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종장의 녹음 합작
시내에서 학교에 다니는 아가씨의 사촌 동생이 들르는 날이면 집안은 부쩍 분주해진다. 아가씨께서는 일가친척 중에서도 도련님을 특히 귀여워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새벽 일찍 마을에서 제일 맛난 화과잣집에 사람을 보내 주전부리를 구해 오고 대문 안팎을 쓸고 닦아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무라사키, 빗을 가져오렴」
장지문 너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나는 회양목을 깎아 만든 단단한 참빗을 찾아 아가씨에게 가져간다. 아가씨는 화장대 앞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다. 아가씨의 머리카락은 밤하늘 은하수처럼 풍성하고 윤이 나지만 무척 길어서, 매일 아침 잠에서 깬 직후와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몸종의 도움을 받아서만 온전히 빗을 수 있었다. 흑단 같은 긴 머리칼은 허리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하루의 어느 때건 저 머리가 엉망으로 엉킨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의 머리를 빗는 일을 손재주도 넉살도 좋지 않은 내가 맡게 된 건 전적으로 큰 키 덕분이었다. 나는 도묘지가에서 거느리는 계집종 중에서 제일, 심지어는 몇몇 남자 하인들보다도 키가 컸다. 화장대 앞에 자리를 잡은 아가씨 뒤에 꿇어앉으면 어렵지 않게 정수리부터 다다미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 끄트머리까지 단번에 쓸어내릴 수 있었다.
아가씨가 수다스러운 분이 아님에 감사드린다. 나는 언변이 부족해 무탈하게 넘어갈 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자주 있었으므로, 사소한 잡담과 장난으로 아가씨를 즐겁게 해드리는 게 내게 맡겨진 의무가 아닌 건 천만다행이었다. 그분은 즐거울 때보다 만사가 성가시고 화가 날 때 말수가 늘어나서 유달리 뾰족한 문장들을 격렬하게 토해내는 편이다. 아가씨가 남에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지만, 그분에게는 늘 어딘지 사람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경향이 있어서, 그분이 작정하고 공격하는 말을 뱉으면 혀와 입술이 빚은 화살은 백발백중으로 상대를 관통했다.
반면 기분이 좋을 때 아가씨는 눈을 감고 빗질을 받다가 나지막이 짧은 곡조를 흥얼거린다. 아가씨의 목소리는 머리카락만큼이나 곱고 매끄럽다. 아가씨는 분명 노래 부르기를 즐기고 실력도 탁월하지만, 듣는 귀가 있을 때는 한사코 사양한다. 주인 어르신과 마님은 때때로 아가씨가 예닐곱 살일 적에 수저를 쥐고 친척 집 잔칫상에서 동요를 부르던 모습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겼다. 하지만 부모가 아무리 닦달하고 요구해도, 아가씨는 수줍은 듯 간교한 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키가 병든 노인네처럼 자그맣게 쪼그라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새벽녘마다 이부자리 밖으로 삐져 나간 두 발이 차게 식은 마룻바닥에 닿으면 나는 번번이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고, 죽마처럼 길쭉하고 비쩍 마른 한 쌍의 다리가 내 허리 아래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빗질이 끝나면 아가씨는 보석함에서 머리장식을 꺼내 요리조리 대어보며 내게 무엇이 가장 잘 어울리냐고 묻는다. 어깨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등나무꽃이나 수국, 목련의 꽃잎을 흉내 낸 비녀가 들이밀어지면, 나는 얼굴을 붉히며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아가씨는 내가 대답을 얼버무려도 개의치 않고 하나를 정해 머리카락에 꽂는다. 내가 골라야 할 때는 알 수 없었지만, 아가씨의 안목을 거쳐 선택된 비녀는 꼭 그게 아니면 안 되었을 것처럼 오늘의 아가씨를 빛낸다.
전차를 타고 오는 도련님은 물론, 바싹 다듬은 정원의 잔디나 윤이 나도록 걸레질한 마루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허겁지겁 구두를 벗고는 곧장 아가씨가 기다리는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누님!」
동생이 외치며 달려들듯이 껴안으면, 아가씨의 몸은 오뚜기처럼 옆으로 기울었다 바로 선다. 아가씨는 품 안에 파고든 도련님의 등을 토닥이면서 오는 길이 고되지는 않았냐고 묻는다. 수십 수백 번 같은 여정을 거친 도련님이 수십 수백 번의 같은 대답을 내놓을 것을 알면서도.
주인어른의 막내 여동생의 둘째 아들인 도련님은 워낙 어리광이 심했다. 어르신의 여동생이자 도련님의 어머니이신 미쓰코님이 친정보다 훨씬 부유한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간 탓도 있었다. 손위 형제, 손아래 형제 모두와 나이 터울이 있어 애매하게 고립된 유년기를 거친 도련님은 갖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지고 하기 싫은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철부지로 자랐다. 가족들과 떨어져 공부하는 고독을 핑계로 생활비를 타내 노름판에 탕진한다고 벌써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새 옷을 사 입어도 일주일이면 질리고, 입맛은 또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지난번 방문에서 맛있다고 두 상자를 비우고 간 과자를 기억해두었다 다시 준비하면 포장도 뜯지 않고 물리기를 반복했다.
변덕스럽고 철없는 도련님이 유일하게 변치 않고 사모하는 대상이 사촌누이였다. 어릴 적부터 우리 아가씨와 결혼하겠다는 게 말버릇이었다더니, 올해 열네 살이 되어서도 그분이 아니면 싫다며 기어이 혼담을 전부 거절했다.
아가씨는 안뜰로 난 마루에 방석을 깔고,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도련님의 볼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입에 주전부리를 넣어 준다. 이따금 도련님이 손짓하면 머리를 숙여 고개를 가까이하고, 도련님은 다가온 아가씨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장난스러운 말을 속삭인다. 아가씨는 어떤 때는 도련님의 순진하고 천박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지만 어떤 때는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고 혼을 낸다. 두 사람은 애틋한 연인 같기도 사이좋은 남매 같기도 하다.
도련님의 목 중앙에 볼록한 뼈가 도드라지고, 땀 냄새가 점점 짙어져 시큼해질 무렵, 주인어른은 아가씨와 도련님이 동침하는 것을 금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도련님이 이 집에 하루 이상 묵고 가는 것까지 반대했다. 도련님이 아무리 떼쟁이에 망나니이더라도, 지엄한 외숙의 명을 어길 수는 없었다.
만남이 반나절에도 못 미치게 되자 두 사람이 보내는 시간은 더더욱 은밀해졌다. 벗어 던진 신발이 뒤집어지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안으로 뛰어들던 도련님이 등 뒤로 미닫이문을 소리 나게 탁 닫기 시작했다. 이따금 다과를 차려 들어가면 아가씨와 도련님은 무슨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속닥거리는지 내내 서로에게 찰싹 붙어 이마와 손목, 허벅지에 구슬땀을 방울방울 달고 있었다.
아쉬운 눈치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마지못해 도련님이 떠나면, 아가씨는 홀로 남아 비뚤어진 머리장식을 벗고 생각에 잠긴다.
장대비가 억수로 퍼붓던 어느 늦여름, 여느 때와 같이 새벽 일찍 깨어 옷을 갈아입고 아가씨의 침소로 가는데, 방문이 열려 있었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아가씨?」
나는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손바닥을 댔다. 이불은 들치고 일어난 그대로 흐트러져 있었고 이미 식어서 차가웠다.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아가씨께 무시무시한 위험이 닥쳤다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밤중에 도적이 쳐들어와 칼을 휘둘러 그분을 겁박하고 데려갔다면? 주인어른은 내게 죄를 물을까? 억울하게 분풀이를 당하면 어떡하나?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하나?
그러나 매일 아침 듣던 익숙한 목소리, 나를 찾는 아가씨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오늘은 등 뒤에서,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무라사키니?」
돌아서자 비에 푹 젖은 아가씨가 서 있었다.
아가씨는 한쪽 눈을 찡그리고 품에는 사람만 한 자루를 안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산짐승이었다. 사냥감이었다. 아가씨에게서 갓 죽은 동물 사체에서 나는, 바닷가 어시장이나 백정들의 도살장에서나 날 법한 비린내가 풍겨 왔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려서, 나는 가까스로 비명을 삼키고 주저앉지 않고 버텼다.
정수리 위에서 천둥 번개가 우르르 쾅쾅 하늘을 가르고 울렸다. 사방이 샛노란 빛으로 밝아진 찰나, 나는 보았다. 아가씨의 왼뺨을 타고 거무스름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자세히 보니 아가씨의 품에 안겨 있는 건 새끼 사슴 따위가 아니라 가무잡잡하고 더러운 여자애였다. 손질 안 된 머리털은 북슬북슬하게 등허리까지 자랐고 손톱 밑은 새까맸다. 그 애는 아가씨의 품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더러운 손으로 아가씨의 어깨를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값비싼 비단으로 지은 기모노가 무자비하게 구겨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아가씨에게 그 애를 넘겨받고자 다가갔지만, 아가씨는 몸을 틀어 나를 피했다. 내가 수건을 가져와 혈흔을 닦으려 해도 한사코 거부했다. 얼굴에 묻은 피, 아아, 그것은 아가씨가 다시는 뜨지 못하게 된 왼눈에서 흐르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그 애를 정성껏 돌보았다. 그렇게 하면 그분 몸에 묻은 오물과 그분 얼굴에 생긴 흉터가 말끔히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살뜰했다. 손수 목욕물을 받아 씻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장롱에서 그분의 오래된 옷가지를 꺼내 입혔다. 직접 머리카락을 한 가닥 한 가닥 빗기고 다듬었다.
그렇게 탄생한 게 루리였다.
까막눈 루리. 어미도 아비도 모르는 루리. 가진 것이라고는 땡전 한 푼 없이, 이곳에서 내쳐지면 살아갈 재주며 손속도 없으면서 그저 아가씨 옆이라면 좋다고 웃는 백치 푼수 루리.
햇빛을 받으면 그 애의 까만 머리카락은 새파랗게 빛났다. 그래서 루리라고, 아가씨께서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라고 그 애가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루리는 종달새처럼 끊임없이 재잘대고 볕이 고르게 들어차는 오후에는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웅크려 잠을 잤다. 안채에서 끌어내 빨래라든지 불 지피는 일을 가르치려 해도 도통 고분고분히 듣는 법이 없었다. 봉급을 받는 것도 먹여 살릴 식솔이 딸린 것도 아니니 겁을 주고 협박해도 효과는 전무했다. 그 애가 집안에서 따르는 사람은 단 한 명, 아가씨가 유일했다.
아가씨도 그 애를 하나뿐인 벗으로 삼은 성싶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가씨는 왼쪽 눈을 잃었다. 아가씨의 말로는, 꿈자리가 뒤숭숭해 산속의 지장보살에게 기도를 드리러 갔다가, 하산 중에 발이 미끄러져 나뭇가지에 눈알을 찔렸다고 했다. 안대를 끼고 외눈으로 살아가는 삶에 적응하는 동안, 아가씨는 항상 루리를 곁에 끼고 다녔다. 루리의 어깨를 붙잡고 하염없이 정원을 거닐었다. 몸가짐이 여자애답게 얌전하지 못해서 번번이 물건을 깨고 소란을 일으키는데도 그 애를 아꼈다.
아가씨는 더는 나를, 무라사키를 불러 빗을 가져오도록 시키지 않는다. 이제 그분께는 루리가 있다.
처서 무렵 생겨난 군식구에 대한 얘기가 바깥으로 퍼지지 않도록 주인어른이 엄격히 단속했기 때문에, 이 집안에 일어난 어떤 이상야릇한 사건에 관한 소식은 도련님에게도 뒤늦게 다다랐다.
정확히는, 도련님은 사랑하는 누이가 다쳤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도묘지가의 고명딸이 애꾸눈이 되어 시집을 가기는 영 글렀다는 소문은 아무리 함구해도 새어나갈 길을 찾기 마련이었다. 도시에서 온갖 약재며 연고를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도련님은 마중 나온 하인들에게 짐을 내팽개치듯 안기고 아가씨를 찾았다.
다친 눈에 관해 도련님이 따져 묻지 못하도록 주의를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아가씨가 어떻게 구슬렸는지는 모르지만, 도련님은 예상한 것보다 순순히 그분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방 안쪽의 두 사람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금실이 좋은 듯했다.
도련님의 유별한 질투와 독점욕을 아는 아가씨는 일찌감치 루리에게 술을 먹여 떼어 놓았다. 취하는 줄도 모르고 달착지근한 사케를 열심히 홀짝이던 루리는 금세 방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미천한 계집애 하나에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이, 어느샌가 잠에서 깬 루리는 살그머니 밖으로 기어 나왔다. 기척을 감춰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평소 온 집안에 동선을 알리며 우당탕 요란하게 움직이던 버릇은 버리고 조용히 복도로 나선 루리는 발이 이끄는 대로 아가씨가 있는 곳을 향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아가씨를 쫓아온 루리는, 문지방 뒤에 서서 침을 꼴깍 삼키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문틈을 들여다보다 눈이 마주쳤는지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그 뒤로 저택에서는 아주 기이한 현상이 목격되었다. 아가씨가 주워온 계집종의 얼굴이 날마다 조금씩 바뀌어 가는 것이다. 아무나 지목해 그 애의 얼굴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심지어는 숙소를 나눠 쓰는 하녀들 중에서도 뚜렷이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루리는 몰라보게 도련님을 닮아갔다. 루리의 나이가 좀 더 어렸다면 분명 두 분 사이에서 몰래 낳은 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가씨가 외로움에 미쳐 어느 빈민촌에서 도련님을 닮은 아이를 발견하고 주워온 게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닮게 된 건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도련님에게는 웃음을 터뜨릴 때 늘 어린 소년처럼 입을 역삼각형으로 크게 벌리며 경쾌하게 세 마디의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었는데, 루리가 그 소리를 따라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탁상에 한쪽 팔을 괸 채 뺨을 감싸고 아가씨를 바라보는 눈빛, 흥미가 돋으면 홍조를 띠고 눈동자에는 광채가 이는 얼굴, 유독 빠른 걸음걸이와 앞장서서 걷다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뒤따라오는 이를 돌아보는 방식까지, 사소한 습관과 감정 표현의 수단 하나하나를 낱낱이 베꼈다. 원본인 도련님만 두고서는 그런 행동을 하는 줄도 몰랐다가, 그분이 떠나고 난 뒤 루리를 보고서야 그게 도련님 흉내인 걸 깨달을 정도였다.
기묘한 점은, 루리가 도련님의 얼굴을 갖게 된 뒤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애가 이 집에 갓 도착했을 시기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저분한 앞머리 사이에서 번뜩이던 눈동자, 앙상한 팔다리, 나무 바닥에 자국을 남기던 때 묻은 맨발, 그런 파편적인 심상은 건져낼 수 있었지만, 도무지 그 애가 어떤 식으로 웃고 말했는지, 어떻게 움직였는지, 원래 그 애의 눈매가 갸름하고 홍채는 먹구름이 옅게 낀 모양새였는지, 그 누구도 되짚어내지 못했다. 폭풍우가 치는 날 아가씨의 품에 안겨 있던 루리. 아가씨와 팔짱을 끼고 연못을 빙글빙글 돌던 루리. 청소가 하기 싫어 모퉁이를 돌아 달아나는 루리. 주전자를 들고 아가씨의 찻잔을 채우는 모두의 기억 속 루리는 낯을 드러내지 않고 뒷모습만을 보였다.
저것은 본래의 루리가 아니며, 어떤 꺼림칙한 이유로 자신을 모방하고 있을 뿐이라고, 도련님이 그렇게 꾸준하고도 난폭하게 주장하지 않았더라면, 누구도 루리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루리가 온 뒤로 도련님이 방문하는 날마다 이 집은 전쟁터가 되었다. 집안사람들끼리는 도련님과 루리가 최대한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애썼지만, 상대를 꼴도 보기 싫어하는 도련님과는 달리 루리는 통 말을 들어 먹질 않았다. 고집스럽게 복도를 오가고 방문을 기웃거리는 게 작정하고 눈 밖에 나려는 듯했다.
혹은 그 애는 그저 아가씨가 그리웠을 뿐인지도 모른다. 도련님이 오면 아가씨는 오직 도련님만을 상대했으니까.
모든 아랫것들이 그러하듯이 도묘지가의 시종들도 은연중에 편을 갈랐다. 도련님이 오면 일이 늘어서 싫다는 하인도 있었고 아가씨의 기분이 풀어져서 좋다는 의견도 있었다. 나는 애당초 도련님을 반대하는 쪽도 옹호하는 쪽도 아니었고, 그것이 내 분수에 맞지 않는 놀이임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지만, 근래에는 어쩐지 그가 가련하게 느껴졌다. 루리는 매일 매분 매초 아가씨를 독점하면서 고작 몇 주에 한 번 도련님이 들러 아가씨를 독대하는 그 짧은 시간마저 탐내는 욕심쟁이였다.
한 번은 도련님이 거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반 시간도 되지 않아 도로 나온 적이 있었다. 여태 안에서 무얼 하는지 들키지 않으려 숨죽이던 것과는 달리 고조된 말다툼이 얇은 벽을 뚫고 새어 나왔다.
「왜 그 애를 가만두시는 거예요, 누님! 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애가 닳는 듯한 도련님의 목소리.
아가씨께서는 평정을 잃지 않았는지 어조가 차분해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말에 도련님은 대꾸도 하지 않고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나는 간식과 차를 들고 문밖에 서서 들어갈 기회를 재다 도련님과 마주치고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쟁반을 엎지를 뻔했다. 그러나 도련님은 나를 문책하거나 골리는 대신 그 길로 신발을 꿰고 대문을 나섰다.
그날 도련님 시야에 루리가 들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정말이지 큰일이 날 뻔했다고 간을 졸였으나, 안심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다음날 다시 도련님이 이 집에 들른 것이다.
일전에 주인어른께서 도련님이 유흥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하고 허송세월 한다고 한 번 크게 경을 친 뒤로 이틀 연속으로 도련님이 오는 일은 없었기에,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하필 주인 어르신 내외가 감기로 앓아누워 아가씨가 직접 의원에 약을 타러 외출한 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부엌어멈이 루리의 팔을 잡아끌어다 창고에 가둬놓으려 했지만, 루리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녀를 뿌리치고 도련님을 맞이하러 달려 나갔다.
맨발로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에 방에 들어가려던 도련님이 흠칫 멈춰 섰다. 그조차도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의 걸음걸이가 그렇게 재현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마침내 도련님과 루리, 루리와 도련님이 서로를 마주했다.
두 사람은 너무 닮아서 거울 앞에 초상화를 놓아둔 듯했다. 옷차림만 같았다면 누가 누구인지 결코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참을 정적 속에 대치하다, 도련님이 먼저 코웃음을 치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어디 본 데도 없는 계집이 감히 남의 걸 훔치려 들어」
따귀를 내리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주눅 들기는커녕, 루리는 얻어맞은 뺨을 감싸고는 도련님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남의 것이라니! 이건 내 거야! 내 이름도, 얼굴도, 다 아가씨께서 내게 주신 거란 말이야!」
분을 이기지 못한 도련님이 불시에 달려들었다. 마루 아래로 떨어지며 도련님은 종아리를, 루리는 정수리를 찧었다. 두 소년 소녀가 마당에서 한데 엉켜 흙먼지를 휘날리며 뒹굴었다. 쓰레기를 뒤져 먹고 사는 들짐승들이나 낼 법한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루리가 표독스럽게 손톱을 세우고 도련님의 얼굴을 할퀴었다. 치마가 흘러내리건 말건 도련님의 배를 걷어차고 얼굴을 덮은 손을 힘껏 깨물었다. 도련님에게 떠밀려 바닥에 넘어지면 루리는 등과 허리를 둥글게 말고 탄력 있게 뛰어올랐다. 물고 할퀴고 갈기면서 누구 것인지 모를 핏방울이 맺혀 흘러 실금을 그었다. 도련님은 루리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처박고는 무릎으로 어깨를 짓눌러 압박했다. 몸싸움이 어찌나 사나운지 누구도 두 사람을 말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한갓 몸종끼리의 다툼이었다면 부지깽이를 휘둘러서라도 떼어놓았겠지만, 주인어른의 조카가 끼어 있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웠다.
「네까짓 게!」 마침내 도련님의 열 손가락이 루리의 목을 감싸 쥐었다. 「감히 네까짓 게 누님을 내게서 앗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도련님은 루리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흑청색 머리카락이 뺨과 이마를 장막처럼 가려 도무지 표정이 드러나지가 않았다. 그러나 루리는, 숨통이 조여와도 끝까지 눈을 부릅뜨고 도련님을 노려보았다. 그 형형하고 생생한 노기에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고용인들마저 주춤 물러설 정도였다. 루리의 얼굴은 어린 여자애의 것이 아니라 인왕의 가면인 것처럼 괴팍하고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공기가 부족해질수록 눈두덩이 부풀어 오르고, 회까닥 뒤집혀가는 눈동자에는 노르스름한 색이 일렁거렸지만, 루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루리의 낯빛이 시퍼래졌다가 희게 질렸다가 점차 붉어졌다. 그 애는 켁켁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살려주세요!」
애타게 도움을 청하고,
「살려주세요, 아가씨!」
숨구멍을 틀어쥔 손을 벅벅 긁어대다가,
「아가씨!」
단말마를 남기고는,
「……」
기어이 축 늘어졌다.
아가씨는 돌이킬 수 없이 늦었다. 그분이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넘었을 때, 루리는 이미 싸늘한 시체였고, 일꾼 중 몇 명은 이를 관에 신고하기 위해 길을 나선 뒤였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도련님이 기척을 느끼고 아가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했어요」 도련님이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그랬어요, 누님」
그러더니 도련님은 비척비척 일어서서는 아가씨를 스쳐 지나 저택 밖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아가씨는 미동 없이 땅바닥에 내버려진 루리를 발견하고는 그 애 곁으로 달려갔다. 이윽고 아가씨에게서 가늘고 찢어지는 듯한, 음산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울음도 웃음도 아닌 것이 고막을 찔러댔다. 듣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귀를 틀어막고 헐레벌떡 자리를 피했다. 아가씨는 전부 자신의 잘못이라고 흐느끼다 이내 땅을 짚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눈알이 없어도 눈물이 차오르기는 하는지, 왼눈을 덮은 안대가 뒤쪽에서부터 천천히 젖어 들었다.
아가씨는 루리를 끌어안고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부모의 애원도 들은 체하지 않았다. 결국에는 주인어른도 아가씨를 포기했다. 저러다 혼절하면 그제야 방으로 옮길 셈이었다.
그러나 이튿날 동틀 녘에, 딸아이 걱정에 잠을 설치다 밖으로 나선 마님이 비명을 질렀다. 아가씨와 루리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온 식구가 오전 내내 집안을 뒤집어엎으며 샅샅이 뒤졌으나 아가씨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마을에서도 보았다는 사람이 없었다. 주인어른은 젊은 일꾼 하나를 보내 아가씨를 찾아오도록 했다. 콧등에 흉터가 있는 남자였는데, 이 집에서 나보다도 키가 큰 몇 안 되는 남자 하인이었다. 아가씨를 발견하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라는 명령은 맨몸으로 이 집에서 쫓겨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사내는 묵묵히 봇짐을 꾸려 길을 나설 준비를 했다. 나는 드물게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충고했다.
「사, 산… 뒷산으로 가셨을 거예요. 루리, 루리를 묻어 주려고…」
사내가 나를 가만히 쳐다보다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그는 내가 일러준 대로 뒷산의 산길을 올랐다. 루리를 데려온 날 아가씨가 들렀다는 산속의 제단, 거기서 기도를 드리다 실신했으리란 짐작에서였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가씨도 죽은 여자애도 온데간데 없고 통통한 까마귀 사체 하나와 여자 옷 한 벌만 남아 있었다. 흰 꽃이 수놓아진 검은 기모노, 아가씨의 기모노였다.
사내가 옷이라도 거두고자 손을 뻗었더니 그 아래에서 거대한 녹색 비단뱀이 스르르 기어나와 숲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딸을 잃고 상심한 주인 어른은 시름시름 앓다 몇 달 만에 타계했고 홀로 남은 마님은 어느 절에 전 재산을 기부하고 일신을 의탁했다. 도묘지가의 하인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뿔뿔이 흩어지거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몇 년 뒤 내가 교토를 떠날 때, 도시 남쪽의 오래된 성문을 지났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래고 허물어져 거의 폐허에 지나지 않는 초라한 문이었다. 문턱에 발을 올리려는데, 눈앞에서 진녹색 비단뱀 한 마리가 기둥을 타고 올라 재빠르게 사라졌다. 이후 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토록 크고 우아한 뱀은 다시 보지 못했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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