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궤도 3부 로그 백업 (2019. 05. 30. - 2019. 06. 09.)
(190606)
밤이면 세상의 윤곽이 희미해졌다. 뭍과 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소리와 감촉만이 남았다. 콘스탄틴은 종일 그 시간을 기다렸다. 해가 저문 후에는 바다뱀의 등을 타고 나가 해변을 걸었다. 양지에서 모래는 끓이다 만 설탕처럼 고운 갈색이었다가 응달이 지면 흐릿한 남색으로 물들었다. 모두의 그림자가 공평하게 검은 빛깔이듯이 바다도 모래사장도 예외가 없었다. 하릴없이 걷다가 이따금 반쯤 파묻힌 조개껍데기를 발견했다.
미처 보지 못하고 하나를 구두 굽으로 밟아 깨뜨린 뒤로는 남몰래 부츠를 벗어 들고 맨발로 모래를 밟았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갈린 것, 흰 등에 물결을 따라 부드러운 골이 팬 것, 머리에 달린 뿔 같은 것. 이미 죽어 쓸모없어진 존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점이 경이로웠다.
해변의 모래가 전부 쓸려나가려면 파도가 몇만 번을 더 휩쓸어야 할까. 로가 이 행성을 떠나고 새로운 함선이 찾아와 정박하고 나서도 그의 발밑을 받쳐주었던 모래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상상을 했다. 콘스탄틴은 그 모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었다. 사무치게 그리워도 재회를 바라지 않는다고 되뇌었다. 아무리 어설픈 거짓말도 켜켜이 쌓으면 제법 무게를 가졌다.
그렇지만 지금 눈앞에는 기적처럼 아나렉샤가 서 있었다. 몇 년 전 그의 대답을 기다릴 때처럼. 등 뒤에 숨긴 꽃다발을 건네주려고 초조하게 바라볼 때처럼. 그럴 때마다 그는 내키는 대로 망설이거나 모르는 척하거나 솔직하게 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떠한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아주 서툴고 멍청해진 기분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심스럽게 턱을 쥐고 고개를 기울이면서 콘스탄틴은 이제는 지나간 시절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고 믿고 싶어졌다. 달빛 아래에서 희게 빛나는 두 눈을 마주하면 착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순간을 영영 유예해도 좋을 것 같았다. 겹쳐진 입술 틈으로 달뜬 숨이 오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꼼꼼히 눈에 담지 않으면 후회하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네 생각을 했어.
속삭이는 대신 눈을 감았다.
샤이닝 (190609)
간혹 정신이 들 때마다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콘스탄틴은 사람들이 으레 죽음 앞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를 깨달았다. 더 이상 바라볼 미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파편은 뒤죽박죽으로 떠올라 그를 할퀴었다. 언젠가 바닷가 앞에서 떨쳐냈던 작고 여린 손. 정원에 내리쬐는 금빛 햇살. 건너편 침대에서 들려오는 색색거리는 숨소리. 매캐한 연기와 손끝에 묻어나던 잿가루. 샴페인. 웃음소리. 빙글빙글 도는 천장. 정거장의 샹들리에가 보일 것 같아 눈을 뜨면 여전히 흰 조명이 시리게 머리꼭지를 밝히는 구금실이었다.
아나렉샤는 그가 자신을 증오하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게 사랑하는 친구의 바람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빼곡한 통증에 가물거리는 마음을 되잡으려 애썼으나 미움은커녕 자꾸만 슬퍼질 뿐이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피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가 우는 꼴이 되었다. 따가워 눈꺼풀을 깜빡이다 보면 정말로 눈물이 흘렀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에서 아나렉샤가 숨을 골랐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가까이 다가와 줄 수 없냐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금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프웨이행 셔틀 안에서 콘스탄틴은 줄곧 기다렸다. 거대한 운명의 압도, 비로소 있어야 할 곳에 당도했다는 아늑함 따위를.
정작 그를 덮친 것은 손바닥에 고인 땀과 메슥거리는 멀미뿐이었다. 떠나온 행성은 등 뒤로 점점 멀어졌다. 평생을 내달려도 결코 서로 가까워지지 못하는 무수한 별빛이 창밖을 스쳐 지나갔다. 두 손을 쥐었다 폈다. 기분 탓인지 감각이 둔했다. 기대와 불안으로 콩닥거리는 가슴을 붙들고 우주로 나왔다.
어리고 순진하고 사랑을 믿었던 시절이었다. 세상 무엇도 그를 해치지 않으리라는 안온한 기대에 젖어 내키는 대로 발을 뻗었다. 체온을 빼앗고도 한참 전에 식은 철제 의자에 묶인 채 의문한다. 그날 괜한 호기심에 홀로 돌아다니지 않았다면. 침대 밑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면. 주인을 찾아주겠다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더라면. 그렇다면 그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서 있었을까. 답을 내리기 위해 망설여본 적이 없었다.
놓쳐버린 손들에 대해 생각한다.
수백, 수천 년 동안 일군 역사가 어떻게 한순간에 폐허가 되는지 콘스탄틴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두 눈으로 직접 보았다. 제국의 탐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쟁은 소모적이었고 명목만 남은 신념은 날카로운 모서리로 도리어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들을 베었다.
아무리 무르고 나약해도 선택은 명료했다. 주저하지도 번복하지도 않았다. 제국이 굴복을 종용하더라도 죽지 않을 불씨를 흩뿌리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러므로 모의는 성공했다.
"느세파 콘스탄틴 소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를 둘러싼 눈들에 깃든 분노와 실망을 마주하게 될까 봐 일부러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구금실로 인도되는 길에 크라우스의 선체에 달린 벽창 여러 개를 지났다. 창밖의 우주는 언제나 지겨우리만치 고요하고, 냉담하고…… 그리고 눈부셨다.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어쩌면 아나렉샤 역시 울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확인하고 싶지만 손끝으로 모든 힘이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무력하게 앉아 그저 속으로 광막한 우주를 그린다.
궤도를 이탈한 함선은 추락하지 않는다. 다만 나아갈 뿐이다.
더 밝은 빛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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