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십오 년 전, 쉬 가문은 격동의 여름을 맞이했다.

  그해 독일에서는 월드컵이 열렸고 인도 뭄바이에서는 폭탄 테러로 이백여 명이 사망했다. 세상은 여전히 미국을 중심으로 돌았으며 미국인들은 여전히 축구에도 평화에도 관심이 없었다. 중동의 전쟁은 영영 계속될 것만 같았고 청년들은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지는데 주가는 계속 계속 치솟아 택시 운전사들도 스트리퍼들도 마이애미에 본인 명의의 콘도를 한 채쯤은 계약해두던 시절이었다.

  LA의 모친댁에서 걸려온 전화를 끊은 장남 쉬린타오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곧장 짐을 꾸렸다. 배낭 하나에 티셔츠와 속옷, 양말과 칫솔, 지갑과 외투가 차곡차곡 들어갔다. 내비게이션에 주소지를 입력하고도 유성펜으로 지도에 선을 그어가며 꼼꼼히 경로를 확인한 뒤에야 준비가 끝났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내 허이둬가 미니 스니커즈 한 봉지를 글러브박스에 넣었다.

  “잊고 두면 녹아버릴 테니 꼭 챙겨 먹어요. 아이들도 한두 개 정도는 줘도 돼요. 당신 저혈압 조심하고요.”

  “고마워. 장모님은 곧 오신대?”

  “예약 주문만 끝내시면요. 한 시간이면 된대요.”

  린타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금방 돌아올게.”

  이둬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뺨은 차가웠다. 그녀는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였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지만 절대로 진짜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그런 여인이었다. 특유의 그 표정 덕에 마흔 살을 얼마 남기지 않고도 그녀는 때때로 대학생처럼 보였다. 이둬가 한껏 창백해진 낯으로 뒷좌석의 창문을 두드렸다.

  “리치. 창문 좀 내려 보렴.”

  헤드폰에서 소리가 새어 나올 정도로 크게 노래를 듣던 리처드가 한 박자 늦게 차 문에 달린 버튼을 꾹 눌렀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창틀 너머에서 고개를 쑥 들이밀었다.

  “아버지 말씀 잘 듣고, 한눈 팔지 말고, 말썽부리지 말고, 어디 아프면 바로 말해야 한다. 태미, 동생들 잘 챙기고.”

  조수석의 태미가 심드렁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커뮤니티 센터의 공용 수영장에서 인명구조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려던 방학 계획이 엎어져 언짢은 상태였다. 하지만 LA까지 가려면 쉬지 않고 운전해도 두 시간이나 걸렸고 그동안 그녀는 자신이 샌디에고를 떠나 LA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고는 기운을 되찾게 될 터였다.

  “슬슬 출발해야 해.”

  남편의 목소리에 이둬가 아쉬운 듯 아들들의 어깨를 한 번씩 쥐었다 놓아주었다.

  “도착하면 전화해요.”

  네 사람을 태운 새파란 혼다 어코드가 그 말에 호응하듯 부르르 엔진 소리를 냈다. 린타오는 아내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핸들을 돌려 진입로를 빠져나갔다.

 

  친정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이둬 혼자서 초등학생 둘에 아직 유치원생인 막내까지 돌보기는 벅찬 법이었다. 웨이리는 지난주에 막 생일을 넘겨 열 살이 되었고 고등학생인 형과 누나와 함께 묶이기에는 영 어중간한 위치에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아버지는 그를 익숙한 고향에 두는 것보다 낯선 대도시에 데려가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그가 큰애들을 감시하는 동안 큰애들이 동생을 감시하도록 할 계획인 듯했다.

  카 오디오에서 샤키라의 히트곡이 흘러나왔다. 리처드가 무심하게 대시보드를 흘끗 쳐다보고는 MP3의 볼륨을 높였다.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태미가 매섭게 홱 돌아보았다.

  “웨이리! 의자 걷어차지 마.”

  “안 걷어찼는데?”

  웨이리는 창밖을 보며 멀뚱멀뚱 대꾸했다. 그는 얼른 다운타운을 빠져나가 1번 국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벌써 짭쪼름한 바다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찼잖아. 봐, 지금도!”

  태미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하지만 웨이리가 또래에 비해 체구가 작고, 좌석에 등을 붙이고 앉아 안전벨트를 매면 발아래 공간이 어중간하게 남아서 자꾸만 앞 좌석에 신발코가 닿는 게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발뺌하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반응은 그의 누나를 더욱 약 오르게만 했다.

  “얘들아, 싸우지 마라.”

  린타오가 엄숙하게 끼어들었다.

  “뵈러 가는 길에 너희가 내내 싸웠다는 걸 할머니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겠니.”

  그러자 태미는 금세 조용해졌다. 입을 꾹 다문 채 팔짱을 끼고 시트에 몸을 파묻었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웨이리는 다리를 흔들거리는 데 금방 흥미를 잃고 창가에 뺨을 붙였다. 손가락으로 유리를 더듬자 해파리나 유령을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희뿌연 자국이 남았다. 햇살을 받은 유리창은 뜨끈했다. 주근깨가 걱정되는 듯 태미가 열이 오른 팔다리를 문질렀다.

  린타오가 핸들을 꺾으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시간짜리 여정은 그런 사소한 소음으로 채워졌다. 방향지시등의 규칙적인 깜빡임이라든가 룸미러에 걸어둔 향 주머니가 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며 안에 든 말린 잎이 사각거리는 소리, 유행가의 높고 빠른 음률 따위로. 태미는 라디오에서 즐겨 듣는 노래가 나오면 음량을 키웠고 저속한 가사가 들리면 린타오가 다시 크기를 줄였다. 이따금 부녀가 학교나 일터에 대해 나누는, 단지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 위하여 사무적으로 주고받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단발적인 대화를 제외하고는 차 안은 조용했다.

  불운한 사건들이 잇달아 일어난 여름이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어느 대기업에서 식당을 인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여러 조건이 주렁주렁 달린 계약서를 내밀었다. 서명만 하면 레스토랑의 많은 부분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전부 더 나은 방향으로. 조리 과정은 최적화되고, 메뉴는 간결해질 것이며, 매장들은 하나의 관리체계 하에 통일될 예정이었다. 듣기 좋은 달콤한 말들이 눈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렸다. 계약서에 서명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집안은 반반으로 갈라졌다. 그 당시만 해도 홍 롱 팰리스는 친척들이나 그들의 지인을 통해 캘리포니아의 주요 도시들에 분점 몇 개를 낸 게 고작이었다. 가업에 기여한 정도가 크든 작든 쉬 가문에 발을 걸친 이들은 다들 발언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저마다가 지닌 사업에 대한 감각이 바로 지금이 분기점이며, 한 번 내려진 선택은 영영 돌이킬 수 없으리라고 경종을 울렸다.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쉬슈보가 사라진 것은 사흘 전의 일이었다.

  린타오에게는 남동생이 세 명 있었다. 그중 막내인 슈보는 오랜 기간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한데 모인 자리에서 그렇게나 그를 들먹이기를 즐기면서도 또 아이들 앞에서는 쉬쉬해대는 통에 중독의 원인이 약인지 술인지 둘 다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막냇삼촌이 세 번씩이나 재활원에 들어갔다 나온 것만큼은 확실했다. 웨이리 또래는 그를 직접 만나본 횟수도 손에 꼽혔다. 비교적 머리가 클 때까지 LA에서 자란 태미와 리처드나 겨우 삼촌의 얼굴을 기억할까 말까 했다.

  세 번의 재활은 슈보의 명의로 된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스튜디오와 예금을 모두 날려 먹었다. 집안의 돈을 끌어다 쓰지 않았다면 마지막에는 사설 요양원은커녕 시에서 운영하는 부랑자들을 위한 센터에도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곳은 대개 돈보다 값비싼 것, 예컨대 환자 스스로 낫고자 하는 의지를 요구했으니까.

  마지막 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슈보는 LA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의 이십 대는 반복되는 중독과 입원, 금단증상과 재발로 이미 하염없이 망가져 있었고 다니던 대학에서도 제적 처리된 지 오래였다. 할머니는 막내아들이 그렇게 자란 것을 웨이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메커니즘에 따라 본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녀는 책임을 질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어머니. 걔가 초등학생일 때 도시락을 싸주지 못한 거나 학예회에 한 번 가보지 않은 게 지금 그 애 인생이 그 꼴인 걸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고요.” 린타오가 여러 차례 전선 너머의 노모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의 한숨은 그녀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홍 롱 팰리스는 쉬린타오나 쉬슈보와 마찬가지로 헬렌 웡의 피조물이었고, 그녀는 장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팔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슈보가 집에서 달아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슈보가 도망친 계기를 짐작하기 위해 유별한 추리력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중독자들은 우연한 계기로 고꾸라지고 주변인을 실망시켰다는 데서 더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할머니 역시 집단 테라피 시간에 맞춰 외출한 슈보가 밤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대강 정황을 파악했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몸이 더는 그녀의 정신만큼이나 강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로스앤젤레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녹색 표지판이 그들을 반겼다. 태미가 그것을 가리켰다.

  “다 왔네요.”

  “거의 다 왔지. 시내로 들어가면 교통체증 때문에 한참 걸릴 거야.”

  린타오가 정정했다.

  웨이리가 아직 ‘환영합니다Welcome to’까지밖에 읽지 못한 줄도 모르고 그들의 차는 도시의 경계를 빠르게 넘었다. 목적지에 완전히 도착하기까지는 정말로 40분이 더 걸렸다. 아버지는 종합병원의 병실에 입원해 있는 할머니를 만나고 오겠다며 아이들만 먼저 집 앞에 내려주었다.

  이른 저녁인데도 잘 가꿔진 잔디밭과 2층 주택이 늘어선 동네는 고요했다. 팜스의 할머니 댁은 언제나 손님으로 복작였고 식탁은 그들을 위한 진수성찬으로 채워졌었다. 그들에게 이 집은 디즈니랜드처럼 청교도인들의 기념일이든 중국식 명절이든 특별한 날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날에 아무도 없이 휑하니 비어 있는 집은 처음이었다.

  “실례합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리처드가 외쳤다. 불 꺼진 복도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인사만이 울렸다. 웨이리가 태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멀미를 할 거라는 이유로 출발 전 게임기를 압수당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있었다.

  “이제 닌텐도 해도 돼?”

  “잠깐 기다려.”

  태미는 우선 어린 동생의 어깨를 붙잡고 운동화를 벗게 한 뒤 슬리퍼를 내어주었다. 할머니가 흙 묻은 신발을 집안에 그대로 신고 들어오는 야만적인 문화를 경멸한다는 사실이 용케 떠오른 덕분이었다. 챙겨온 짐은 거실 탁자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아버지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남매는 피자를 주문해 제퍼디를 보며 나눠 먹고 1층의 손님용 욕실에서 차례로 목욕했다. 세면대에 반쯤 사용한 치약과 면도기 따위의 자질구레한 생활용품이 놓여 있었다. 리처드는 이를 닦다 말고 거울 달린 찬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은 처방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진통제와 반창고, 면봉이 다였다.

 

  유통기한이 살짝 지난 프룻 룹스는 큼큼한 냄새가 났지만 먹을 만했다. 할머니의 집에서, 할머니의 식탁에서 고작 시리얼로 끼니를 때우다니 꿈속인 것만 같다고 태미는 생각했다. 태연하게 스푼을 휘적이는 남동생들은 아직까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자칫하면 가족을 단번에 둘이나 잃는 상황을 앞두고도 웨이리는 우유를 부은 그릇에서 터키석 색 시리얼만 건져내기 바빴다. 그러다 질려서 드디어 식사를 시작할 마음이 들면 남은 시리얼은 이미 너무 흐물거려서 먹을 수 없게 되겠지만, 그는 지난날의 실수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매일 아침 시시포스처럼 바보 같은 장난을 반복했다.

  짧은 아침 식사 자리에서도 리처드의 노키아는 끊임없이 진동했고 그는 눈앞의 현실보다는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더 흥미가 있는 듯했다.

  태미는 똑똑한 여자아이였고, 그런 소녀들이 으레 그렇듯이 기질적으로 예민해 언제나 불안에 떨었으며, 그녀의 감은 특히 불길한 쪽으로 대부분 정확히 들어맞았다. 지난밤 아버지는 그들을 깨우지도 않고 동틀 녘에나 들어와 옷만 갈아입은 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점심 즈음 리처드가 자판을 달칵거리더니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나갔다 올게.”

  “어디 가는데?”

  “산타모니카.”

  태미가 초조하게 손톱 주변의 거스러미를 뜯었다.

  “안 돼. 너무 멀어.”

  리처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멀어. 택시 타면 이십 분밖에 안 걸린대.”

  “그것도 네 친구들이 알려준 거야?”

  “질투하지 마, 태미.”

  “뭐라고?”

  게임기를 쥐고 거실 바닥을 구르던 웨이리가 험악해지는 분위기에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바다 가?”

  “안 가.”

  리처드와 태미가 동시에 대답했다. 한눈을 판 사이에 붉은 모자를 쓴 이탈리아인 배관공이 그대로 식인식물의 입속으로 돌진했다. 게임 오버 문구가 뜬 줄도 모르고 바다에 가고 싶다며 칭얼거리는 웨이리를 두고 태미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갈 거면 쟤도 데려가.”

  리처드가 느긋하게 깍지를 껴 뒤통수를 받쳤다.

  “그래. 하지만 분명히 잃어버릴걸.”

  “그게 형으로서 할 말이니?”

  핀잔을 듣고도 리처드는 천연덕스러웠다.

  “사실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다 같이 가든가.”

  먼저 제안해야 한다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말투가 샐쭉해졌다.

  “얼마 있어?”

  “80달러쯤.”

  “택시비 절반 내.” 

  리처드가 선심 쓴다는 듯이 동행을 허락해주었다. 태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장보다 고요한 집에 홀로 남아 있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못 미더운 둘째에게 더 어린 동생을 맡기고 걱정 없이 LA 시내를 누빌 배짱도 없었다.

  옆에서 웨이리가 주머니에서 벨크로로 여닫는 어린이용 지갑을 꺼내 내밀었다.

  "나도 3달러 있어!"

 

 

 

*

 

 

 

  <더 어컴플리스The Accomplices>는 신스팝을 주력으로 하는 얼터너티브 밴드로, 2005년 오리건의 한적한 시골에서 대학교 동창생 네 명에 의해 결성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삼 년간의 무명 기간을 거쳐 네 번째 앨범이 빌보드 상위권에 차트 인, 그해 말에는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며 탄탄대로를 걸은 그들은 2024년 데뷔 이십 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밴드의 전기 영화 겸 다큐멘터리의 음향감독으로 리처드 이난 쉬가 기용되면서 그와 처음으로 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서른두 살이 된 리처드는 이십 년 전보다 두 배 많은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악기를 다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동안 여러 음악가들이 그의 가슴 속에 불길을 지폈다가 생명을 잃고 바스러져 사라졌지만 여전히 <더 어컴플리스>의 오랜 팬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아시아인인 부모님이 일하는 걸 금지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 항상 재정난에 시달리던 학창 시절에도 한번 그들의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2006년 8월의 어느 금요일, 노을이 지기 전 마지막 한 줌의 뙤약볕이 내리쬐는 가운데 해변에 설치된 조악한 무대에서 오프닝을 준비하던 무명의 밴드 멤버들은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심심풀이로 모여든 관중 속에 그들을 보러 온 팬이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날 공연의 조건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온 짜고 습한 공기는 그들이 사용하는 전자악기에 끈적하게 달라붙었고 공연이 아닌 바다를 보러 온 관광객들은 어디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뚱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느슨한 긴장감과 무심함이 감도는 정적 속에 멜로디의 첫 소절이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서쪽의 바다를 등지는 방향으로 설치된 무대는 그늘에 잠겼지만 관객들은 햇빛을 정면에서 받고 있었다. 찡그린 표정이 더위 탓인지 음악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보컬은 금방이라도 구토할 것 같은 심정으로 마이크를 붙잡았다. 무대는 작았고 저만치서 부두의 놀이기구를 탄 사람들이 내지르는 비명이, 파도가 모래를 쓸어내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그들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하지만 스피커는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튼튼했고, 샘플러의 감촉은 그들이 한데 뭉쳐 첫 앨범의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기숙사 방에서와같이 익숙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몸을 양쪽으로 흔들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베이시스트는 후렴구에 다다라서야 관객을 마주할 용기를 냈다. 다른 멤버들은 이미 그들의 노래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느라 혼이 빠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만이 모래사장 한구석에서 일어난 촌극의 유일한 목격자였다.

  헐벗은 차림으로 적당히 태운 피부를 과시하는 LA의 주민들 틈에서 남루한 행색의 남자는 한눈에도 튀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태양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돌아서서 달려 나갔다.

  이윽고 인파를 뚫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를 쫓았다.

  “삼촌叔叔!” 아이들은 그들만의 호칭으로 그를 불러댔다. “삼촌!"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애가 영어로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삼촌! 할머니랑 아빠가 기다려요!”

  사내의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아이들이 잠시 경계를 늦추었다. 그는 뒤를 돌아보려는 듯이 목과 어깨를 움칠거리다 불현듯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다시 내달리기 시작했다. 얇은 플립플랍이 발뒤꿈치 아래에서 위태롭게 달랑거리다 툭 떨어졌다. 사내는 신발이 벗겨져도 개의치 않고 해변을 따라 달렸다. 맞은편에서 사진을 찍던 연인들, 아이스크림을 들고 걷던 친구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던 가족들이 그와 어깨를 부딪치고 불쾌감을 표했지만 상대는 이미 자리를 뜬 뒤였다.

  남자애가 행인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바닥에 내팽개쳐진 슬리퍼를 모아 들었다. 그가 누이에게 무어라 속삭였다. 그녀는 힘없이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한번 외쳤다.

  “삼촌!”

  숨을 몰아쉬는 여자애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으로 새빨갰고 새된 목소리는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사내는 부름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점점 멀어졌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해안선을 따라 길고 고운 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며.

  “제발 떠나지 마세요…….”

  이제 외침은 중얼거림에 불과했다.

  그때 남매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가려져 있던 그 소년은 줄곧 소란과는 동떨어져 있다가 오로지 자신의 비극만이 비극인 양 탄식을 내질렀다. 헬륨 풍선 하나가 바람에 휩쓸려 날아올랐다. 풍선은 사내와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이는 고개를 젖히고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달렸다. 발밑 한번 살피지 않고도 용케 넘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풍선은 그로서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는 무자비한 속도로 날아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그 모든 혼란으로부터 3마일 떨어진 골목에서, 스물다섯 살의 마버릭 레냐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생의 유예 기간이 끝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고 있었다. 이미 남들보다 입학도 졸업도 늦었으니 실은 그 깨달음도 이르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에게는 약간의 모아둔 돈과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이 있었고, 주로 인맥을 통해 들어온 불안정한 일자리 권유 몇 건과 가족들이 또 한 번 이사를 갔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 어느 것도 나침반이 되어주지는 못했지만, 마버릭은 전 기숙사 룸메이트의 사촌 형이 하는 레스토랑에서 방학 동안만 일시적으로 서빙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아들였고, 그 덕에 마지막 여름 방학을 로브스터를 파는 바닷가의 어느 식당에서 비질을 하며 보내고 있었다.

  알고 보니 로브스터는 깔끔하게 먹기가 거의 불가능한 생물이었다. 사람들은 허벅지에 냅킨 한 장을 올려두고 세 살배기로 돌아간 양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다음 그것을 청소할 마버릭에게 5달러가량의 팁을 주문표에 끼워 건넸다. 그러면 마버릭은 묵묵히 카드를 긁고 근엄한 표정의 에이브러햄 링컨을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영수증을 갖다주었다.

  손님이 적은 틈을 타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가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냄새나고 팔 아픈 업무이기는 했지만 잠시 바람을 쐴 수 있어 좋았다. 마버릭은 수거함에 쓰레기통 바닥에 붙은 먼지 한 조각까지 꼼꼼히 쏟아내고 돌아섰다. 그림자 하나가 그의 발치에 드리웠다.

  그것은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과 작은 점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음 그리고 또 다음 순간에 걸쳐 그림자는 점차 커다래졌다.

  머리 위로 풍선 하나가 바람에 휩쓸려 마버릭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겉면에 그려진 캐릭터와 시선을 맞추었다. 붉은 몸체에 동그란 푸른 눈을 가진 그 얼굴의 주인은 그해 초여름에 개봉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카>의 주인공 라이트닝 맥퀸이었다. 자동차 모양의 은박 풍선이 반쯤 찌그러진 채 그의 눈앞에서 비실비실 휘날렸다.

  마버릭은 바람이 빠지다 만 풍선을 낚아채 소매로 표면을 닦았다. 그것을 놓치고 울고 있을지도 모를 어느 가여운 아이와 우연히 마주치기를 바랐지만, 근방에 주인으로 추정되는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근처의 울타리에 풍선 줄을 묶어두고 손바닥을 한번 턴 다음 미련 없이 삶의 다음 단계로 떠났다.

 

 

 

*

 

 

 

  12월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한창 성수기였고 즉흥적으로 구한 비행기표는 평상시의 두 배를 넘는 가격이었다. 느릿느릿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는 마버릭 옆에서 이미 수속을 마친 웨이리가 기웃거렸다.

  “마버릭, 돈 부족해요? 내가 대신 낼까요?”

  “고맙지만 괜찮아요.”

  다소 무례한 제안을 정중하게 사양하고서 여권과 카드를 직원에게 내밀었다. 그와 저 소년은 기본적인 속도가 너무나 달라서 자칫 사소한 행동도 서로에게 전혀 다른 의도로 읽힐 여지가 다분했다. 직관적인 이해와 공감을 전제하지 않고 언어를 꼭 거쳐 풀이되어야만 하는 관계에서는 피로가 쌓이는 속도에 가중치가 붙기 마련이었다.

  마버릭은 어째서 웨이리가 휴가를 함께 보낼 상대로 그를 골랐는지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구태여 묻는다면 웨이리는 명료한 답을 내어줄 테고, 그건 아마 진실이겠지만, 그게 마버릭 스스로 납득 가능한 설명인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그는 휴일에 이불 속에 웅크려 오래된 멜로 영화를 보거나 자원봉사를 하러 나가는 사람이었고 웨이리는 어느 쪽이든 지루해할 것만 같았으니까. 마버릭은 내심 그가 여행 계획을 잊고 먼저 떠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던전 파훼 후의 의무적인 검진 절차를 거치고 가방을 챙겨 숙소를 나섰을 때, 로비에 서 있는 웨이리의 모습은 다소 뜻밖이었다.

  마버릭은 자신이 품었던 의심과 부실한 신뢰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다가섰다. 웨이리가 그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할래요?”

  대뜸 떨어진 질문에 마버릭이 눈을 끔벅였다. 그들의 대화가 재즈 클럽의 즉흥 무대였다면 아마 제때 서로의 리듬을 받아주지 못해 듬성듬성 구멍이 난 연주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자가 조금 어긋나면 어떠한가? 몇 분씩이나 정적 속에 앉아 있거나 일부러 불협화음을 모아 내는 것도 음악으로 쳐주는 게 현대의 예술인데. 음악이든 대화 예절이든 웨이리는 세상의 범속한 규칙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멍하니 질문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마버릭에게 웨이리가 재차 물었다.

  “공항까지요. 택시 탈 거예요? 날아갈래요? 태워 줄까요?”

  그러니까 그런 뜻이었군. 마버릭은 한 박자 늦게 웨이리를 따라잡았다. 그는 언젠가 그가 구조했던 동물들을 떠올렸다. 로키산맥의 붉은꼬리매와 대평원의 검독수리를. 차에 치여 다리가 부러졌거나 농약을 잘못 먹은 야생의 새들은 우리에서 놓여나자마자 돌아보지도 않고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펼쳤다. 웨이리는 치료가 필요한 야생동물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그 새에 올라타는 것이 마버릭에게는 어쩐지 비윤리적으로 느껴졌다.

  “역시 택시가 좋겠어요….”

  “좋은 선택이에요! 안 그래도 걱정됐거든요.”

  어이쿠. 방심한 사이 또다시 웨이리가 앞서 나갔다. 마버릭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걱정돼요?”

  “마브가 졸다가 내 등에서 굴러떨어질까 봐요.”

  웨이리는 진지했다. 드물게 장난기가 빠진 담백한 목소리가 오히려 더욱 놀리는 것처럼 들렸다. 마버릭은 그 자신 역시 이능력자라고 해명할까 고민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똑같이 비행할 줄 알아도 날개 달린 자의 감각은 어딘가 다르겠거니 싶었다.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여객기의 일반석은 기억 속에서보다 좁아서 반듯하게 허리를 세우고 앉아도 앞사람의 등받이에 무릎이 닿았다. 이륙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웨이리는 비좁은 좌석에 한껏 몸을 구겨 넣은 마버릭의 사진을 우스꽝스러운 구도로 서너 장 찍어 SNS에 올렸다. 곧바로 알림이 쏟아졌다. 마버릭은 시끄럽게 진동하는 휴대전화를 일찌감치 끄고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본부의 개인실은 그가 거쳐온 그 어떤 숙소보다도 고급스러웠고 던전을 쫓아다닌 지난 몇 달간 마하의 전세기 역시 수차례 이용했지만 온갖 특별 대우에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했다. 특히 스톡홀름 사태의 유명세는 더더욱 달갑지 않았다. 비행기에 올라타기까지만 해도 이미 여럿이 그를 알아보고 다가왔다. 웨이리와 함께 다니면 배로 눈에 띄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안대를 꺼내며 마버릭은 허튼 상상을 했다. 이보다 더 심해지면 산으로 도망칠까? 요세미티에는 그를 알아보는 이가 없을까? 하지만 그도 알았다. 소용없는 짓이다. 더군다나 요즘은 국립공원에서도 와이파이가 된다고 하니까.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저가 항공사와 국제재난전략기구의 최신식 비행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좌석마다 달린 세 겹의 아크릴 창을 밀어 열 수는 없다는 것. 창밖에는 여름이 한창이었다. 활주로에서 경광봉을 휘젓는 직원들이 안전모 아래로 고인 땀이 들어가지 않도록 눈꺼풀을 자꾸만 깜빡였다. 마버릭은 그들 쪽으로 바람을 한 줄기 보내주었다.

  "남반구는 신기하지 않아요?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 같아요."

  웨이리가 상체를 기울여 바깥의 누군가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마버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감상은 사실 정확히 그 반대였다. 거꾸로가 아닌 정방향으로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 버린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가을의 초입에 만났다. 뉴욕의 가을은 그 도시에 세워진 상아색 건물들과 무척 닮아 있었다. 그곳에서 한 계절을 함께 일했다. 이제 마땅히 겨울이 와야 하는 차례인데 여름을 맞고 있자니 한눈판 사이 일 년이 흘러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마버릭은 이를 구태여 설명하지 않았고 그래서 이어진 웨이리의 질문은 엉뚱하게 들렸다.

  "그럼 좀 젊어진 기분이 들어요?"

  잘 모르겠다는 뜻으로 마버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난 계속 나이가 드는데 당신은 계속 젊어져서 이렇게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으면 엄청 재밌을 거예요."

  웨이리가 양손의 검지를 펼쳐 서서히 거리를 좁히더니 손끝을 맞댔다.

  "그거 아무래도 표절 같은데…."

  "아하하! 그럼 난 그대로 있을 테니 마브만 젊어지는 건 어때요? 스물다섯 살이면 체력도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음." 마버릭은 고민하는 척 뜸을 들였다. "그래도 역시 지금이 좋은 것 같아."

  "왜요?"

  되묻는 눈이 무구했다. 그의 동행인은 때로 아이들보다도 아이 같았다. 무지하기 때문일까? 마버릭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왜냐하면……."

 

  그가 처음으로 가진 직업, 그러니까 집 앞에 가판대를 세워놓고 설탕을 녹인 물에 레몬을 띄워 행인들에게 강매하는 일이 아닌 ‘진짜’ 첫 직업은 스무디 가게의 종업원이었다. 열여섯 살이었고, 드디어 고등학생으로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주말을 포함해 주에 나흘씩을 출근해 손님들이 고른 각종 재료를 믹서기에 넣고 갈거나 컵을 씻어 개수대 위에 엎어두고 끈적끈적한 바닥을 쓸고 닦았다. 손끝에 닿는 얼음과 우유와 물크러진 과일의 잔해는 뒤섞여 기묘한 감촉을 만들어냈다. 진흙탕이 되어버린 녹다 만 눈처럼. 새크라멘토에서는 한겨울에도 눈이 희귀했고 냉방을 해둔 가게 안은 여름 같지 않게 쌀쌀했으므로 믹서기 바닥을 훑어 비워낼 때면 눈사람을 빚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은 그의 동생들이 찾아와 매장 한구석에서 그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 마사와 멜라니는 마버릭이 만들어준 음료를 작은 스푼으로 떠서 한입씩 아주 천천히 나눠 먹었다. 계산대에서 파는 엠앤엠즈를 한 봉지씩 결제해 갖다주면 내용물을 색깔별로 분류하며 노느라 반나절이 금방 흘렀다. “마사와 멜라니라서 엠앤엠이야.” 마버릭이 그렇게 말하면 마사가 되물었다. “그럼 마버릭의 M은 어디 있어?” 마버릭은 손바닥을 펼쳐 선명하게 파인 네 갈래의 금을 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그의 체격만을 보고 고등학교 풋볼 팀의 코치가 그를 1군에 밀어 넣었을 때는 정말이지 곤란했다. 마버릭 레냐의 운동 신경은 그의 평소 행실보다는 멀쩡한 축에 속했지만 대신 호승심이 결여되어 있었다. 상대를 몸통으로 들이받고 달리고 포효하며 야만적으로 승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다. 결국 연습 시합에서 무력하게 걷어차이고 정강이에 골절상을 입은 그는 2주 동안이나 목발을 짚고 다녔다. 풋볼 팀에서는 무사히 탈퇴할 수 있었지만 깁스를 풀 때까지 일을 쉬어야 했다. 병원에 목발을 반납하고 마침내 가게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점장의 조카가 카운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튼튼하게 다시 붙은 마버릭의 뼈와 근육과 달리 그의 부모는 그러지 못했다. 그 무렵 에스트라다-레냐 부부 사이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사랑은 알코올과는 달라서 증발하고 남은 자리가 항상 말끔하지만은 않다는 것, 믿음과 기대가 배반당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는 것, 애정은 쉽게 손상되고 변질되기 마련이라는 것을 당시의 마버릭은 미처 몰랐다. 지금은 알았지만, 그 지식을 삶에 적용 가능한 형태로 체화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시차를 기다려주지 않고 아버지는 그들 가족을 떠났다. 통계적으로 모든 미국인 부부의 30퍼센트는 이혼을 한 번 이상 경험한다. 적어도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는 기다릴지 기다리지 않을지만이 갈릴 뿐, 결국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스무 살에는 국도 근처 다이너의 주방에서 일했다. 비건 음식점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마버릭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달걀을 깨뜨려 폭신한 팬케이크를 구워냈다. 손끝에서는 매일 기름과 꿀의 냄새가 났다. 한때 그것이 구원의 징표이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노동과 피로의 증거일 따름이었다.

  쓰고 검기만 한 커피와 달착지근한 팬케이크를 파는 다이너에는 주유기 두 대와 낡아빠진 코인 세탁소, 객실 열두 개짜리 싸구려 모텔이 딸려 있었다.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대개 기름을 채우고 밀린 빨래도 해치웠지만 하룻밤 묵기까지 하는 이는 드물었다. 주방장도 서빙을 맡은 중년의 웨이트리스도 낡은 차를 끌고 출퇴근을 했다. 투숙객보다 죽은 파리 시체가 더 많은 모텔에 장기 숙박 고객은 단 두 명뿐이었다. 마버릭, 그리고 바로 옆방의 대마 냄새를 풀풀 풍기는 라트비아인 남자.

  취해 있거나 취해 있지 않거나 행인과 눈이 마주치면 그 남자는 모어로 어떤 한 단어만을 반복해 외치는 기행을 선보였는데, 근방에는 라트비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자는 마버릭보다 먼저 모텔에 와서 그 방에 묵다가 마버릭보다 먼저 방을 뺐다. 어느 날 퇴근을 하고 돌아와 보니 관리인이 그의 방문 앞에서 요란하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자 그녀가 강한 남부식 억양으로 말했다. "나 원, 냄새가 이렇게 심해서야 우째 다음 손님을 받느냐구."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마버릭은 이웃이 영영 떠났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벽지에 밴 누런 자국과 환풍구의 때까지 남자의 탓으로 돌리며 한참을 투덜거렸다.

  떠나야 할 이유가 생길 때까지 머무르는 것도 정착이라고 볼 수 있을까. 빨랫감을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마버릭은 빙글빙글 돌아가는 통돌이를 멍하니 노려보았다. 꼭 자신이 그 속에 내던져진 처지 같았다. 풍속에 맞추어 떠돌며 일시적인 안전지대를 찾아 딛는 삶. 마버릭은 손등으로 뻑뻑한 관자놀 부근을 문질렀다. 진작에 사전을 한 권 사 올걸 그랬다는 후회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듬해 그는 다른 주의 대학에 입학했다. 학교의 수많은 교양 강좌 중에서 북유럽 소국의 언어를 가르치는 수업은 없었다. 마버릭은 잠시 아쉬움을 느꼈고, 그 뒤로는 아주 오랫동안 도로변의 다이너와 연하늘색 페인트로 외벽을 칠해 애써 발랄함을 가장해 보려던 모텔, 그리고 그곳의 이웃에 대해서는 잊고 지냈다.

 

  왜 불현듯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O. R. 탐보에서 케이프타운 국제공항까지는 고작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 시간을 채우기 위해 마버릭은 좀 더 산뜻한 추억들을 꺼낼 수도 있었다. 웨이리의 젊음과 공명할 수 있고 그의 흥미를 자극할 만한 이야기 말이다. 예컨대 이십 대 초반의 어느 날에는 모르는 사람의 밴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허기를 느끼며 깨어났다든가, 그 길로 뛰쳐나와 타코벨에서 메뉴를 여섯 개쯤 시키고 나서야 간밤 처음으로 대마를 피워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일이라든지. 혹은 대학 동창들과 캠핑을 가 RV 지붕에 누워 유성을 본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가 보기보다 야외 활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에 힘을 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케이프타운은 하이킹으로도 유명한 지역이니 대화 주제는 자연스레 일주일간의 휴가 동안 그들이 방문할 관광 명소와 체험할 활동들로 바뀌었을 것이다.

  웨이리가 빨대로 잔을 휘저으며 아쉬운 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그 단어를 외워뒀으면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이십 년도 더 된 일인걸. 어쩌면 라트비아어조차 아닐지도 몰라."

  "그래도요. 어쩌면 '용서한다'가 아니었을까요?"

  웨이리는 자신의 요청대로 승무원이 얼음을 한가득 담아 내준 음료를 겁도 없이 단번에 쭉 빨아들였다. 두통의 반격에 당한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마버릭은 엄지로 웨이리의 이마를 꾹 눌러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그냥 그럴 것 같아요.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타임스퀘어에도 그런 사람들 많거든요. 미쳐서는 멋대로 남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요. 아니면 남들을 용서하려다가 미쳤거나."

  이제는 윤곽조차 흐릿한, 한 시절을 스쳐 지나간 얼굴들을 곰곰이 생각해 봐도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정말 그런 거라면 조금 슬플 것 같네……."

  마버릭이 중얼거렸다. 듣지 못한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기 때문에 마버릭 역시 입을 다물었다.

 

 

  웨이리가 호텔 프런트의 직원에게 윙크하며 말을 거는 동안 마버릭은 한발 물러나 있었다. 하품이 새어 나왔다. 헌터란 도통 여독이 풀릴 새가 없는 직업이었다.

  “자, 가요, 마버릭! 가방은 이곳에 맡기고요. 체크인은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아요!”

  “가다니, 어디로요?”

  “그야 케이프타운을 즐기러죠!”

  웨이리가 직원에게 받은 지도를 펼쳤다.

  “란두드노 해변은 어때요? 파도가 거세서 서핑하기에 딱 좋대요!”

  “잠깐만요, 웨이리.” 마버릭이 지도를 뺏어 위아래를 뒤집고는 돌려주었다. “거꾸로 들었어요.”

  “아하. 그냥 신기하게 생긴 알파벳이라고만 생각했어요.”

  “클링온어 문화권은 아니었나 봐…. 아쉽게 됐네요.”

  그 대답이 그의 유머 감각을 정확히 관통했는지 웨이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마버릭은 덩달아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동료의 시선이 여전히 종이 위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손끝으로 한 지점을 톡톡 가리켰다. 호텔에서 해변까지 반듯하게 난 흰 선을 따라 짚자 웨이리가 음, 하고 이해하는 시늉을 했지만 그 정도 연기는 아무리 둔감한 마버릭이라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릴 때 길 자주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지도는 자연스럽게 웨이리에게서 마버릭으로 양도되었다.

  “뭐든 자주 잃어버렸죠. 연필이라든가, 구슬, 집 열쇠, 손에 쥘 수 있는 건 뭐든지요. 하지만 아뇨, 길을 잃은 적은 없어요.” 선글라스 너머로 은회색 눈이 장난스럽게 찡긋거렸다. “난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잔뜩 겁에 질리거나 화가 나서 나를 찾으러 다닌 건 다른 사람들이니까요. 결국 그들이 나를 잃어버린 셈이죠.”

  애초부터 두 사람에게 지도는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날개를 펼치고, 공기의 흐름을 타고 해풍에 실려 온 땀과 소금의 냄새를 쫓으면 될 테니까. 마버릭은 쉽게 수긍하며 지도를 반듯하게 접어 겉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하긴 아무도 어린 웨이리를 보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당신은 결코 헤매는 것처럼 보이지 않거든….”

  “정확해요, 마버릭.” 웨이리가 기지개를 쭉 펴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바로 그거예요.”

  그리고 그는 한여름의 따가운 햇볕 속으로 곧장 걸어 나갔다. 거침없이, 마치 무언가를 쫓아 나서는 것처럼.

  마버릭은 그 뒷모습이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눈썹 위로 느긋하게 손차양을 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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