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가 J와 동행했던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물론 J는 평소에도 나에게 잘 해주었지만 그건 웬만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또 언제 다정했냐는 듯이 곧잘 짓궂게 굴었다. "그 애한테 뭘 가르친다는 건 불가능해." J가 길가에 놓인 자갈 더미를 신발코로 걷어차며 푸념했다. J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J랑은 다섯 살, 나와는 네 살 차이 나는 남자애였다. 발병 후 출산률이 거의 제로에 수렴했기 때문에 온갖 축하와 축복을 받으며 태어났지만 어딘가 베베 꼬인 애였다. 어쩌면 둘의 아버지가 다르기 때문에 J와의 차이점이 더욱 부각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방 안에서만 지내며 다른 아이들과는 어울릴 생각을 않는 그 애에게 미약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J가 하는 말에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사실 그건 대부분의 대화에서 내가 취하는 입장이었다.


  "너 꽤 괜찮은 애구나." J가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고 깔깔거렸다. 조금 갈라지는 듯 치솟는 웃음이었다. 화제 전환이 너무나 갑작스러워 내가 무슨 말이라도 놓쳤나 싶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힌트를 얻기 위해 J를 훑어보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붉어지며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J는 청바지와 자켓 안에 속옷 말고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부러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그곳에 가지 않도록 애쓰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가자,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그러더니 J는 내 손목을 쥐고 재촉하듯 걸음을 놀렸다. 셔츠 위로 닿은 감촉이 차가웠다.


  자갈길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보았을 때는 안개 사이로 꼭 축소된 코끼리 하나가 서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까이 가보니 그건 거대한 방수포가 마찬가지로 거대한 무언가를 덮은 꼴이었다. "브알라voilà!" J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비닐막을 걷어냈다. 꼭 산타에게 그동안의 선행을 읊어주고 싶어 안달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모습을 드러낸 건 13년형 쉐보레 픽업 트럭이었다. "황홀하지 않아?" 이제 J는 자신감을 넘어 기세등등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날 처음으로 망설임 없이 감정을 표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J의 동생 얘기를 할 때와는 다르게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었다. 2013년에 출시된 이 트럭은 하필 첫 발병지인 디트로이트에 유일하게 공장을 두고 있어 사진으로도 보기 힘든 클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 못난 아가씨를 달래느라 50불이나 들었어. 뭐 해? 얼른 타지 않고!" 그건 그 오후 동안 우리 사이에 오간 마지막 대화였다. 이후로 우리는 잭슨 파이브와 그린 데이와(안타깝게도 베이스와 드럼이 병에 걸린 후 빌리 조 암스트롱은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비치 보이즈를 들으며 마냥 달리기만 했다.



*



  난 J를 퍽 좋아했다. 그 애에게선 희미한 봄 냄새가 났는데, 그건 오랜 기다림 끝에도 쉽게 맡을 수 없는 향취였다. 발병 후의 지구에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꿉꿉하고 암울한 여름만이 계속되었다. 한때 찬란했을 도시는 이제 얄팍한 성벽에 기대어 겨우 일이백 명 정도 모여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J는 '얄팍한superficial'이라는 단어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 말을 할 때면 아주 인공적인super-artificial 사탕을 먹은 기분이라며 낄낄거리고는 했다. 발병 전에 자신의 직위가 어떠했던 한데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사창가도 금융 거리도 구분 지을 필요가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목숨을 부지한 사서는 찾을 수 없었다. 관리해줄 이 없는 도서관은 거대한 책 무덤이 되었고 특히 사전처럼 두꺼운 책들은 일찌감치 장작으로 쓰이기 십상이었기에 J만의 정의가 옳지 않았음을 알게 된 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중심에서 한 시간 정도를 걸어나와 남쪽 성벽으로 가면 조그마한 주유소가 있다.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더러웠는데 먼지를 쓸고 나니 꽤 쓸만했다. 구석에는 구닥다리 주크박스가 있었고 거기엔 처비 체커나 더 스미스의 음반들도 있었다. 만날 레이디 가가나 저스틴 비버만 들었던 우리로서는 환호를 지르며 열광할 일이었다. 무언갈 꺼내 먹을 생각을 제일 처음으로 한 건, 역시나, 우리의 미스 J였다. 그녀는 선반 제일 밑을 훑더니 새파란 롤리팝 더미를 찾아냈다. 불량한 맛은 커녕 마지막으로 포식한 날이 까마득했던 우리는 앞뒤 잴 것 없이 그 사탕에 달려들었다.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지만, J가 그런 나를 눈치채고 사탕 봉지를 까 냉큼 한입 빨아먹으며 웃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어떤 위안과 확신을 안고 사탕을 입에 물 수 있었다. 그날은 (안젤라가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렸다는 것 빼고) 정말 완벽한 하루였다.


  우리가 성벽 안에 갇혀 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성 밖에 나가면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안개처럼 무성하고 끈질기며 지독했다. 좀비들은 자개 눈깔이라고도 불렸다. 그런 별명이 붙은 건 그들이 정말 동양의 장신구를 닮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드라진 망막 위로 실핏줄이 갈래갈래 뻗쳤고 푸르죽죽한 얼굴 가죽과는 확연히 다른 빛깔을 띠었다. 그들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단지 나와 J에게만 허락되었는데, 그들의 눈깔을 가까이에서 본 건 오로지 우리 둘뿐이었기 때문이다. 난 일종의 특권 의식과 뿌듯함(지금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허세였지만)을 지닌 채로 자랑스레 그 은어를 사용했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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