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NISH SHORT STORIES
내겐 너무 완벽한 그녀
발라람 카는 현실적인,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세속적인 인물이었다. 동생의 친구가 그에게 관심을 표해 왔을 때, 그는 가장 먼저 캄란의 생년과 그가 수학한 학교의 이름을 떠올려 내려 애썼다. 삼 형제의 막내는 그보다는 여섯 살이 어렸고 스코틀랜드 어딘가에서 정부의 학비 지원을 받는 무료 기숙학교를 졸업했다. 교명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조모가 동문으로 있는 곳이니 아주 조잡한 곳은 아닐 터였다. 외국인 유학생을 받을 정도로 명망 있는 곳이라면, 비록 이공계 교육에서는 뒤처진다고 해도, 그가 인지하지 못한 특혜와 이점이 존재할지도 몰랐다. 모든 졸업생이 성공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동생이 이룬 것 하나 없이 젊음을 허비하는 것을 이미 오 년도 더 전에 졸업한 학교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제 그들 형제는 타워햄리츠 구의 비좁은 집에서 서열을 가리던 소년들이 아니었고, 멋대로 그의 연락처를 전달한 캄란에 대한 처분은 추후에 결정해도 됐다.
전화기 너머 타국의 억양이 희미하게 잔존하는 목소리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발라람은 간만에 벽장에 방치해 뒀던 하숙생 시절 짐을 꺼내 먼 옛날 난데없이 송달되었던 자매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갈색 피부나 푸른 눈이 개별적 기호로서 가지는 의미에 관해 사유하지는 못했지만, 종합하여 심미적이라는 감상은 얻을 수 있었다.
첫 만남 이후로 동생을 응징하는 계획의 우선순위는 한 번 더 밀렸다. 새로운 여자 친구는 젊고 활기찬 미인이었고, 놀랍게도, 그가 그녀를 생각하고 있기만 해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라람, 출장이 있어서 맨체스터에 왔는데 점심시간 괜찮아요?" 그리고 연락은 언제나 괜찮은 시간대에 왔다. 그녀는 대학병원의 좁은 의국으로 그를 만나러 왔고 카페테리아에서 차갑고 질긴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먹고 헤어지는 것으로도 만족했다. 아픈 환자들과 지친 의료인들뿐인 건물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치장한 그녀가 나타나면 이목이 집중되기 마련이었고, 마침 딱 알맞게도 발라람은 주목받기를 즐기는 사내였다. 그녀는 몹시 유연했고, 너그러웠고, 지루하지 않을 만큼은 영민했고, 의중이 훤히 보였다. 가끔 토라질 때마저도 어떻게 달래 주어야 할지 적힌 답지를 손가락 사이에 느슨히 끼운 채로 얼른 가져가 달라며 흔들어댔다. 깐깐하고 뻣뻣한 영국인 여자들과는 달랐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의 내용은 조금 더 솔직해졌다. "보고 싶어요." "주말에 만나기로 했잖아." "지금 당장이요." 런던과 맨체스터는 가장 빠른 기차를 타도 세 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인데, 애인이 캠퍼스에 나타나는 데는 번번이 그 절반도 걸리지 않았다. 발라람은 그녀가 이미 출발한 뒤에 연락을 하나 보다 짐작했고, 그런 헌신이 때로 부담스럽기는 해도 싫지만은 않았다. 삼십 대에 접어들면 열정과 의욕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기 마련이었다. 연애와 결혼은 구별할 수 없는 한 가지 목표로 유착되었고, 현실을, 미래를 직시해야만 했다. 진료와 수술 사이사이에 커피를 들고 모이는 동료들은 죄다 미처 갚지 못한 학비와 대출금, 의사 사위를 은근히 깔보는 사업가 장인과의 신경전, 둘째 아이의 지병, 병원장과 이사회의 줄다리기 따위에 관해서만 떠들어댔다. 만남을 거부하지 않고, 손을 마주 잡고 잠들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족되어 밝은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은 그의 애인뿐인 듯했고, 그러면 발라람은 그녀의 둥근 어깨를 껴안고 싶다는 생각으로 간절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소개했지만, 발라람에게 신약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일은 어떤지 물으면 늘 "좋아요." 혹은 "좀 바쁘기는 해요." 정도의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어차피 의례적인 질문에 불과했고, 그가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 그녀가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았으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계산할게요." 라고 농담하면 그제야 발라람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애인한테 밥이나 얻어먹는 녀석으로 만들려는 거야?" 하고 장난스레 위협당하는 시늉을 했다.
바라는 게 많지 않은 여인과 사귀어도 발라람은 염치를 아는 사내였고, 당직을 서지 않는 날에는 제법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식당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선택지가 다양하지 않은 탓에 직장과 관련된 주변인을 꼭 한두 명씩은 마주치곤 했지만, 그런 순간에 갑작스럽게 소개해도 부끄럽지 않은 여자였다.
맨체스터 인근의 괜찮은 레스토랑을 전부 섭렵할 즈음,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와인잔의 받침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암시를 담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모던 프렌치 퀴진을 취급하는 <더 스패로우>에는 벌써 세 번째 방문이었고, 안면을 튼 수셰프가 내준 쥐랑송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와인이 코스를 마무리하는 살구 소르베와 매우 잘 어울렸다. 발라람의 전공은 비뇨기과였는데, 수셰프의 특별 대우는 그것과 몹시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일화에 관해 유쾌하지만 추하지는 않은 농담을 가볍게 나누었고, 식사가 끝나면 단출하지만 깔끔하고 세련된 그의 집으로 돌아가 간만의 휴일을 만끽할 계획이었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그러나 직접 드러내 묻기에는 수줍은 듯한 눈빛을 보낼 때 그녀가 바라는 것은 거의 단 하나였다. 입가에 걸린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발라람은 슬슬 계산서를 요청할 심산으로 웨이터를 찾아 돌아보았다.
"발라람."
신호를 잘못 해석한 건지, 애인이 그를 저지해 왔다.
"응."
"저……" 흰 식탁보 너머에서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것 위에 포갰다. "맨체스터로 이사를 올까 싶은데."
오답을 정정하는 건 우등생인 그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일주일 뒤 발라람 카는 알레한드라 데 라 코사에게 청혼했다. 예고 없이 런던으로 찾아온 그를 마주한 알레한드라는 당혹감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발라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만큼 티가 나지는 않았고, 그가 리츠 런던에 방과 식사를 예약해 두었다는 얘기를 듣고 금방 주저하는 기색을 지웠다. 그들은 슬론 스퀘어의 에르메스로 직행했다. 명품관 서너 곳을 돌면서 까다롭게 굴지도 모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알레한드라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마음에 쏙 드는 웨딩 밴드를 골랐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재고가 구비되어 있어 즉시 새 제품을 포장해 나올 수 있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에 발라람은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내 연인의 왼손에 끼워 주었다. 한쪽 무릎을 꿇는 법석은 떨지 않았고, 리츠 레스토랑의 품위 있는 고객들은 딱 요란하지 않을 정도로 박수하며 정중한 축하를 보냈다.
스위트룸에는 샴페인이 마련되어 있었다. 오늘 밤을 기념하기 위해 미리 주문해 두었다고, 알레한드라가 곧 남편이 될 남자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경쾌하고 산뜻한 애정이 가슴을 채웠고, 발라람은 하루쯤 이 정도 사치를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캄란이 저에 대해 말했다고 들었어요."
확실히 조모와 막냇동생은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알레한드라에게는 그런 의심이 단 한 번도 들지 않았었다. 그녀는 수수께끼 축에도 들지 않는 풀기 쉬운 문제였다. 당장은 위안과 확신을 바라는 게 빤히 보였다. 발라람 자신은 결코 알지 못했지만, 여자를 대하는 데 있어 형제들의 태도는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그랬지." 발라람은 뒤를 돌아 그녀를 찾아내고, 어깨를 붙들고, 입을 맞추었다. "그걸 내가 걱정해야 하나?"
품 안에서 연인이 자세를 바꾸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발라람에게 기분 좋은 놀라움을 선사했고, 그들은 밤새 왼손 약지에 낀 결혼반지가 살갗에 스칠 때마다 서늘한 즐거움을 느꼈다.
낙관은 신성이 인류에 내린 선물이었다.
Juan 15:12
남진할수록 뚜렷해지는 계절이 피부로 감각됐다. 후덥지근하지만 버겁거나 눅눅하지는 않은 공기가 착륙하자마자 그들을 에워쌌다. 세비야는 언제까지나 세비야. 십 대 시절이 시작되고 또 끝에 다다르는 동안 수없이 드나든 공항은 점점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실은 그들이 자랐을 뿐이었다.
마지막 마중을 나온 카를로스가 룸미러로 사촌들을 보며 히죽 웃었다.
"너흰 이제 큰일 났다."
운전대를 잡은 사내는 연이은 질문에도 라디오의 볼륨을 키우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대답을 피했다. 졸업식은 잘 마쳤냐고 되물어 왔지만, 알레한드라도 에두아르도도 그렇다는 대답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카를로스는 지난 몇 년간 그래왔듯이 먼저 알레한드라를 집에 데려다주고 에두아르도와 함께 귀가하는 대신 차를 돌려 전혀 다르지만 익숙한 길로 진입했다. 조모 댁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마리아 호세파는 그새 다시금 활력을 되찾고 집안을 호령했다. 모두가 안도했다. 한때는 귀찮고 번거로웠던 간섭과 압제도 이제는 반갑기만 했다. 그녀는 고향에 착륙한 두 손주를 곧장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에게 견진성사를 받게 하는 것이 올여름 그녀의 가장 중대한 목표였다. 바캉스는 금지되었다. 7월 한 달은 성경을 필사하고 교리 교육을 이수하는 시간이 될 터였다.
저항이 결과적으로는 무의미하리라는 것과는 별개로, 손녀로부터 가장 큰 반발을 예상했던 마리아 호세파는 순순히 공책과 필기구를 받아 드는 그녀를 의심스러워하는 눈길로 쳐다보았다.
"레하, 제대로 들은 게냐?"
"네, 할머니. 이번 주일부터 미사 후에 남아서 수업을 듣고 신약 중 한 권을 골라 필사하라고 하셨잖아요."
"당일까지는 수영을 하거나 놀러 다니는 것도 금지다."
"네, 알고 있어요."
안경을 쓰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교정을 활보할 때,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이 그 모습을 꾸며낸 것으로 여기고 우스워했다. 하지만 연기된 자아도 실제의 일부라는 것을 다들 간과했다. 망아지처럼 세비야의 거리를 쏘다니던 어린아이도, 샐쭉하게 관심과 애정을 요구하던 소녀도, 단정하고 현숙한 여인의 흉내도 모두 알레한드라의 가면이며 또 그녀 자신이었다.
필사할 성서는 견진 받을 신자가 자유롭게 택할 수 있었다. 학기 중마다 비자발적으로 냉담해 온 꼴이었지만, 조기에 교육받은 성경의 가르침은 그들 안에 굳건히 존재했다.
에두아르도는 능히 감당할 시험만을 내린다는 구절 때문에 고린도전서를 고려했다. 혹은 장차 나타날 영광에 현재의 고난이 비하지 못한다는 로마서의 말씀도 좋아했다. 하지만 알레한드라가 동일한 책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구절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에 피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알레한드라는 예상 밖으로 요한복음을 골랐다. 에두아르도는 처음의 의향과는 달리 그녀와 같은 것을 필사하기로 정했다. 요한복음은 고린도전서나 로마서에 비해 길이가 두 배는 되었고, 신실함의 표현이 승부의 영역은 아니라고 해도 곧 떠날 그녀에게 양으로라도 뒤지고 싶지는 않았다.
뒤늦게 신앙을 갖게 된 이는 대부모를 따로 구해야 한다지만, 유아기에 세례성사를 마친 그들로서는 자격 요건의 절반은 이미 갖춘 셈이나 진배없었다. 페드로와 올리비아는 알레한드라의, 에밀리아노와 이사벨라는 에두아르도의 대부와 대모였다. 막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병원으로부터의 합격 통지서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알레한드라는 남은 여름을 조모의 지시에 충실히 따르며 보냈다. 8월부터 출근을 요청하는 편지를 받고는 뛸 듯이 기뻤지만, 주변에는 취직처가 정해졌다는 말 외에 딱히 더 부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에밀리아노와 이사벨라는 막내딸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았다. 아들이었다면 무사히 사관학교를 졸업하는 것까지는 바랐겠지만, 이미 첫째 딸로 육아에서 얻을 수 있는 성찰과 성취는 전부 달성한 데다 어릴 적 알레한드라는 당나귀처럼 고집이 세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였기에 이만큼 탈선하지 않고 자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번듯한 직장에 전문직으로 취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외국으로까지 나가겠다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그것도 전부 한때의 일로 치부했다. 부부가 아는 알레한드라는 쉽게 싫증을 내고 곧잘 외로움을 타는 소녀였다. 학교에서는 사촌이 함께였으니 잘 몰랐겠지만, 홀로 타국에서 사회생활을 지속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런던행 편도 티켓을 끊어 주었다.
조모를 따라 요리를 거들거나, 티아 팔로마의 말동무가 되어 주거나, 본가의 방을 정리하면서 주일에는 미사에 참석하다 보면 어느새 7월의 마지막 주.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고해를 통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단계가 필수였다.
고해소 앞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에두아르도는 조금은 따분해 보였고 그러다 이따금 사촌의 존재를 상기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에두아르도는 지난 일 년간 그녀가 그와 고향의 가족들에 관하여 철저히 함구했다는 사실을 알까? 그녀는 늘 사촌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였다. 에두아르도의 비난은 지팡이를 휘두르지 않고도 그녀를 속박했는데, 정작 그 저주를 내린 사람은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이 좁은 방 앞에서도 그녀는 에두아르도가 가족들을 위해 애써 은폐하려 든 정보를, 그들이 집에서도 이방인이자 이단의 힘을 사용하는 삿된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낱낱이 폭로할 거라는 혐의를 벗지 못했다.
문이 열리고 앞선 차례의 신도가 고해소를 빠져나왔다. 무언가 안심시켜 줄 만한 확인의 말을 건네는 대신, 알레한드라는 부러 에두아르도의 시선을 피하며 사제를 독대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촌 남매의 견진성사는 이 가족 내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행사와 같이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연락이 닿는 친족이 모두 모여 그날을 기념했다. 알렉시스와 소피아가 신혼집에 보관하고 있는 가보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번 성사를 위해 빌려 쓴 미사보 역시 아름다웠다. 주교가 성유를 바르기 쉽도록 머리카락은 말끔히 넘겨 묶었고 다 자란 아가씨가 되었다는 친척 어른들의 호들갑에도 얌전히 웃었다.
의식이 끝나자 마리아 호세파는 마음의 큰 짐을 덜었다는 듯이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알레한드라는 그들이 이교의 교육 기관에 재학한 게 그간 조모에게 얼마나 심적으로 부담이 되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마리아 호세파는 또한 케이크 두 판을 직접 구워 모두에게 대접했는데, 하나에는 올리브 가지를 문 비둘기가 그려져 있었고 다른 하나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었다. 어느 케이크가 어떤 사촌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류가 일제히 고대의 신을 부정하고 마법사들이 만든 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그땐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알레한드라는 종종 그녀가 마지막으로 세비야를 떠나왔을 때를 추억하고는 했다. 마리아 호세파가 타계하기까지 말년의 몇 해는 데 라 코사 사람들에게 질곡이 심한 시기였다. 2000년 1월, 모두가 새로운 밀레니엄을 두려워하면서도 열렬히 환영했다. 주현절을 기념하는 에스파냐에서는 신년맞이 행사가 더더욱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간 식구의 수도 늘어 카니발을 구경하러 갈 때 자동차 세 대로는 모두를 실어 나르기에 역부족일 정도였다.
세비야의 사람들은 알레한드라가 런던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중등교육조차 수료하지 못한 그녀가 어떻게 의료인으로 근무할 수 있는지, 그렇게 유능하다면 어째서 사랑해 마지않는 조모의 병을 치료하지는 못하는지 의문했다. 알레한드라는 그 안에 지뢰처럼 매복한 질책을 예민하게 감지했고 오해를 풀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도 일일이 상처를 받았다. 에두아르도만이 그 세계에 근접해 있었는데, 그는 해명을 돕기는커녕 그만하면 됐다고 화제를 바꾸어 알레한드라를 곤경에서 구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더는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도 아니었다. 가족들이 한 방에 모이면, 에두아르도는 당당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군복을 입고 대해로 나아갈 집안의 사내로서 한가운데에 앉아 사관학교 입시를 응원하는 어른들의 격려와 관심을 받기 바빴고, 알레한드라는 문틀에 기대서서 기도를 드리고 캐럴을 부를 때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래도 성탄 주간이 끝나면 어김없이 다음 명절을 기약하며 포옹을 나누고 가족들과 작별했다. 알레한드라는 부모님을, 엘레나를, 팔로마와 카를로스를, 큰아버지 부부를, 알렉시스와 다리오와 그들의 짝을 꼭 한 번씩 끌어안았다 놓아 주었다. 가족 모임이 파하고 부산스레 떠날 채비를 할 때면 부주의하게 한두 명을 놓칠 때가 있는데도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현관에서 모두를 배웅하는 조모는 마지막 순서였다.
"아부엘라." 목이 메어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가 사랑한다는 걸 잊으시면 안 돼요."
마리아 호세파는 그녀가 손수 이름을 하사한 막내 손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레한드라는 그 애의 아버지를, 그 아버지를 낳은 마리아 호세파의 남편을 똑 닮은 얼굴로 조모를 마주했다. 그런데 그녀는 그 계보를, 데 라 코사는 시간의 끝에서도 데 라 코사라는 불변의 진리를 전혀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 연원을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다 지쳐 이채를 잃은 눈동자가 간절히 용서를 구하는데, 무엇을 사해야 하는지 오랜 세월 가문의 현자이자 해결사의 역할을 도맡은 그녀로서도 알 수 없었다.
마리아 호세파의 길고 다난한 삶에 후회는 많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녀는 소녀에게 모험을 허락한 것을 본능적으로 뉘우쳤다.
"그런 소리 마라, 알레한드라." 탄력 없이 흐물거리는 노인의 손이 손녀의 뺨을 쓸었다. "잊는대도 돌아와 이 할미에게 깨우쳐 주면 되잖니."
울음을 삼키고 알레한드라는 힘겹게 거짓을 토해 냈다. "그럴게요."
역사는 늘 사후에 쓰이고 알레한드라에게는 참회의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다. 최악과 차선의 상태를 넘나들던 마리아 호세파는 결국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다. 한평생 남편의 성을 딴 가정을 돌보았고 임종 후 제대로 된 장례 미사를 거쳐 천국으로 승천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전근대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데 라 코사의 계보도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동시에, 시대의 한 장이 런던에서도 반으로 접혔다. 완전 소탕을 목전에 둔 엔드 키퍼의 수용자들은 최후의 일격 삼아 수도에 국지적인 테러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마법사와 비마법사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 수많은 사상자들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목숨을 살릴 수만 있다면 일손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런던 테러는 전 세계 뉴스에도 보도될 만한 사건이었고, 소식은 세비야에도 닿았다. 알레한드라는 장례식이 끝난 뒤에야 겨우 국제 전화를 걸어 당장 런던을 떠날 처지가 되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녀가 포트키와 순간이동을 사용할 수 있는 마녀라는 것을, 바랐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이 또한 에두아르도뿐이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늘 그뿐이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무기 삼아 가족들로부터 알레한드라를 격리하지도, 파묻어 감추고 그녀를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것을 못 본 체하고 그냥 거기 내버려두었고, 알레한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당초 자아가 소멸한 새로운 시대에, 진실 같은 것은 발에 채는 자갈처럼 무가치했다.
마리아 호세파는 끝까지 주관을 관철하며 삶을 마쳤고 간혹 그 사실만이 알레한드라에게 미약한 위안을 제공할 뿐이었다.
어두운 방에서 홀로 추는 춤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모든 여자애들의 로망인 줄 알았는데."
"예쁘장한 원피스는 언제든 입을 수 있어, 캄란. 그에 비해 좋은 남자는 희귀하지."
혼인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웨딩드레스를 예쁘장한 원피스 정도로 축소해 버리는 것도 일종의 결기라면 결기였다. 5월의 맨체스터는 덥지는 않았지만 캄란이 생각하기에 쿠르타와 도티를 착용하기에 좋은 계절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형의 혼례를 위해 그간 열심히 피해 온 전통 복식을 억지로 착용하게 되어 심기가 제법 불편했다. 어린 시절 발라람이 위계질서를 확고히 하기 위해 부당하게 권위를 휘둘렀던 숱한 일화들은 이제 유년기의 추억으로 보아 넘겨 줄 수 있었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한 다리 건너 법률적으로 엮이는 것도 물론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어쩐지 찜찜한 기색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조모만큼은 아니더라도 알레한드라의 부모 역시 믿음이 두터운 가톨릭교도라더니, 온통 사리를 두르고 빈디를 찍은 여인들이 반기는 결혼식장에 들어서면 혼절하는 것은 아닐지 빈정거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짝이는 실로 자수를 놓은 붉은 렝가는 그 언젠가 알레한드라가 무도회의 복식으로 고려했던 선택지처럼 화려했고, 오늘의 주인공에게 무척 잘 어울렸다. 롬인과 북아프리카의 핏줄이 섞인 이베리아 여인답게 그녀는 목과 귀에 건 무겁고 두꺼운 장신구도 자연스럽게 소화해 냈다.
발라람이 여유만만하고 자신감 있는 태도로 하객들을 맞이하는 동안, 알레한드라는 대기실에서 잠시 매무새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그녀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두파타의 위치를 조정했다.
"너도 내가 너무 이르게 결혼한다고 생각해?"
알레한드라가 어깨 너머에 대고 물었다. 누가 또 그런 소리를 했는지 되묻는 대신 캄란은 친구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니, 딱 적당해."
그 순간 그는 탄광에 터뜨린 다이너마이트가 갱도를 뚫듯이, 심층에 파묻혀 있던 오래전의 기억을 연상 작용으로 발굴해 냈다. 신부와 닮은 한 소년이 그녀를 가족에서 제외하기 위해 중얼거렸던 어떤 말을. 아집에 불과했던 그 다짐은 오늘에 이르러 실현되어 비로소 예언의 지위를 취득했다.
"스페인에서는 누가 더 오셔?"
"부모님만. 캄란, 식이 진행되는 동안 그분들을 돌봐 줄 수 있어? 많이 낯설어하실 거야."
"당연하지, 알레한드라."
"네게 스페인어를 가르쳤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신부가 안도하며 한숨과 웃음이 섞인 소리를 냈다. 결혼식에서 긴장을 할 법한 유형이라고는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했을 텐데, 막상 자신의 일이 되면 뭐든 다르게 닥쳐오는 법인 듯했다. 아니면 그저 잘못된 선택을 내렸다는 생각을 놓치 못했을 뿐이거나. 캄란은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둔 지팡이를 무심코 만지작거렸다.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데는 무언 마법보다는 눈치가 크게 작용했는데, 지금은 속내를 파고들기보다는 거짓 위로를 건네 진정시켜야 할 때였다.
스페인 음식점에서 주문할 때 메뉴를 거침없이 읽을 수 있게 된 것을 제외하면 그 수업은 캄란에게 전혀 득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친구를 축복했다.
"결혼 축하해."
"고마워."
알레한드라는 그제야 조금 웃어 보였고, 공들여 빚은 얼굴은 만들어 낸 미소로도 손쉽게 환해졌다.
힌두교 결혼식은 낯설지만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버진 아일랜드에서 보낸 일주일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폭풍전야 같은 평온함이었다.
마법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앞으로 펼쳐질 미래는 싱거우리만치 뻔했다. 종교도 문화도 생활 습관도 맞지 않는 두 사람. 신랑 쪽은 타협의 기미가 전무했고 신부에게는 애초에 비밀이 많았다. 그녀의 화장대에는 미처 부치지 못한 청첩장이 결혼식 전날까지도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부엉이의 발목에 묶어 보낼까 고민하다 결국은 에바네스코를 사용했다. 운전면허를 따고 남편의 입맛에 맞는 식자재로 냉장고를 채우고, 마법사들의 병원으로 출퇴근하기 위해 벽난로가 있는 집을 구하자고 그를 설득하고, 주말마다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가거나 그나마 그녀를 너그럽게 받아 준 시조모와 가까워지려 애를 써 보다 고향에 묻히는 걸 지켜보지도 못한 아부엘라를 떠올리며 남몰래 울음을 터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기어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지금, 불 꺼진 현관에 누워 알레한드라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본다.
세상은 성스러운 어둠을 수복했는데 그녀는 때때로 여기가 어디인지, 그녀가 인생의 어느 시점을 통과하고 있는지 되묻느라 아쉬운 밤을 고스란히 지새운다. 주소지가 분명한 핌리코의 아파트 우편함에는 서명을 독촉하는 서류가 쌓여 가고, 알레한드라는 우편물을 챙기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그 앞을 지나쳐 들어가려다 결국 관리인의 부름을 받는다. 701호의 거주자가 아닌 척 발뺌을 하지만 열의도 없는 얕은 연기는 금세 들통나고 만다. 겉보기는 멀쩡한 청년이 그토록 쉬운 의무에 책임을 지지 않으려 병적인 거짓말을 늘어놓는 모습은 의심을 사고 집주인이 다음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계기가 된다.
자주 사무치는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는데 그런 순간마다 유일하게 변치 않는 사실은 고독만이 그녀의 곁에 있다는 점이었다.
고독은 언제나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밝은 밤에는 공평하게 아무도 그로부터 숨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밤은 다시 옛날처럼 검고 또 어둡고, 누군가의 품으로, 집으로, 고향으로, 도망칠 곳을 잃은 사람은 그녀만이 유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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