤통수는 자꾸만 사라졌다가 놓치려는 찰나에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들은 한 쌍의 고행자들처럼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턱과 입술을 둘둘 감은 목도리 안쪽이 입김으로 눅눅해졌다.
뼈만 남은 나목 사이로 난 길을 따라 한참을 움직이다 이시도어가 우뚝 멈춰 섰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소박한 주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로 가면 돼? 몇 미터 옆에 딸린 헛간으로 발길을 돌리는 펠레아스를 이시도어가 붙잡았다. 저런 데서 재울 리가 없잖아. 네가 동방에서 온 현자도 아니고…. 미적지근한 초대의 말은 앞으로도 각별한 손님 대우는 없으리란 예고였다.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품에서 열쇠를 꺼냈다. 전원의 소박한 이층집에 딱 맞는 황동 열쇠였다.
남편은 제분기를 돌리러 나가고 안에는 미스트힐 부인뿐이었다. 한 해 내내 자리를 비웠다가 이맘때쯤 잠깐 얼굴을 비치는 아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듯이 놀란 기색이었으나, 이내 뺨에 온화한 홍조를 띠고 아들과 그의 친구의 어깨에 쌓인 눈을 발돋움해 털어 주었다. 어서 오렴. 밤색 눈과 머리를 가진 아담한 여인이 두 소년을 환대했다.
저녁 식사를 차리기까지 세 시간 가량 여유가 있어 그들은 짐을 내려놓고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이시도어는 먼저 교복을 벗었다. 내가 생색을 낸다고 생각하거든. 그가 모호하게 해명했다. 누가? 펠레아스가 물었다. 마을 사람들. 이시도어가 대답했다.
학교에서는 모든 것이 풍족했다. 성탄전야가 아닌 날에도 노릇노릇하게 익힌 칠면조가 내어졌다. 학생들은 검날 무늬가 양각으로 새겨진 투명한 크리스털 고블렛에 글뤼바인을 양껏 담아 마셨다. 서고에 저장된 지식은 채 흡수하지 못할 만큼 방대했고 탐험할 수 있는 공간은 무한했다. 반면에 이시도어의 고향은 조촐하고 볼품없었다. 겨울에는 더더욱 주민들의 인품이 헐벗은 들처럼 성마르고 매정해졌다. 별 볼 일 없지? 이시도어가 집주인 가족의 권한으로 물었다. 이만하면 목가적이고 정겨운데. 펠레아스가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학교에서 그들은 하나의 소재를 두고 그것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에서 묘사하는 법을 훈련 받았다. 시적 허용이 적용된 유의어 사전의 용례를 고스란히 가져온 듯한 어휘 선택에 웃음이 나왔다.
띄엄띄엄한 농가의 작은 집들, 눈으로 덮혀 농번기의 탐스러운 광채는 잊히고 묘지처럼 고요한 들판, 덜 말린 장작을 넣으면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시끄럽게 돌아가는 구식 난로… 반나절이면 구경거리가 다 떨어지는 시골 마을을 다음 사흘간 적절히 나누어 소개하는 것은 그곳에서 십여 년을 보낸 이시도어에게도 난제였다.
그는 우선 언덕으로 친구를 안내했다. 꼭대기에 더는 사용하지 않는 풍차가 있었다. 선조 대부터 내려져 온 유산이었으나, 증기 기관의 발명에 밀려 이제는 여름 장마철에 배수로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간혹 구동되는 게 전부였다. 거대한 철제 날개에도 눈이 켜켜이 쌓였다. 봄이 오면 저게 다 녹아서 폭포수처럼 흘러. 이시도어가 머리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날이 풀리기 전에 갈퀴로 긁어내 줘야 해.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 두 사람 모두 이곳을 떠나고 없을 것이다.
풍차 내부는 이제 창고로 쓰였다. 미스트힐 씨에게는 애물단지였다. 아무리 문단속을 단단히 해 두어도 주기적으로 마을 청년과 처녀가 짝을 지어 숨어들고는 하는 것이다. 보관해 두던 짚단과 수레를 치우고 걸쇠를 바꾸어도 안달이 난 연인들은 늘 방법을 찾아냈다. 다행히 그들이 방문했을 때 풍차 안은 공실이었다. 다만 어두컴컴하고 쌀쌀해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가자. 이시도어가 먼저 돌아섰다. 마을에 도착하고 그는 줄곧 앞장서 걸었다.
겨울 해는 금세 사위었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이시도어의 아버지를 만났다. 미스트힐 씨는 우직하고 건장한 사내로,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중년에 접어들며 눈가에 잡히기 시작한 주름이 선량한 인상을 남겼다. 어서 오시오. 그가 손님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시도어에게는 보다 친밀하게 등을 두드려 주었다. 졸업 축하한다. 그 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미스트힐 부인이 뛰쳐 나왔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졸업식은 잘 마쳤니? 그녀가 손에 든 국자에서 질척한 소스가 흘러 떨어졌다. 여보, 회포는 식사와 함께 푸는 게 좋겠소. 디터 미스트힐이 침착하게 아내를 부엌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닭고기 조금과 거친 호밀빵, 절인 당근을 먹었다. 이시도어는 목도리를 풀어 걸어두면서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워 목걸이를 감추었다. 그는 졸업 발표회에서 직접 쓴 극을 무대에 올린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젤>의 마을 청년들이 윌리들과 함께 추는 군무가 몹시 절도 있고 기교가 뛰어났으며, 같이 온 친구도 그런 훌륭한 무용수 중 한 명이라고 칭찬했다. 펠레아스는 적절하게 행동했다. 그는 이시도어가 쓴 글이 제법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고도 밝혀 어머니가 손뼉을 부딪치게 했고 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헛기침 소리를 내도록 만들었다.
혼인 전 브루나가 쓰던 방은 이제 너무 낡아 침대가 거의 삭았기 때문에, 이시도어는 그의 방을 펠레아스에게 내어주고 자신이 누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세를 주고 싶었지만, 수확철이 아니고서야 이 시골 동네에 하숙하러 오는 사람이 있어야지. 어머니가 새 이불을 가져다 주며 얼굴을 붉혔다. 직장을 얻으면 여윳돈을 보낼게요. 이시도어가 점잖게 대답했다. 그러지 마라. 미스트힐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시도어, 네게 갚아야 할 빚 같은 건 없어.
이튿날, 눈보라가 더욱 거세져 그들은 헛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암탉들은 저들끼리 깃털을 쪼거나 온기를 찾아 꾸벅꾸벅 조느라 여념이 없었다. 크리스토프는? 헛간을 둘러보던 펠레아스가 물었다. 저기. 이시도어가 머리 위를 손짓했다. 어떻게 올라갔는지 대들보 위에 늙은 염소 한 마리가 서서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램프를 들고 있던 이시도어가 주춤하는 사이 흰 털을 가진 염소는 재빠르게 기둥과 벽을 딛고 내려왔다. 전력으로 땅을 박차던 발굽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더니 펠레아스의 앞에서 비로소 얌전해졌다. 건초를 받아먹는 크리스토프는 배부른 갓난아기처럼 온순했다. 나이가 들었나 봐. 펠레아스가 그것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숭을 떨고 있을 뿐이야… 이시도어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 다음날에는 눈이 잦아들고 하늘이 바짝 갰다. 이시도어는 학교에서 들고 온 짐을 풀지 않고 그대로 벽에 기대어 놓았는데, 그날 아침에만 잠깐 가방을 열어 스케이트 날을 챙겼다. 호수에 갈 거야. 그가 문간에 나타나 아직 잠에서 덜 깬 펠레아스를 재촉했다. 자작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작은 호수는 로트바르트에 있는 것과는 겨루지도 못할 규모였지만 초겨울에도 곧잘 단단히 얼어붙었다. 어린 이시도어는 그곳에서 누이에게 스케이트 타는 법을 배웠다. 브루나가 꼬마였을 적에는 아버지가 그녀를 가르쳤다. 그때 부츠에 동여맸던 어린이용 스케이트 날은 몸이 자라면서 헐값에 이웃에게 팔아버렸는데, 수줍음을 타고 얌전한 브루나는 오로지 남동생에게도 빙판을 지치는 즐거움을 알려 주기 위해 부끄럼을 무릅쓰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몇 분 뒤 그녀는 품에 녹슬고 무딘 날 한 쌍을 안고 돌아왔다.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브루나는 그린 듯한 순박한 시골 처녀였다. 선하지만 고지식했고, 예뻤지만 수수했다. 양순하고 가정에 충실했던 그녀는 집에서 기르는 몇 안 되는 가축을, 암탉과 염소를 아끼듯이 이시도어를 애지중지 여겼다. 이시도어는 누이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주제로 글을 쓴 적은 없었다. 주인공이 될 운명은 타고나는 법이었고, 그녀는 전혀 다른 별자리 아래에서 태어난 부류였다. 이시도어는 빠르게 자랐고 얼마 안 가 손위 누이보다 우아하게 빙판 위를 내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에게는 동생이 없었지만 예술 학교에 진학해 그곳의 친구들에게 스케이트를 가르쳤다. 신체를 단련하고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학생들은 얼음 위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균형을 잡고 기교를 선보였다.
곳곳의 관목에서 딴 붉은 겨울 열매를 손에 한 줌씩 쥐고 자작나무 숲을 빠져나오면 그곳에 이름 없는 호수가 있었다. 여기서는 그냥 호수라고 불러… 이시도어가 눈썹 위로 손차양을 치며 말했다. 대개는 평생 다른 호수를 볼 일이 없거든. 눈이 얕게 쌓인 표면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동네 꼬마들이 몰려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덜 달구어진 공기가 서늘하고 상쾌했다.
펠레아스 오베르가 호수 위로 발을 내디딜지, 뭍의 바위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날, 구름이 막 걷히던 겨울 오전에, 스케이트를 타다 넘어지는 일은 하나의 생명과 맞바꾸어야 할 만큼 위험한 거래가 아니었다.
이게 다야. 낡았지만 질긴 끈이 달린 스케이트 한 켤레를 내미는 이시도어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게 내 전부야.
나흘째에 짧은 여행은 끝이 났다. 이시도어는 남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고향에 돌아간다고 했지만 정작 그에게는 챙기거나 처분할 물건이 거의 없었다. 그는 어머니 편으로 누이에게 보낼 편지를 한 장 작성했다. 작별 앞에서 미스트힐 부부는 훨씬 다정했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뿐만 아니라 그의 동기 역시 끌어안고서야 놓아 주었다.
그들은 다시 마을의 경계로 걸어 내려갔다. 헐벗은 겨울나무를 지나쳐, 무엇도 자라지 않는 은백색의 너른 밭과 풍차가 있는 언덕을 지나쳐 교차로에 도달했다.
그 길목에서, 그들은 아직 어렸다. 아이들은 도처에서 천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갈림길마다 가능성이 움텄다. 그 안에 불안과 설렘이 공존했다. 두 발과 다리는 얼마든지 걸어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동자는 빛깔이 바래지 않았는데도 그때와 같은 풍경을 더는 보지 못한다.
그는 점차 멀어지는 검은 인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졸업 무도회에서의 건배사를 되뇌었었다. 희미해진 뒷모습이 잠시 멈추어 기도의 마임을 취하는 일은 없었지만, 어차피 그는 행운과 기원을 원치 않았다.
이윽고 이시도어 또한 반대편으로 길을 떠났다. 당분간은 돌아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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