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며칠이죠?」
「24일」
「성탄전야네요」
「어떤 시간대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의사가 머뭇거리다 결국 실토했다. 「당신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부상병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잔해로 보건대 폭탄이었어요」 의사는 콧등 위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고쳐 쓰고 말을 이었다. 「송출된 신호를 수신한 함선 중 우리가 유일하게 궤도를 틀어 구조 요청에 응했습니다. 당신은 유일한 생존자였구요」
「그러나 지금은 죽어가고 있군요」
「유감이지만 그렇습니다」
부상병은 고개를 힘겹게 비틀어 움직였다. 시야에 들어온 천장이 새하얬다. 패널 간 이음매가 드러나지 않는 최신식 우주선이었다.
「이 배는 지구연합 산하의 연구기관 소속 함선이에요. 모나코 협약에 의거하여 항해 목적이 학술 연구인 함선 내부는 중립지대이며 저를 포함한 승무원들은 전쟁에 일절 관여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안전은 보장되어 있으며,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곧 북미 대륙에 착륙할 거예요」
「그 정보가 제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건 선생님께서도 아실 텐데요」
부상병이 단축되어 가고 있는 자신의 수명을 넌지시 가리켜 말했다.
「설사 당신이 생존하지 못한다고 한들 제가 결코 당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예요」
의사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배는 순항 중이었다. 아무런 충격도 가해지지 않았는데도 부상병이 갑작스레 신음했다. 의사는 당황하지 않고 링거의 노즐을 돌려 투여량을 늘렸다. 그는 모든 종류의 대인 행위를 곤혹하게 여겼지만, 아파 견딜 수 없어 하는 환자를 대면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다. 그의 머릿속 의학 서적을 펼쳐 증상을 대조하고 마땅한 처방을 내리면 끝이었다. 춤을 추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상대와 호흡을 맞출 필요도, 기분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폭발의 여파로 손등에는 화상을 입었고 뺨은 기체의 파편에 긁혀 자잘한 상처가 났다. 그 밖의 외상은 심하지 않았지만 충격파를 맞고 밀려나며 복부 내부에 출혈이 발생했고, 어딘가에 후두부를 부딪쳐 기절한 정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고통으로 얼룩졌던 얼굴이 점차 느슨해졌다.
「진통제를 투약한 겁니까?」
「그래요」
「한결 낫네요」
「강력한 약물이니까요. 지구에서도 한정적으로만 처방 받을 수 있고, 콜로니에서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는…」
「제게 자비를 베풀었군요」 이번에는 훨씬 노골적으로 부상병이 덧붙였다. 「중독의 위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한부 목숨이니」
「다시 말하지만, 저는 당신을 해하지 않아요」
의사의 장담에 부상병이 가늠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군인이고, 선생님은 제압하기 어려운 상대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절 협박하시는 거라면, 유감이군요…」
의사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부상병의 표정은 위협적이지 않았고 의사 역시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차분하다 못해 평화로웠다. 두 쌍의 시선이 무의미하게 교차했다.
짧은 대치 끝에 부상병은 목덜미의 힘을 풀고 베갯잇에 뒤통수를 편히 누였다.
「내가 아이였을 때 어머니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지난 세기의 노래죠. 어머니는 성가대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신을 믿으셨냐고요? 예, 아주 독실한 분이셨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종교와 신앙이 멸종된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하지만 자라고 난 다음 돌이켜 보니, 어머니는 그저 외로우셨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가족은 어머니와 저, 두 사람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적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떠났을지도요.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친척들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고, 버리거나 숨기셨는지 어느 시점부터는 남은 사진 몇 장마저도 찾아볼 수 없었죠. 우리는 그리 가까운 모자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서로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저와 어머니 모두 수줍음이 많고 내향적인 사람들이었기에 기억 속의 집은 늘 다소 적막했습니다.
하지만 매주 일요일, 성당에 가는 날 아침이면 우리 집에도 제법 활기가 돌았습니다. 어머니는 부지런히 가장 좋은 원피스를 꺼내 입고 제 옷매무새도 점검하셨죠. 그 무렵 새로 부임한 주임 신부님께서는 무척 젊고 훤칠한 분이셔서 기다란 의자가 사람들로 꽉꽉 차 있던 기억이 납니다. 글쎄요. 제 기억 속 어머니의 신앙심에도 그런 세속적인 부분이 관여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포교를 목적으로 일부러 좌초되지는 않았으니까요. 이 자리에 누워 계명과 복음을 줄줄이 읊을 예정은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인류가 언제 처음으로 달에 닿았는지 아십니까? 네, 하늘에 떠 있는 달 말입니다. 맞습니다. 백 년도 더 전이죠.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 사건은 음해하고 의심하길 좋아하는 공상가들의 먹잇감이었지만, 그해 인류가 달에 발을 디뎠다는 건 이제는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 덕에 인류가 달을, 이어서 우주를 정복할 수 있었으니까요. 선생님께서는 달에 가 본 적이 없으시다고요. 그건 신기한 일이네요. 이렇게 좋은 배에 타시는데도요. 하긴, 그곳은 후기 콜로니들에 비해 개발이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여전히 척박한 편이니까요. 관광지로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듬해 한 밴드가 해체했습니다. 인류가 달에 다다른 바로 다음 해의 일입니다. 제 어머니가 믿는 신의 아들보다 유명하다고 주장한, 그 오만마저도 지탄당하지 않고 사랑받았던 가수들이요」
부상병이 작게 콜록거렸다. 의사는 그에게 잔을 건넸다. 미지근한 물을 꿀꺽꿀꺽 삼킨 환자가 한결 개운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 중 가장 재능 있고 인기가 많았던 남자는 끝내 총살당해 죽었습니다. 젊은 나이였죠. 그는 전쟁은 끝났다고 노래했습니다. 인류가 달에 다다르고, 자신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준 동료들과 갈라서고 나서, 그는 평화를 기원했죠. 어머니는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일련의 사건들에, 그들을 향한 어머니의 애정과 역사 사이에 어떠한 거시적인 계획이, 제가 알지 못하는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공상하고는 했습니다. 달 착륙, 해체,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그 가수의 죽음…」
「만족스러운 결론이 있었나요?」
「아니오. 어린 날의 공상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어째서 지금 저에게…」
남자는 죽어가고 있었다. 의사의 진단은 좀처럼 틀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충족적인 예언과도 같은 구석이 있어서, 일부러 그에 맞춘 듯이 환자들의 증상이 달라지기도 했다.
「선생님은 무척 똑똑한 분이지만 두 가지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부상병이 말했다. 「첫째, 제 고향은 지구가 아닙니다. 저는 달에서 자랐습니다. 2세대 콜로니 주민이죠」
부상병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의사가 그의 어깨를 눌러 앉히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병사는 우주에서 표류하다 다쳐 조금 전까지 병상에 누워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무시무시하게 셌다.
「둘째, 이 배는 착륙하지 않을 겁니다」
「그, 그게 무슨 뜻이죠?」
「벗어날 수 없도록 설계되었으니까요.」 부상병이 선체 내부의 벽을 손끝으로 짚었다. 「선생님, 아십니까? 지구군은 강력합니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전략적인 면에서도 늘 우리를 앞서 나갔죠. 그러나 결코 줄일 수 없는 격차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단 한 가지. 바로 시간이었습니다. 대열을 정비하고 전략을 세울 시간이요」
의사가 인상을 찌푸렸다.
「시간은 헬륨-3처럼 내키는 대로 채굴할 수 있는 자원은 아닐 텐데요」
그 말에 부상병이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합니다. 우스운 생각이 떠올라서」
「무엇이 우스우신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을 비웃으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과학 이론에 관해서는 분명 선생님께서 저보다 훨씬 많이 아실 겁니다. 저는 일개 군인일 뿐이니까요. 오히려 선생님께서는 정답에 근접하셨습니다. 시간을 채굴한다. 굉장히 탐욕스럽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무척 독특하고 기발하기도 하고요. 콜로니에도 그 개념을 제시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지구연합 이전 시대에 무차별하게 달의 자원을 독점하려고 했던 국가의 지배적 인종을 닮아서, 군에서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그 핏줄에 헛된 욕망이 흐르는 것이라고 험담하고는 했습니다. 결국은 험담하던 이들이 아니라 그가 옳았던 거죠. 제가 웃은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시공간을 유전이나 광산처럼 다룬다면, 시추 작업은 과연 어디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로서는 모르겠군요」
「우리가 발견한 좌표는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한 차원 이상의 존재가 선생님과 저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군요.
그것은 저와 선생님의 짧은 조우를 들여다보기를 좋아합니다. 우리 두 사람이 우주 공간 안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하도록 만들죠. 저는 이따금 그것이 가난한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수중에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한정적이라서, 같은 인형으로 다른 상황을 몇 번이고 재현하는 어린아이요」
의사가 그려낸 인상은 사뭇 달랐다. 그는 한 영화의 같은 구간을 계속 반복하여 돌려 보는 고독한 관객을 떠올렸다.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듯이….
부상병이 능숙하게 선내에 설치된 홀로그램 재생기를 작동시켰다.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것이 익숙한지 혹은 낯선지, 의사는 판단을 유보했다.
「제가 이 노래에 언제쯤 질릴지 내기를 해볼까요」
안경 너머에서 자색 눈동자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부상병은 의사의 침묵을 판돈으로 받아들였다.
「현명하시군요, 선생님. 실은 이미 한참 전에 질렸거든요」
「…제게 너무 여러 번 들려줬기 때문인가요?」
「아니오. 말했잖아요? 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고요」
부상병이 씩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저 위를 보세요, 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