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 곳곳에는 가시칠엽수가 군락을 이뤘다. 학생들은 응달에 머리만 집어 넣고 앉아 자유로이 햇빛을 쬐다 정교수들이 인도로 지나가면 황급히 다리를 오므리고 허리를 폈다. 졸업 이후의 진로에 대비하여 점잖은 인상을 남기려는 의도였지만, 정작 최후의 평가는 똑바른 자세와 예의 바른 말투가 아니라 성적표의 알파벳으로 결정된다는 걸 그들은 불행하게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
패서디나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북동부의 산림으로부터 미약한 세기로 불어오고 이사라는 그날 아침 빳빳하게 다린 리넨 원피스의 끝자락이 뒤집히지 않도록 무릎을 붙여 걸었다. 마법의 물레로 밀짚을 뽑아 만든 듯한 금발이 어깨 아래로 부드럽게 물결치며 몇몇 행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지만 그뿐이었다. 택시는 그녀를 정문에 내려 주었고, 터무니없이 좁은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동안 이사라를 주요 인사, 요주의 인물, 좋은 첫인상을 주기 위해 노력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다가오는 청년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근래 들어 남편은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래로는 드물게 출현했던 동부 출신의 지식인다운 감정 기복이 한 겹의 내숭조차 두르지 않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돌연한 우울의 이유를 의미심장한 말들로 넘기려 했지만 일상생활에서의 현학성이란 사실 빈 알맹이를 두르는 껍질에 불과했다. 이사라는 곧 그 모든 게 결국은, 인류 역사상 모든 불필요한 갈등이 그랬듯이, 자존심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학과장이 오랜 신의를 저버리고 정교수 자리를 이름 모를 외부 인사에게 냉큼 줘버린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학과장은 '계속 그렇게만 해 나가면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암시'를 꾸준히 남겼을 뿐, 남편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직위를 배정해 주겠다는 약속을 명문으로 남긴 적은 없었다. 그는 교활한 노인네였고 능수능란한 학내 정치로 지금의 위치에 올랐다. 반면에 남편은 탄탈로스처럼 영영 닿지 못할 안정성과 못 다 채운 인정 욕구에 허덕이는 불쌍한 사내였다. 그들은 마치 윤기가 도는 살진 여우와 겨우내 굶주려 털이 다 빠진 사냥개 같았다. 남편은 농락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게임의 규칙에서 언제나 열외인 이사라가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푸념을 주의 깊게 들으며 도시락을 쌌고 양복 안주머니에 새롭게 세탁한 손수건을 개켜 넣었고 남편이 애프터 쉐이브의 냄새를 풍기며 식탁으로 와 앉기 전에 딱 맞게 삶은 반숙 계란과 은스푼 옆에 그날의 신문을 가져다 놓았다. 머지않아 그녀는 남편이 '애송이punk'나 '애새끼brat'라고 부르는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제법 수집할 수 있었다. 그는 나이가 몹시 어렸고, 사교성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며, 교직원과 학과장, 심지어는 총장의 눈치조차 보지 않는데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모두가 그의 천재성을 찬미하며 그 꽁무니를 쫓아다녔고 구멍에서 황금알이 떨어지기를 눈알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전부 남편이 직접 사용한 표현이었다. 이사라는 그 천박하고 외설적인 어휘에 놀랐다. 평소에 그는 아무리 언짢아도 교육받은 중산층답게 점잔을 빼며 고상한 말투로 빈정댔기 때문에, 이토록 원초적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상대가 차라리 부러울 지경이었다.
남편은 그가 솜씨 좋은 이야기꾼이라고 비난했다. 어느 날 불현듯 하멜른에 나타나 마을을 비탄에 빠뜨린 사기꾼이라고 거침없이 폄하하면서도 정작 학계의 신예가 내놓은 논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사라가 그 점에 대해 부드럽게, 남편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도록 에둘러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남편은 다 읽은 신문을 반듯하게 접어 식탁에 내려놓고는 일어나며 자상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들어도 몰라."
그래서 그녀는 무엇 하나 듣지 못한 채로 오늘 저녁 총장이 개최한 교직원 부부 동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한여름의 해는 저무는 와중에도 이글거리며 세상을 비추었다. 연회장에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근사한 아치형의 유리문이 있었고 열린 틈새로 늘어진 버드나무 잎사귀가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사라는 뜻 모를 서글픈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남편이 그녀의 팔뚝에 손을 얹고 그의 동료들, 야망뿐인 얼간이들과 능력 없는 샌님들에게 돌아가며 소개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곧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그들 부부는 아직 정교수와 그 아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캠퍼스 밖의 아파트에 살았지만, 대부분의 나이 지긋한 교수들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사택에 거주했다. 노인들은 사려 깊은 투로 샴페인과 와인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가야 할 두 사람에게 염려를 표했지만, 표피를 파고들면 본질은 권위를 공고히 다지는 데 있었다.
대학에서는 젊은 남교수를 선호했다. 총각보다는 기혼자를 원했고, 아이가 있으면 더 좋았다. 공과대학에는 특히 여교수가 적었다. 그들은 정착할 만한 인물을 찾았다. 투신과 공헌이 작금의 청년 세대에게는 결핍된 미덕이라고 혀를 차면서도 그에 부응하기를 원했다. 내조에 열성인 참하고 얌전한 아내에게는 가산점이 붙었다. 이사라는 자신의 역할을 이해했다. 그는 학자들이 진주만과 원자력과 세계 정세와 반전 시위에 관해 논하는 동안 그녀의 이모뻘인 정교수 아내들에게로 가 가사와 양육의 고충을 경청했다. 그녀에게는 딱히 거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없었지만, 그 편이 오히려 나았다. 눈가와 입매에 주름이 파이기 시작한 여인들은 들어줄 귀를 간절히 필요로 했다. 이사라가 그 역할을 워낙 충실히 수행한 덕분인지 갱년기의 고약한 영향력에서 잠시 해방된 어느 교수 부인이 산뜻하게 낙관했다. "이 자리에 초대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긍정적인 신호 아니겠어요?" 이사라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연한 신호나 전망이 그들 부부를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걸 어렴풋이 예감했다.
노을이 미처 사그라지기 전에 총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아하게 잔을 두 번 두드렸다. 그의 건배사에는 이사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외부로 공유되지 않은 농담이 두어 번 들어갔고, 정부로부터 수여한 지원금과 그걸 가능케 한 업적이 살짝 지루할 만큼 언급되었으며 학계와 대학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는 희망찬 말로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이사라와 그녀의 남편은 다른 나이 든 강사 한 명과 총장실의 비서들과 같은 테이블에 배정되었고, 옆자리에서는 시가와 향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교수 몇 명이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오지 않는 겁니까?"
"누구요?"
"누구긴요, 그 애kid요."
남편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는지 이사라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그네이를 말하는 거야," 그가 짓씹었다. "빌어먹을, 그 꼬챙이 같은 계집을 말하는 거라고."
남편은 그가 여자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이사라는 무심코 그를 학교를 갓 졸업한, 입대를 신청해도 거절당할 만큼 앳된 소년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해진 무릎에 코듀로이 패치를 달고 멜빵바지를 입어도 괜찮을 나이의 남자아이. '애송이'나 '버릇없는 자식' 같은 수식어로는 마땅히 그런 이미지가 그려졌다. 남편이 멋대로 부풀린 것과는 달리 학교의 모두가 신임 교수와 사랑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세력이 비등하게 조성되어 있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연회장 안에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파벌은 이미 나뉘어 있었다. 남편은 건방진 천재에게 홀딱 반한 학과장 대신 그 반 세력의 중심에 있는 교수와 부쩍 가까워져서는 남은 저녁을 보냈다. 듣자 하니 굴러 온 돌이 그 교수가 일평생 진행한 연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이론을 제시했고, 학문에 몸 담은 이들이 여태 지지한 학설을 철회하는 것은 로마인 병사들의 창에 등을 찔려 그리스도의 초상을 두 발로 밟게 된 고대의 교인들보다도 잔혹한 형벌이자 변절이었다. 청중이 그 자신보다도 열렬히 부정해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며 어쩌면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논하는 노교수 앞에서 남편이 열변을 토했다.
"장난하세요, 교수님? 그 녀석은 가짜라고요."
이사라는 양해를 구하고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아무도 그녀에게 눈길을 두지 않았다.
초청되지 않은 사람들은 일찌감치 퇴근했고, 텅 빈 교정에서 유일하게 초대장을 쥔 이사라는 불청객이라도 된 듯 불편한 기분으로 연회장을 빠져나와 건물 안을 배회했다. 대부분의 연구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늘어선 문패에서 남편의 성을 찾는 건 무의미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부재한 건 그녀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녀는 손끝으로 더듬듯이 천천히 낯선 이름들을 읽어나가며 유령처럼 복도를 미끄러져 갔다. 그러다 가장 구석에 처박힌, 정서향으로 창문이 난 방 앞에 멈춰 섰다.
사위어 가는 빛이 창문으로 어스름하게 스며들 뿐이었지만 매일 여명과 황혼의 때에 태양이 얼마나 무덥고 사납고 또 강렬하게 쏟아져 들어올지 상상할 수 있었다. 사무실의 절반은 낡고 닳은 책이 빼곡한 책장이 차지했고, 나머지 절반에는 거대한 칠판이 세워져 있었다. 아랍어 또는 그렇게 보일 정도의 악필로 쓰인 수식이 칠판을 채우는 중이었다. 그 앞에서 백묵을 든 비쩍 마른 여자가 분주히 무언가 적어내렸다. 이사라는 칠판 위에서 세상의 법칙이 날실과 씨실이 되어 짜였다 풀리고 다시 맞물리는 과정을 목격했다.
한참이나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던 방의 주인이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사라는 그 얼굴에서 짜증과 적의를 읽어냈지만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두 발이 이타케 궁전의 침대 기둥처럼 단단히 뿌리 내리는 것을 느꼈다.
"당신 뭐예요?"
눈이 마주치자 부루퉁한 표정에 잠시 금이 갔는데, 그 속에 당혹감과 황당함, 그리고 감추지 못한 성가심이 엉망으로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젊은 천재의 두 눈은 여전히 매정하리만치 형형하고 푸르렀다.
"이봐요. 왜 우는 거죠?"
이사라는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뺨을 훔쳤다. 그녀가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을 떨구며 속삭였다.
"그냥… 아름다워서요."
"아름다운 걸 본 표정이 아닌데요."
아그네이가 무심하게 뱉었다.
"그럼 어떻죠?"
이사라가 물었다. 벌써 물기가 가신 목소리는 차분하고 떨림이 없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아그네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책상 위 잡동사니의 산을 뒤적여 자그마한 물건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손거울이었다. 그녀가 거울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그 안에 한 여자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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