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너레이션 킬 AU





  무자비하게 덜컹거리는 바퀴와 이따금 주파수가 맞을 때만 애태우듯 지직거리는 라디오는 어릴 적 살던 디트로이트의 트레일러를 떠올리게 했다. 얀은 그 좁고 지저분한 ‘집’에서 고모와 함께 살았다. 알파벳을 읽고 쓰는 법을 배웠을 즈음부터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았다. 세제의 이름과 사용법을 스스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동력 착취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롯이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얀은 회고했다. 실제로도 고모는 자신의 옷과 침구에는 손댈 필요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했었다. 어제 콜라를 마시다 쏟은 티셔츠를 다음날 그대로 입어도 상관없는 고모와는 다르게 얀은 매일 깨끗한 옷을 입고 학교에 나가고 싶었다.
  고모는 이미 재활원에 두 차례나 다녀온 알코올 중독자였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였고 밤마다 흐느끼며 잠에서 깼다. 두 번째로 재활원에서 나오면서 고모는 얀을 껴안고 뺨을 비비며 다시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맹세는 오 년간 지켜졌고 얀이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들어서기 직전에 깨졌다.
  시니어들을 위한 프롬 파티 날, 얀과 친구들은 학교 체육관으로 가는 대신 인근 폐공장 직원 숙소에 모였다. 그들은 지루했고 지루함은 사람을 미치게 했다. 완전히 돌아버리지 않으려면 때때로 숨통이 트일 만한 사건이 필요했다. 허물어져 가는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결코 우왕좌왕하는 법이 없었다. 구태여 입을 맞추지 않아도 자신이 맡은 몫을 했다. 한 명이 날쌔게 창문을 깨면 옆에 서 있던 누군가가 기름을 붓고 다음으로 라이터를 던져 넣어 완성했다. 얀은 대체로 멀찍이 물러나서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의 관심은 한때 수백 명이 드나들었을 공간이 타들어 가는 모습 그 자체에 있을 뿐 범법행위의 스릴에는 달리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오래 방치된 건물들은 이미 소유주가 죽었거나 행방불명됐거나 심지어는 복역 중이었으므로 그들은 처벌받지 않고 무사히 귀가했다. 무사히 귀가하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얀은 그 표현을 천천히 곱씹어봤다. 아마 고모가 긴긴 비행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표현했을 것이다. 얀이 밟고 선 현관 앞 발 매트에는 꽃무늬로 WELCOME이 쓰여 있었다. 그건 누구의 진심도 아니었다.
  집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고모가 즐겨 보는 심야 코미디 쇼가 방영될 시간이었는데도 TV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세레나, 저 왔어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얀은 가방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싱크대 앞에 주저앉은 고모가 어둠 속에서 벌건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순간 얀은 고모가 죽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이내 진상을 깨달았다. 타일 바닥 위에 흥건히 고인 웅덩이와 볼링핀처럼 늘어선 맥주병들, 그리고 이미 초점을 잃은 고모의 두 눈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침착하게 바닥을 닦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고모를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그는 더 이상 아끼는 바지에 묻은 케첩이 안 지워져 허둥거리던 어린 애가 아니었다.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둘은 그 일에 대해 대화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집에 돌아가기가 꺼려져서 얀은 도보로 하교하기 시작했다. 학교 근처 햄버거 가게에서 밀크쉐이크를 사서 천천히 녹여 먹다 보면 단맛에 물릴 즈음 집에 도착했다. 길에서도 벽면 유리창 너머로 매장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점원은 흰 바탕에 빨간 줄무늬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무료하게 감자튀김을 뒤집거나 계산대에서 잔돈을 꺼내 셌다. 학교가 끝나는 오후 세 시는 어중간한 시간대였으므로 가게는 항상 한산했다. 개점부터 마감까지 도맡는 그 점원은 얀의 육 년 선배였다. 디트로이트처럼 고여서 조용히 썩어가는 동네에서는 이웃의 속사정을 속속들이 알았다. 나날이 주근깨보다 주름이 많아지는 그 선배는 소포모어 시절 여름방학 파트 타임으로 점원 일을 시작해서 여전히 지긋지긋한 기름과 싸구려 패티 냄새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밀크쉐이크의 달착지근함마저 역겹게 느껴졌을 때 얀은 생각했다. 달아나야만 한다.
  그래서 군을 택했다. 고모에게는 비밀이었다.



  해는 빠르게 지고 전진은 더뎠다. 아담이 아무리 훌륭한 운전병이라고 해도 고장 난 야간투시경을 쓰고 지도도 안 통하는 길을 뚫기는 힘들었다. 각성제로 몰아내도 잠이 자꾸만 밀려올 만큼 피로했다. 특히 요나스에게 잘된 일이었다. 그저께 밤 야간 행군 중 버려진 마을 하나를 지났는데, 컴컴해서 분간이 안 가는 사이 전깃줄에 목이 졸려 자칫 죽을 위기를 겨우 넘겼다. 그 와중에 방탄모를 떨어뜨려 보급품을 요청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인 요나스는 소대에서 나이가 제일 어렸다. 어쩌다 이곳까지 왔는지 깊은 사정까지 털어놓지는 않았으나 대강 짐작할 만한 범위 안일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채 넘어갈 얘기였다. 누군가 지나가듯 선수 생활이 그립지 않냐고 묻자 요나스는 자신의 실책에는 자신이 책임진다는 점에서 운동선수와 군인은 별반 다를 게 없다며 웃었다. 카르니는 수색 훈련도 마치지 않고 투입된 애송이가 영 성에 차지 않아 했지만, 얀은 기회만 된다면 요나스 역시 훌륭한 군인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엊그제처럼 터무니없이 죽을 뻔하거나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유탄발사기를 난사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따지자면 골칫덩이는 나쟈였다. 같은 방탄복을 입고 둘러모여 전투식량을 퍼먹는 무리에서도 총 한 번 쥐어본 적 없는 희멀건 종군 기자는 확실히 눈에 띄었다. 험비에 기대어 씹는 담배를 질겅이던 얀 옆으로 카르니가 다가와 섰다. 주문한 윤활유가 한랭지 전용으로 잘못 배달된 바람에 잔뜩 성질이 나 있었다. 유탄발사기에나 바르라며 요나스에게 오일 캔을 던져주고 한바탕 불만을 토로하려는 기색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카르니는 대뜸 질문했다.

  "걱정되십니까?"
  "뭐가?"
  "저 기자요."

  얀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을 뿐이야. 전쟁에서 자기를 지킬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걸."

  카르니가 어깨를 으쓱였다. 동의의 뜻인지 아닌지 불분명했다.



  “여기까지 와서 기자 노릇 하기 어렵지 않아요?”
  
  일일이 구덩이를 파서 변을 보는 것이나 험비 아래 들어가 엎드려 자는 일에 대해 불평하는 대신 나쟈는 곤란한 듯 웃어 보였다. 얀은 자신의 말이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굳이 정정하거나 사과하지 않았다. 그 정도도 감내하지 못하면 군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출정 전 나쟈가 <코스모폴리탄> 출신이라는 것이 알려졌을 때 부대가 무척 떠들썩해졌었다. 따분한 군인들은 본토로부터 배달된 초등학생들이 쓴 편지나(“해군 아저씨,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해요.” 로 시작하는 엉망진창인 문장들이 매번 비웃음을 사는 이유는 그들이 해병대이기 때문이었다) PX에서 취급하는 스낵이 누텔라 앤 고에서 젤리-오로 바뀌었다는 소식에도 술렁였지만 유독 말랑말랑해 보이는 새로운 얼굴은 꽉 물고 놓아줄 줄을 몰랐다. <코스모폴리탄>에는 머리카락을 열두 가지 방법으로 땋는 법, 이름과 색으로만 칵테일 맛을 맞추는 법, 그리고 잠자리에서 애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 따위가 실린다는 사실은 섬세함과는 거리가 먼 군인들에게도 자명했다. 심지어 옆 중대에서 전처가 팬이었다며 찾아오기도 했다. 물론 나쟈는 그 말을 고스란히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
  나쟈는 도망쳤다. 도시의 외로움, 원망, 슬픔 따위로부터. 그런 것들은 중동의 열기에 증발해버리기를 바랐다. 그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현대의 전쟁은 정신없이 터지는 포탄과 뺨을 스치는 총알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행군은 지난하게 이어졌고 생각에 잠길 시간은 넘쳐 흘렀다.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는 대신 나쟈는 끊임없이 펜을 놀렸다. 그를 외부인이라고 여겨서 그런지 군인들은 종종 수개월 간 등을 맞대고 지낸 동료들에게도 비밀로 부친 고민거리를 들고 와 털어놓고는 했다.

  "이걸 책에 써도 될까요?"

  하고 나쟈가 물으면 그들은 한결같이 대답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읽을 텐데요, 뭐."



  승객들에게 엉터리 승차감을 제공하며 험비는 느릿느릿 앞으로 나아갔다. 바퀴가 한 바퀴 돌아갈 때마다 모래 먼지가 흩날렸다.  가끔은 극도의 긴장감과 지루함이 같은 감정처럼 느껴졌다. 삶은 매 순간 지금은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파악하기 위한 저울질의 연속이다.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사람들만이 전장으로 돌아왔다.
  뒷자리에서 나쟈가 노래를 흥얼거렸다. 부대원들이 지나치게 반복한 나머지 브라보 중대에서는 이미 금지된 곡이었다. 어젯밤 취재를 위해 어울렸다가 옮아온 듯했다. 아담이 멜로디에 맞춰 검지로 운전대를 톡톡 두드렸다.

  “기자 양반, 그 빌어먹을 레이디 가가 노래 좀 그만 부르면 안 돼요?”

  카르니가 창밖으로 침을 뱉으며 쏘아붙이자 머리 위에서 요나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가가가 아니라 에이브릴 라빈인데.”
  “에이브릴 라빈이든 레이디-빌어먹을-성부와-성자와-성령이든 내 알 바 같아?”

  노래를 멈춘 나쟈가 곁에서 조용히 펜과 수첩을 꺼내 들고 둘의 말다툼을 옮겨 적었다. 그들의 대화는 나쟈의 손을 거쳐 가끔은 각색되고 가끔은 가감없이 기록될 것이다. 얀조차도 그 일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고 나쟈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괜찮았다. 게다가 레이디-빌어먹을-성부와-성자와-성령은 꽤 기발한 욕설이었다. 카르니가 흘금 곁눈질로 나쟈의 수첩을 쳐다보자 나쟈가 내용이 안 보이게끔 수첩을 창 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백미러에 카르니가 미간을 좁히며 기관총을 고쳐 잡는 모습이 비쳤다.

  곁에서 아담이 묵묵히 운전하다 얀을 불렀다.

  “병장님, 저기 양 떼가 지나가는군요.”
  “요나스, 저 앞에 양 떼가 보이나?”
  “예, 병장님. 아주 많은 양들과 꼬맹이 목동 둘입니다.”

  불과 삼십 분 전에 무장하지 않은 민간인에게는 발포하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진 참이었다. 양치기 소년들이 사정거리를 벗어나기 전에 높으신 분들이 마음을 바꾸면 수십 명의 운명이 또 흔들릴지도 몰랐다.

  “신은 어린아이고 우리는 그의 장난감이지.”

  펼쳐진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리며 얀은 중얼거렸다.

  “그래, 우리는 모두 그분의 장난감일 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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