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나날들

Good Times

 

 

  퇴근이 늦어졌다. 경찰이 단속을 돌지 않아 평소 애용하던 뒷골목에 웬 걸인이 상자를 깔고 노숙하고 있던 탓이었다. 푸드 트럭은 아파트 근처 도로변에 세워두기에는 너무 컸고, 뭐든지 과포화된 LA에서 마땅한 주차 자리를 찾는 건 매일 핫도그를 오백 개씩 파는 것보다도 고달픈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숙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던 앙헬은 결국 일곱 블록을 돌아 공용 주차장에 트럭을 대고 걸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니 미아가 부엌에서 열리지 않는 피클 병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녀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앙헬이냐고 소리쳐 묻더니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말을 이었다.

  "라미레즈 부인이 우리 관계를 궁금해 하더라."

  앙헬은 만약 그가 아니라고 대답했다면, 전혀 다른 목소리를 가진 전혀 다른 남자였다면 미아가 어떤 화젯거리를 준비했을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해골을 틀어쥔 야만인 전사처럼 미아가 손목을 한껏 틀어 녹색 병을 비틀며 현관을 향해 불쑥 몸을 내밀었다. 그녀를 본 앙헬이 손을 까딱였고, 미아는 그에게 피클 병을 넘겨주었다.

  "사촌이라고 했어."

  "저런."

  앙헬이 혀를 찼다.

  "왜?"

  "어제 내게도 같은 질문을 하길래 좋은 친구 사이라고 그랬거든."

  "그 능구렁이 같은 여자!" 미아가 소리쳤다. "다 알면서 순진한 척 캐묻다니."

  앙헬이 미아를 향해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들의 이웃 소피아 라미레즈 부인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식빵 안쪽처럼 하얗게 샌 노파였다. 사십 여 년을 파출부로 일하다 지금은 은퇴하고 갓난쟁이 손주를 돌보느라 집에만 머물렀다.

  예순 살도 넘은 노인을 모욕한 혐의를 부인하며 미아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난 경의를 담아 말했을 뿐이야.”

  앙헬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는 뚜껑을 연 피클 병을 조리대에 올려두었다.

  저녁은 볼로냐 샌드위치였다. 납작한 빵 사이에 햄과 치즈를 넣으면 끝인 이 메뉴는 요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간단했다. 일말의 성의 표시로 미아는 양배추를 씻고 피클을 얇게 저며 햄과 치즈 사이에 끼웠다. 식도락에 조예가 없는 그녀로서는 그렇게 해야 빵이 젖지 않아 좀 더 먹음직하다는 앙헬의 조언을 듣고 기계적으로 따를 뿐이었다. 그마저도 앙헬의 귀가가 조금 더 늦어졌다면 병뚜껑을 붙들고 고군분투하다 포기해 한층 더 빈약한 식사가 되었을 예정이었다.

  미아는 접시를 앙헬에게 밀어주었다. 앙헬은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물었다. 정직한 맛이었다.

  지난 몇 달간, 앙헬은 이웃에서 동거인으로 지위가 격상된 여자에 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일단 미아는 오랫동안 홀로 생활한 것치고, 뭐랄까, 섬세함이 부족했다. 보수적으로 표현하자면 어머니의 부재가 느껴졌다. 자신을 돌보는 데 필요한, 사소하지만 필수적인 정성을, 공들여 일상을 가꾸는 법을 미아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함께 중고 트럭에 몸을 싣고 LA로 와 노스 할리우드의 허름한 다세대 주택에 자리를 잡은 뒤, 미아는 다운타운의 미용실에 일자리를 얻었다. 학창 시절 여자애들끼리 화장실에서 장난 삼아 서로의 머리를 다듬어주며 기른 실력이란 걸 고려하면 미아는 재능이 있는 축에 속했지만, 이력서에 친구의 앞머리를 잘라주었다거나 볼링장에서의 긴 근무 경력을 적을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거의 무급으로 미용사 보조 일을 시작했다.

  "그거 알아? 정부들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이 미용사와 여대생이라는 거."

  언젠가 미아가 농담했었다. 앙헬은 그녀가 그런 방식으로 자조하는 버릇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어쩌면 어떤 여자들은 정말로 그렇게 길러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들의 애인으로.

  라미레즈 부인에게는 왜 거짓말을 했냐고 묻자 미아는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확실히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었다. 남녀가 사귀면서 동거를 하는 건 그럴 듯하지만, 그런 관계가 아니면서 함께 사는 건 이상하다는 게 미아의 지론이었다. 그녀는 천박해 보이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도 두 사람은 가끔 섹스를 하기는 했다. 한쪽이 요청하면, 다른 한쪽은 응했다. 물론 기분에 따라 거절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 방향으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쪽은 거의 항상 앙헬이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 거절이 그들 관계를 뒤바꾸지는 않았다.

  미아가 두려워하는 천박함이 무엇인지 앙헬은 상상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건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과정도 아니었다. 미국에는, 특히 로스앤젤레스라는 별천지에는 사방에 그러한 선전이 넘쳐났다. 한껏 컬을 넣은 샛노란 머리카락, 희고 보송보송한 뺨, 풍만한 가슴, 소다 위의 버찌 장식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아테네 신전의 무녀 의상을 가장 세속적인 방식으로 수선한 듯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거리를 거닐며 다이아몬드만이 진정한 친구라는 노래를 불렀다. 신사들은 한 손으로는 그녀들을 희롱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틈틈이 시가를 피우고 주식 시장과 세계 정세와 다가오는 마지막 사반세기의 끝을 점쳤다. 천박함, 그것은 가난과 민낯의 동의어였다. 더 풍요로운 삶, 더 나은 삶은 곧 더 자본주의적인 삶을 가리켰다. 미국인들이 사용하는 사전은 쿠바인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게 분명했다. 좁은 동네를 벗어난 미아가 나날이 미국인 여자답게 행동할수록 앙헬은 더욱더 고향이 그리워졌다. 때때로 미아의 그 강박적인 공포가, 감출 것도 없으면서 그 빈 알맹이를 들킬까 봐 겹겹이 포장을 두르는 행위가 그에게도 전염되는 병처럼 느껴졌다.

  "그분은 가톨릭이시잖아."

  미아가 덧붙였다. 앙헬은 입가에서 빵 부스러기를 떼어내며 물었다.

  "누구?"

  "라미레즈 부인 말이야."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미아가 눈을 굴렸다. "이제 분명 우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할 거야."

 

 

*

 

 

  앙헬의 생일에 그들은 파티를 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고 초를 부는 유의 파티가 아니라, 현관문을 활짝 열어 고정하고, 붐박스로 N.W.A의 시끄러운 음악을 틀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오색의 빛을 쏘는 구 모양의 파티용 조명을 켜고, 드나드는 누구에게나 하이네켄 케그 두 통과 피자, 핫도그, 나초, 보드카를 섞은 하와이안 펀치를 빨간 플라스틱 컵과 종이 접시에 덜어주는 그런 파티였다.

  같은 건물에 사는 이웃들이 오가며 축하를 건넸고, 미아의 미용실 동료들과 앙헬의 단골 손님들도 여럿이 찾아왔다. 관리인은 너무 늦게까지 소란을 피우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평소 그들이 모범적인 세입자였기 때문에 크게 간섭하지는 않았다.

  집이 워낙 좁아서 손님들은 거실이나 부엌에 자리를 잡는 대신 술과 음식을 챙겨 복도로 나갔다. 집에는 중고 텔레비전과 미아의 금반지를 제외하면 귀중품이랄 게 딱히 없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안방 문을 잠그고 그 앞을 지키고 서서 좀도둑이나 흥분한 커플들을 돌려보냈다.

  앙헬은 ‘생일 소년‘이라고 적힌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란 바탕에 구름, 하트, 별 등 갖가지 모양의 풍선이 그려져 있었고, 테두리에는 진홍색 술이 달려 있었다. 스무 살은 더 어린 소년들을 위한 제품이어서 턱 아래로 고정하는 끈이 너무 짧았고 맥주를 마시려고 입을 벌릴 때마다 귀가 아프다고 앙헬이 불평했지만 그가 몰래 고깔모자를 벗으려 할 때마다 미아가 나타나 큰소리로 주의를 줬다. 그러면 이미 얼큰하게 취한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앙헬에게 야유했고, 그는 결국 항복 자세를 취하며 모자에서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네.”

  앙헬이 맥주를 홀짝이며 중얼거렸다.

  “대학에 다녔어?”

  미아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말 안 했었나? 했을 텐데.“

  앙헬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 했어.”

  미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앙헬은 그녀가 분명 토라져 심기가 불편하다는 신호를 보내리라고 예상하고 변명을 준비했으나, 놀랍게도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앙헬이 솔직하지 못하다거나 그녀를 지속적으로 기만한다고 비난하는 대신 미아는 들고 있던 잔을 비우고 맥주를 더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미아를 기다리는 동안 앙헬은 입을 틀어막고 다급히 화장실을 찾는 청년 하나를 복도로 내보냈다. 화단에 축축한 토사물이 낙하하는 소리와 봉변을 당한 아래층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문 너머의 소동을 지켜보며 앙헬은 웃음을 터뜨렸다. 마이애미에 도착한 첫 해에는 친척들과 생일을 기념했다. 그때 그는 미국으로 옮겨온 지 고작 서너 개월 밖에 지나지 않은 터라 은은한 슬픔과 향수에 잠겨 있었다. 마이애미의 친척들을 통해 그는 기억 속의 고향을 재현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첫 해가 한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아바나의 쿠바인들과 마이애미의 쿠바인들은 닮았지만 전혀 다른 종족이라는 걸 깨달아갔다.

  돌아온 미아의 손에는 버드와이저 두 병과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생일 축하해."

  그녀가 맥주와 상자를 동시에 내밀며 말했다. 앙헬은 야바위꾼의 동전이 든 종이컵을 고르려는 사람처럼 미아의 두 손을 번갈아 리드미컬하게 건드리다가 그녀가 눈썹을 들어올릴 즈음 상자를 골랐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터키석색 상자에는 흰 레이스 리본이 묶여 있었다. 앙헬은 포장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장미묵주가 들어 있었다.

  앙헬이 고개를 들고 미아를 보았다. "와. 이건 그러니까… 음."

  석영으로 빚은 새끼손톱만 한 장미 구슬은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산호색이었다. 가운데에 걸린 십자가는 금이었고, 그 위에 못 박힌 예수도 얼굴이나 의상이 뭉개지지 않고 제법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알아. 청바지나 한 벌 새로 사 주는 게 나았겠지. 하지만 그냥…." 미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내가 주는 선물이니까, 내가 주고 싶은 걸 줘야지. 안 그러니?"

  "네 말이 맞아, 미아. 고마워." 미아가 방어적으로 주절거리는 동안 예의 바르게 반응할 여유를 찾은 앙헬이 씩 웃었다. "정말 예뻐. 너 감각이 좋구나."

  미아가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질렀다. "네가 기도 드리는 걸 본 적도 없지만, 그건 우리가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공통점이니까…." 그녀가 선물을 도로 낚아채기 위해 손을 뻗었다. "나쁜 생각이었어. 그냥 잊어버려."

  "아냐. 정말로 마음에 들어." 앙헬은 미아의 손아귀를 피해 묵주를 주먹 안으로 감췄다. 그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아 이렇게도 덧붙였다. "진짜 금이야? 깨물어 봐도 돼?"

  미아는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고 말았다. "너 지금 얼마나 불경한 발언을 한 건지 알아?"

  손바닥 안에서 자그마한 장미 구슬을 굴리며 앙헬이 대꾸했다.

  “뭐 어때? 라미레즈 부인은 이미 우리를 싫어하시는데.”

 

 

*

 

 

  잠재적 거래자가 트럭을 점검하는 동안 미아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서서 인내심을 발휘했다. 비좁고 허름한 뒷골목에는 출처 모를 오물이 군데군데 고여 있었지만, 이 장소가 불편하다는 기색을 드러내 봐야 그녀에게만 불리할 뿐이었다.

  "이 트럭, 본 적이 있는데. 차이니즈 극장 앞에서 말이야."

  차 주변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온 사내가 부루퉁하게 말했다.

  "젊은 남자가 핫도그를 팔고 있었지. 그래, 상호도 그대로군."

  그가 트럭 측면에 인쇄된 강아지 캐릭터를 가리켰다. 반으로 가른 핫도그빵 사이에 닥스훈트 한 마리가 배를 발라당 까고 드러누워 있는 그림으로, 미아는 전부터 그 로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그 그림은 조잡하고 비속한 취향의 집합체였다. 배알도 없는지 눈을 접어 웃는 표정 하며 혀를 삐죽 내밀고 헥헥거리고 있는 것까지, 세련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사내가 제기하고자 하는 의혹이 무엇인지는 미아 역시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사후에 귀찮은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 물건은 거래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지만, 실은 사내에게 필요한 건 아주 작은 실수 하나에 불과했다. 미아의 단어 선택이나 표정에서 장물이라는 낌새가 보이면 그 순간 바로 가격을 후려치려는 심산이었다. 그는 미아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미아는 비스듬한 자세를 고쳐 서서 침착하게 대답했다.

  “앙헬을 아는군요. 그와 나는 동거 중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곧 북부로 떠날 예정이고, 자금이 필요해서 돈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 처분하고 있죠.“

  그녀가 무엇인가 암시하려는 듯이 한 손으로 허리를, 다른 한 손으로는 납작한 배를 짚었다.

  “새 출발을 하려고 하거든요.”

  삼십 분 뒤 미아의 손에는 지폐 다발이 들려 있었다.

  열쇠를 넘겨 받고 트럭 운전석에 올라탄 남자가 종이 봉투에 차 안에 있었던 물건들을 쓸어 담아 내밀었다. 차 안에 비치되었던 앙헬의 소지품은 무게가 얼마 되지 않았다. 끽해야 주차 위반 딱지나 자일리톨 껌 따위가 들어 있겠거니 싶어 미아는 그것을 곧장 봉투째로 길가의 쓰레기통에 처박으려다 마음을 바꾸고 챙겨 들었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선 밸리로 향했다. 품 안에는 막 액수 확인을 마친 수천 달러가 들어 있었지만, 택시를 타는 사치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 누가 그녀를 보고 그런 거금을 소지 중일 거라고 예상이나 하겠는가? 집에서 나오기 전 미아는 짐가방에 최대한 간소하게 짐을 꾸렸다. 그녀가 좋아하는 옷가지 몇 벌과 화장품 조금이 전부였다. 금반지는 일찌감치 전당포에 맡겨버렸다. 그 돈의 일부는 앙헬의 생일 선물에 쓰였다. 유행은 매년 바쁘게 달라졌으므로 그녀가 아버지의 집에서 도망칠 때 가져온 아끼던 옷과 지금 앙헬을 버리고 떠나며 가져온 옷은 거의 겹치지 않았다. 그녀가 단출한 재산 목록에서 그나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대상은 현금이 다였고, 그마저도 물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갖는 힘에 의지할 뿐이었다.

  로스앤젤레스 북부 외곽의 선 밸리에는 거대한 폐차장이 있었다. 폐차를 명목으로 뒤가 구린 거래가 자주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미아의 직장 동료 해나의 오빠 코너가 그곳을 운영했는데, 미아도 술자리에서 그를 몇 번 마주쳤었다. 땅딸막하고 다부진 아일랜드계 남자로, 몸에서 늘 기름과 술 냄새가 났지만 명문대 출신의 남자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만만한 태도에 특히 굳은살 박인 단단한 손바닥이 제법 인상 깊었다.

  농담 몇 마디를 주고받은 끝에 코너는 그녀에게 약속했던 차를 내어주었다. 타이어 휠 캡과 범퍼에 거친 주행의 흔적이 남은 반면에 번호판은 반짝거리는 새것이었다. 거래를 증빙할 서류는 없었다. 차내에서는 강렬한 세제 냄새가 났다. 차에 올라탄 미아가 참지 못하고 창문을 내리자 코너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차가 필요했거든."

  미아는 더 묻지 않고 금액을 지불했다. 코너가 그와 약간의 시간을 보내는 대가로 넉넉한 할인을 제안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이제 그녀는 그런 편법으로부터 멀어지기를 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단언컨대 삶은 이대로도 좋았다. 매일매일이 평화롭고 안정적이었다. 때때로 그녀는 앙헬과 결혼을 한다면 어떨지 상상했다.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는 하겠지만, 만약 간곡히 부탁하거나 협박한다면 그가 수락할 수도 있다고 그녀는 결론 내렸다.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으나 그가 원한다면 두어 명 정도야 낳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다소 빠듯한 살림으로도 그들은 잘해나갈 수 있었다. 절약하고 저축하고, 대출을 받아 집을 옮기고, 아이는 나날이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동시에 미아는 그녀가 결코 그렇게 살아가지는 않으리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잊어버리지 못했다.

  관성을 따르지 못하는 충동을 그녀는 타고났다. 미아는 자신이 그냥 그렇게 되어 먹은 존재라고 믿고 싶었다. 아주 못된, 구제불능인, 제정신이 아닌 소녀. 원하는 걸 줄 수 없는 남자에게도 관심을 바라는 외로운 여자. 자신이 그런 삼류 통속 소설의 안타고니스트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한결 쉬워졌다.

  예컨대 지난 일 년간 그녀를 재워주고 먹여준 남자의 트럭을 훔쳐다 파는 짓이라든가.

  심지어 앙헬과 그녀는 그저 호스트와 식객의 관계도 아니었다. 그들은 친구였다. 앙헬의 말에 의하면, ‘좋은’ 친구 사이였다. 미용실에 취직한 날, 이로서 어느 늙어빠진 마피아 보스의 옆구리를 차지하는 꿈에 한발 더 가까워졌다고 그녀가 농담했을 때도 앙헬은 동조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보란 듯이 찬장에서 와인을 꺼냈다.

  "새 출발을 위해."

  앙헬이 잔을 들었다. 건배사는 감상적이었고 술은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였지만, 그래도 축하는 축하였다.

  미아는 잔을 기울여 앙헬의 것과 살짝 맞부딪쳤다. 새 출발이란 과거의 삶을 뒤로 하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과거의 삶이란,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세워온 계획, 부친을 죽이고 그 보험금을 타서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겠다는 계획을 가리켰다. 양말 속에 숨겨둔 지폐를 전부 양도한 이후로 앙헬은 그날 밤의 일, 그녀가 용기내 공유한 살인 모의를 입에 올린 적은 없었으나 때때로 이렇게 은근히 그녀가 뒤돌아보지 않을 것을 약속하게 했다.

  데이트가 있는 날에, 미아는 아침과 점심을 굶고 (사실 그건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저녁에 만난 남자에게 모든 대가를 지불하도록 내맡겼다. 데이트가 없는 날이면, 그녀는 앙헬의 냉장고와 찬장 속 식료품을 축 냈고 (그 역시도 아주 적은 양이었다) 방의 주인과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블록버스터 비디오에서 빌려온 <블루 라군>이나 <죠스>, <구니스> 따위를 보는 걸 멋대로 데이트로 쳤다.

  이사 첫 달, 앙헬은 약속대로 미아에게 월세를 받지 않았다. 다음달, 그 다음달도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미아가 매일 아침 앙헬보다 이르게 출근을 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금전적인 문제로 전혀 눈치를 주지 않았다. 이따금 그녀가 마트에 들러 장을 보거나 세탁소에 맡긴 옷을 한꺼번에 찾아오며 대금을 치를 때는 있었지만, 그 비용은 월세에 비하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정식으로 룸메이트를 들였다면 앙헬은 수백 달러를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고 그가 입고 있는 손해에 진심으로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패트리샤가 그녀를 보면 뭐라고 할까? 아마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고, 미아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이 창녀!"라고 외치겠지. 그러고는 그게 아주 유쾌한 농담이라도 되는 양 깔깔 웃어대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럴 수 없어서, 그녀의 옛 절친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려서 유감이었다.

  사실 미아가 받는 급료는 앙헬이 아는 것보다는 많았다. 그녀가 일부러 금액을 낮춰 말했기 때문이었다. 액수를 듣고 앙헬은 놀란 듯이 "오."라고 말했고 입을 다물었다. 미아는 그 쥐꼬리만 한 숫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행동했고 그건 앙헬도 마찬가지였다. 미아는 다시금 앙헬이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앙헬의 그런 태도는 미아에게 모순된 신호를 보냈다. 데이트를 하면, 앙헬은 쾌활하고 정중했다. 그는 좋은 대화 상대였고, 대부분의 남자들과는 달리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적어도 그런 시늉을 했고, 적절한 농담을 할 줄 알았다. 그는 아마도 미아를 속물적인 여자라고 생각할 테지만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다. 미아가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럽게 태도를 바꾸어 가며 캐물어도 그는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고 짧은 논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그녀를 친구로 대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의 사촌 동생이 그들 마을로 찾아왔을 때, 몇몇 순간에 앙헬은 낚싯줄처럼 투명하고 길고 가늘고 질긴 인내의 끈을 놓아버린 것처럼 분명히 그녀를 비웃었다. 그건 라운드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래, 덤벼 보시지, 챔피언.' 미아는 생각했다. 맞은편에서 크리스토발이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부산스럽게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이 싸움과 링 위의 대적자에게 몰려 있었다. 어쨌거나 복싱이란 오직 둘만의 경기가 아니었던가?

  만약 앙헬이 그날 밤 술자리에서 코웃음을 치지 않았다면, 폴리스 라인 너머로 그녀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그녀를 따라 집으로 오지 않았다면, 미아는 그에게 자신의 계획을 실토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서 결점의 가능성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그녀는 그를 순순히 놓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면 앙헬은 미아를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던 인연으로 기억할 수도 있었다. 그의 삶을 망치지 않는 것, 그녀에게 휘말려 곡절을 겪게 하지 않는 것, 한때의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것, 그 기회야말로 미아가 앙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동등하고 공정한 거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를 등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세상은 애초부터 그녀에게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녀의 관점에서는, 테이블 아래에서 가벼운 수작을 부려 점수 격차를 아주 조금만 줄이는 게 그리 나쁜 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틀렸다. 앙헬은 다분히 신사적이었다. 그는 약속을 지켰다. 다시는 그날 밤처럼 도발하지 않았다. 미아가 그녀의 아버지를 해하려 했듯이 그에게도 같은 마음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아서가 아니라 그녀를 존중해서였다. 그리고 미아는 앙헬의 그 배려와 인내를 마주할 때마다 부끄러워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앙헬은 미국인이 아니었고, 따분하고 권태로운 청소년기를 보내지도 않았고, 부모의 방치에 익숙한 애물단지 외동딸도 아니었다. 그는 쿠바에서 나고 자란, 가슴에 열정과 음률을 품은, 양친의 애정을 듬뿍 받아온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이따금 동침할 때면 미아는 먼저 잠든 앙헬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앙헬은 수면 중에도 습관처럼 옅은 미소를 띠어 얼굴에서 보조개가 지워지지 않았다. 패트리샤의 첫 남자친구에게도 보조개가 있었다. 영악하고 잘생긴 소년이었다. 대외적으로 그들은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는 커플이었고 서로에게 충실했으나 미아는 가끔 그 애와 은밀한 눈짓과 농담을 주고받고는 했다. 그의 자의식을, 남자가 되어가는 중인 소년의 오만과 만용을, 그와 나누는 배신과 변절과 공모의 짜릿한 감각을 미아는 제법 좋아했었다.

  미아는 조심스레 앙헬의 뺨을, 볼우물을, 입술선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따끈따끈하고 무방비했다.

  앙헬을 배신하는 일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그녀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비하고자 했던 것보다도… 정말이지 너무나도 쉬웠다. 그래서 공포스러웠다. 그게 그녀의 천성인지 혹은 그녀가 앙헬의 회복 탄력성을 믿어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전자라면 그녀는 잔혹했고 후자라면 그녀는 비열했다.

  캘리포니아를 벗어나기 전에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채웠다. 식욕이 없어 미지근한 이온 음료만으로 배를 채웠다. 미아는 졸음이라도 쫓을 셈으로 껌을 찾아 조수석에 종이 봉투를 뒤집어 엎고 앙헬의 트럭에서 나온 물건을 뒤졌다. 예상대로 내용물은 별것 없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끼워 주는 작은 케첩, 구겨진 영수증 서너 장, 포장을 뜯지 않은 커피 맛 아몬드 한 봉지… 그리고 묵주 한 벌.

  생일 파티 이후로, 앙헬이 그것을 착용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미아는 상심하지 않았다. 그는 장신구를 즐겨 착용하는 남자도, 신앙심이 유별하게 깊은 남자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앙헬이 그녀를 배려한답시고 원치도 않는 제의 도구를 걸치고 다녔다면 그게 미아의 자존심에 더 깊은 상처를 입혔을 것이다. 미아는 의식적으로 신경을 껐고, 얼마 뒤에는 그녀조차도 정말로 묵주에 관한 건은 잊어버렸다.

  앙헬은 그것을 룸미러에, 혹은 기어봉에 걸어두었을까? 그가 늘 주차하던 그 골목에서 트럭을 끌고 나서 시내로 진입하는 출근길에서, 언덕을 오르내리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작은 황금색 십자가가 달랑달랑 흔들렸을까?

  어둠 속에서 미아는 핸들을 붙잡고 앉아 눈물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울어야 하는 장면이라는 걸 알았지만 눈가는 건조하기만 했다. 성과 없는 기다림 끝에 그녀는 묵주를 다른 잡동사니와 함께 글러브박스에 쑤셔 넣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깨어나면서 차체가 가볍게 부르르 떨렸다. 기분 좋은 진동에 미아는 잠시 우울감을 잊었다.

  그녀는 액셀을 밟았고, 차는 부드럽게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애리조나의 해방

A Day Off in Arizona

 

 

  타성을 거부하는 요란한 소리가 허공을 찢었다.

  거실 창의 블라인드 틈새로 밖을 내다본 동생이 어떤 미친 여자가 그들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경적을 울려댄다고 투덜거렸다. 다나는 정수리에 벼락이 내리꽂히는 감각을 느끼며 반사적으로 튀어 나갔다.

  진입로에는 새빨간 포드가 세워져 있었다. 픽업은 아니었고, 머스탱이었다. 크나큰 도약이었다. 다나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너, 이 동네에 다나 리라는 이름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손에 잡히는 전화번호부를 전부 뒤졌어."

  운전석에서 거만한 목소리와 함께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다나가 말없이 다가가자 운전자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너무 가까이 오진 마. 잠을 많이 못 잤거든."

  그렇게 말하며 운전자가 선글라스를 들어올렸다. 얼굴이 엉망이라는 경고는 입버릇에 가까웠지만, 드러난 눈가는 확실히 푸석푸석했다.

  "왜? 국도 근처의 모텔은 네 수준에 안 맞았어?"

  여자의 등장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워서, 다나는 빈정거리면서도 눈앞의 풍경이 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랐니? 차르의 침실도 내 수준에는 안 맞아. 그만 타지그래?"

  미아가 뻔뻔하게 맞받아쳤다. 그제야 다나는 머뭇머뭇 차에 올라탔다.

  일 년 전, 다나가 파견 근무지에서 애리조나로 돌아갈 때 그녀는 미아에게 전화번호와 주소를 주었다. 미아는 곧 이사를 갈 계획이기 때문에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면 교류할 수 있는 연락처를 남기겠다고 답했다.

  물론 리 가족의 집에 캘리포니아로부터 장거리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없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졌다는 게 단순히 다나를 핀잔하기 위한 핑계가 아니라면, 미아는 헤어지기 전 다나가 건넨 쪽지를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지난한 나날이 흐르고, 다나가 돌발적이고 획기적인 사건의 발생을 포기할 즈음 한마디 예고도 사과도 없이 대뜸 문간에 나타나는 건 제법 미아다운 전략이었다.

  다나가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미아는 익숙하게 차를 몰아 인근의 한 다이너로 그녀를 데려갔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었다. 직원이 다나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어머니뻘의 중년 여성은 다나가 초등학생, 중학생일 적에도 이곳의 매니저였다. 그녀는 미아에게도 못 보던 얼굴이라고, 다나의 친구냐고 말을 붙였다. 그제야 다나는 자신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의 배경에 미아가 침입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불안해져 미아가 무어라 답했는지도 듣지 못했다. 얼빠진 다나를 두고 미아가 잠시 수다를 떨다 독단적으로 메뉴를 골랐다. 직원은 친근하게 주문을 받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음식은 빠르게 준비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치즈버거와 감자튀김, 오믈렛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미아는 밀크쉐이크에 빨대를 꽂아 다나에게 건네고 그녀 자신은 기본으로 제공되는 커피를 홀짝였다.

  "이제 스무디는 안 팔아?"

  그 질문에 당당히 아니라고 대답할 수만 있었다면! 어차피 미아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거짓말을 했다고 한들 그녀가 그 근방의 로라스 스무디 지점에 들러 다나의 근무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러나 망설이는 사이 미아는 이미 사실을 간파한 듯했다. 그녀는 여유롭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감자튀김 하나를 집어 다나의 밀크쉐이크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고작 일 년밖에 안 지났어. 그새 백만장자가 됐을 리는 없잖아."

  다나는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고작 일 년이지.”

  미아가 위로하듯 부드럽게 말했다. 다나는 기분이 팍 상해 말없이 빨대로 밀크쉐이크를 휘저었다. 소리굽쇠 형태의 유리잔에는 세로로 옴폭한 줄이 파여 있었고, 그 고랑마다 결로가 맺혀 흘러 손가락이 축축히 젖었다. 갓 내어졌을 때의 갈린 아이스크림과 얼음의 걸쭉한 질감은 벌써 다 녹아 사라지고 질펀한 흙탕물처럼 변했다. 식탁 위의 음식은 반절도 넘게 남아 있었지만, 두 소녀는 이미 포크를 놓고 등받이에 기대어 식사를 마쳤음을 드러냈다. 미아가 정말로 배가 고프지 않은 건지 아니면 그녀 앞에서마저도 내숭을 떨고 있는 건지 다나는 의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음식을 먹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는 딱히 식사를 함께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나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들이 구색뿐인 친구 사이라는 걸 잊은 적이 없는데도.

  "앙헬은 잘 지내?"

  혼란스러움을 상대에게 전가하기 위해 다나가 불쑥 물었다. 질문을 뱉는 순간에는 그게 미아를 급습할 수 있는, 아주 기발한 공격인 것 같았다.

  "왜? 그가 그립니?"

  그러나 기습은 유효하지 않았고, 돌아온 반응은 태연했다. 반사적으로 펄쩍 뛰며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다나는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앙헬과 나는 친구니까,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할 뿐이야."

  스물세 살이 되어서 뒤늦게 누가 누구와 친한지, 방학에도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금요일 밤 파티에 초대 받았는지 겨루는 십 대들의 놀이에 끼어든 것 같아 유치하고 민망한 기분으로 다나는 지레 수그러들었다. 고등학교라는 무대는 미아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청소년기의 좁은 울타리 밖에서 미아는 무력했지만 방금 전의 발언으로서 다나는 그녀의 목을 손수 베어 쟁반에 담아 미아에게 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미아가 얼마나 재빠르게 상대의 약점을, 학창시절 무리에 어울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미처 지우지 못한 슬픈 부외자의 냄새를 알아차리고 조롱할지 가늠이 되지도 않아 다나는 한껏 긴장했다.

  모호한 표정으로 미아가 대꾸했다.

  “나도 잘 몰라.”

  다나는 머뭇머뭇 고개를 들었다.

  “여태 함께 지냈다며?”

  “하지만 지금은 떠났잖아. 이 얘기는 그만하자.”

  미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표정과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앙헬이 왜 나를 LA로 데려갔을 것 같아?"

  예상치 못한 수수께끼 앞에서 다나가 멍청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을 뱉었다.

  "사귀는 게 아니었어?"

  미아가 코웃음을 쳤다. "설마. 걘 내가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를까 봐 걱정했을 뿐이야. 일종의 보호관찰이었던 거지."

  무시무시한 일. 그 두 어절에 다나는 전율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미아가 말했다.

  "다나, 나와 같이 가자. 내겐 조력자가 필요해."

  미아의 손바닥이 테이블 너머 다나의 손등을 덮었다. 여전히 그녀보다 작고 가냘픈 소녀의 손이었다.

  "왜, 왜 당연히 내가 너한테 협조할 거라고 생각해?"

  다나가 흠칫 떨며 팔을 뒤로 뺐지만, 미아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하게 손아귀를 쥐었다. 그녀가 새어나오는 비웃음을 참으려는 듯이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

 

 

  식당에서 나온 미아는 이 동네는 상상 이상으로 보잘것없고 그녀가 묵을 만한 숙소조차 없기 때문에, 다나가 그녀를 집에 데려가 하룻밤 재워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그들의 약속임을 상기시켰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미아가, 애리조나에서는 다나가 소파를 내어주기로 했었다고. 오전에 리 가족의 집에 미아가 찾아왔을 때 그녀의 머리카락은 말끔히 빗겨져 있었고 여느 때처럼 화장도 완벽히 마친 상태였으며 차에서 노숙을 한 것처럼 옷이 구겨져 있지도 않았다. 숙소를 구하지 못했다는 건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다나는 결국 미아가 그녀를 따라 집에 발을 들이도록 허락했다.

  다나의 부모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환영했다. 다나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일 년 전 출장에서 돌아온 딸아이와 그녀의 소꿉친구가 알 수 없는 사유로 급격히 멀어진 뒤로, 리 부부는 타지에서 그들의 딸에게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해왔다. 그러나 그곳에서 새로 사귄 친구는 에이미만큼이나 예쁘장하고 살가운 여자애였다. 리 부인이 봤을 때는 오히려 에이미보다 예의가 바른 것 같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미아 디안젤로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서부 해변 사람들 특유의 낙천적이고 쾌활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정치적으로는 다소 신랄한 발언으로 리 씨와 논쟁을 벌였지만 불쾌한 충돌로 끝날 수위는 아니었으며, 다나의 남동생이 던지는 짓궂은 농담에도 재치 있게 대응했다.

  다나의 소감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집에 데려온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는 미아는 상대의 약점을 꼬집어 놀리기를 즐겼고 지나가는 남자와 추파를 주고받거나 시들어가는 이파리처럼 따분한 얼굴로 대걸레를 밀거나 플라스틱 컵에 탄산음료를 따르는 여자였다. 그녀는 결코 또래 친구의 보호자들에게 호의적으로 인식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밤 미아는 심지어 얇은 가디건을 입고 와서는 두 팔의 문신까지 가렸다! 대체 의중이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다나는 이 기괴한 연극에 입맛을 잃고 포크로 접시를 미적미적 뒤적이다 중학생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양친에게 한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그 옆에서 미아가 발랄하게 웃으며 다나의 편을 들었다.

  다나는 식탁을 밀치고 일어나 당신들이 상대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고, 이 여자애와 내가 출장지의 호텔방에서 무얼 하며 뒹굴었는지 감히 짐작이나 하냐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와 필사적으로 싸웠다. 저녁 식사가 끝날 즈음에는 자리를 망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기력을 쏟아부었는지 기진맥진해져서 정리를 돕지도 못하고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미아가 설거지를 거들겠다며 남았지만, 더 신경을 쓰기에 그녀는 너무나 지쳤다.

  미아가 샤워를 하는 동안 다나는 바닥에 요를 깔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방은 그녀가 초등학생 시절부터 줄곧 사용했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부끄러운 시점에 멈춰 있지 않고 계속 변화해 왔다. 어릴 적 멋모르고 벽에 붙여둔 포스터나 부끄러운 음반 모음 따위는 일찌감치 치워두었다.

  다나는 미아가 바닥에 눕기를 거부하고 침대를 나눠 쓸 것을 요구하리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미아는 고분고분하게 그녀가 마련해 둔 이부자리에 몸을 뉘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미아는 목적지도 준비물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여정에 오르는 듯이. 전혀 예비되어 있지 않은 이 모험에 다나는 전력으로 맨몸을 내던져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두렵지 않았다.

  3피트 아래에서 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나."

  "응."

  "나는 그립지 않았니?"

  “…….”

  “난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말문이 막혔다. 미아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미리 불을 꺼버린 탓에, 그녀를 아래로 쫓아버린 탓에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볼 수도 없었다.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어렴풋한 천장의 벽지 무늬를 하염없이 세다가, 다나는 눈을 감았다. 그제야 용기가 났다. 어쩌면 미아는 이미 잠들었을지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널 기다렸어."

 

 

*

 

 

  "어디로 갈 거야?"

  조수석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며 다나가 물었다. 전방의 풍경이 무척 익숙했다. 그녀의 삶에서 언제나 택해왔던 위치였다.

  "집으로."

  미아가 대답했다.

 

 

 

 

 

천사의 공식

Formula di Angelo

 

 

  "오랜만이구나, 미아."

  "아빠." 미아는 놀라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다. "집에 계실 줄은 몰랐어요."

  흰 민소매 셔츠와 복서 차림의 안드레아 디안젤로가 소파에 몸을 파묻고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며 미아를 흘깃 쳐다보았다.

  "운송 일정이 바뀌었거든. 왜, 내가 집에 있으면 안 되는 거냐?"

  "그럴 리가요. 간만에 보니까 좋네요."

  등 뒤로 문을 닫고 미아는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드레아가 맥주병을 기울여 꿀꺽꿀꺽 마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훔쳤다.

  "트럭 일은 이제 관둘까 싶어."

  "노동조합 때문에요?"

  "미아."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그건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미아는 입을 다물고 부엌에 들어갔다. "저녁 드셨어요?"

  냉장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미아는 썩어 문드러지기 시작한 양배추와 달걀 몇 개를 뒤적이다 몸을 일으켰다.

  "아니. 맥주나 좀 더 가져와라."

  안드레아가 무뚝뚝하게 명령했다. 그 뒤로는 너무나 쉬웠다. 아버지는 미아가 집을 떠난 줄도 모르고 있었다. 새로운 애인을 사귀어 그 집에 눌러앉았겠거니 지레짐작하고 넘긴 것이다. 그는 지난 풋볼 경기의 재방송을 틀어두고 지나치게 촉박한 운송 일정과 레이건 정부의 간섭에 대해 불평을 늘어 놓았다. 안드레아 디안젤로는 말술로 유명했다. 부녀는 그 점만큼은 닮았다. 미아는 아버지가 과음했다고 곯아떨어지는 부류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잘게 빻은 수면제 수십 알을 세 병에 나눠 탔다. 아낀 월급으로 앙헬에게는 비밀리에 병원에 드나들며 모은 것들이었다.

  안드레아는 미아가 다른 두 병까지 미리 뚜껑을 따버렸다며 면박을 주었지만 그녀가 내미는 병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었다. 아버지가 첫 모금을 들이키기 직전에, 미아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알아차렸다. 진실을 규명할 기회. 어머니를 그리워할 기회. 용서와 화해의 기회. 진정한 새 출발의 기회가 그녀 앞에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미아는 눈을 깜빡여 그 환상을 털어냈다.

  술꾼에 골초인 남자가 잠결에 재떨이를 엎지르고 화재를 일으킨 사건은 조사할 것도 없이 그럴 듯했다.

  아무도 그를 추모하지 않을 것이다.

 

 

*

 

 

  운전대를 쥔 손이 희게 질렸다. 운전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혹은 액셀을 밟는 순간 돌이킬 수 없이 공범이 되어서인지 궁금했지만 미아는 질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다나가 겁에 질려 지금까지의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릴 것 같았다.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안으로 들였다. 공기의 흐름이 유독 거셌다. 몇 주 만에 맞는 바닷바람은 시원하고 달콤했다.

  한참을 달려도 등 뒤의 불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문득 미아가 물었다.

  "그가 우릴 찾으러 올 것 같아?"

  사이드 미러로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빈 도로를 자꾸만 곁눈질하던 다나가 되물었다.

  "누구?"

  "앙헬 말이야."

  미아가 창밖으로 담뱃재를 톡톡 털었다. 수천 번 반복해 온 익숙한 손짓이었으나,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넌 지금 이런 순간에서조차도 남자애를 원하는구나.'

  대답하는 대신 다나는 저 멀리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았다. 소방서의 사이렌이 울리고, 작은 동네의 주민들이 하나둘 잠에서 깨어나 도로로 나왔다.

  아주 아름다운 화염이었다. 저것이 영원히 타오르게 할 수만 있다면, 불꽃이 그녀의 영혼을 살라먹어도 좋겠다고 다나는 생각했다.

  다나는 옆을 돌아보았고, 미아의 옅은 갈색 뺨이, 헤이즐 색 눈동자가, 여전히 노랗게 탈색한 머리카락이 오렌지빛 불길에 잠식된 것을 보았고, 그리고 찰나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미아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느꼈다.

  그걸로 충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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