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지 점프를 하다 (210919)
장신의 독일인이 어깨를 움츠린 채 절벽 아래를 굽어본다. 그가 무어라 모국의 언어로 중얼거렸다. 억센 고수머리는 홍당무 같고, 잿빛 피부는 방금 관에서 일어난 듯한데, 벌어진 입에서 나오는 숨은 뜨겁고 축축하고 화한 냄새를 풍기는 게 기묘했다. 웨이리는 조금 뒤떨어진 곳에 다리를 뻗고 앉아 매그가 비틀거리며 발치를 내려다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곁에 맥주 몇 병이 나뒹굴었다. 전부 말끔히 비워진 채였다. 그 정도로 취할 치들은 아니었으니 매그의 불온한 발걸음은 본능적인 공포의 산물이거나 던전 파훼의 여파, 혹은 최근 그가 겪고 있다던 중독 증세의 한 가지일 것이다.
매그가 고개를 돌리고 외쳤다.
“…워요!”
높은 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매그의 목소리를 낮은 곳으로 휩쓸고 가 버린 탓에, 그의 말은 조각나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뭐라고요?”
성당이나 장례식장, 수업 시간의 학교처럼 큰소리를 내는 것이 금지된 공간에서 소리를 지르는 기분으로 웨이리가 되물었다.
매그는 살짝 답답한 듯도 하고 부끄럽거나 신이 난 듯하기도 한 상기된 얼굴로 반복했다.
“아름답다고요! 수, 수면이 새까만데, 하늘이 그대로 반사, 반사되어서….”
그가 다시 절벽 바깥을 향해 돌아섰다. 문장을 마치지 않아도, 적절한 묘사를 골라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풍경은 당장 그들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웨이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털었다.
“달이 두 개예요.”
가까이 다가온 웨이리에게 매그가 알려주었다. 희망봉의 천공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별들은 빼곡히 몇억 광년 너머에서 제자리를 지켰으며 정말 매그의 말대로 달은 그들의 머리 위에 하나, 그들의 발아래에 파도의 결을 따라 우그러진 모양으로 하나가 떠 있었다.
“불길하네요!” 웨이리가 흥얼거렸다. “좋아요, 매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으니 슬슬 해 보죠.”
“지, 지금 말이죠.”
“네, 지금이요.”
매그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추락의 순간에 심장은 미친 듯이 경보를 울리며 뛰어댈 것이고 호흡은 갈피를 잃고 엉망으로 뒤엉킬 텐데. 그래도 웨이리는 매번 날개 없는 사람들이 그들만의 의식을 치르도록 기다려주었다.
“절벽의 튀어나온 부분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요! 난 당신이 의식을 잃어도 공중에서 낚아챌 수 있지만, 까마귀 발톱에 붙들려 병원까지 날아가는 게 응급구조의 기본 수칙을 위반하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으니까요.”
장황한 경고 겸 농담에 매그는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더니 다시 세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주먹을 꽉 쥐고 양팔을 앞뒤로 교차하며 달려 나갔다.
매그의 두 발이 지상을 벗어났을 때 웨이리는 그에게 안경을 벗어두라고 조언하는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웨이리는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며 매그를 쫓아 뛰었다. 보통의 인간처럼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대로 곤두박질치는 대신 그는 깃과 부리를 꺼냈다. 상승도 하강도 웨이리에게는 선택에 불과했다.
몇 미터 앞에서 매그가 점점 가까워지는 바다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기를 반복하는 모습이 보였다. 웨이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들은 언제나 결심의 순간을 거쳐 뛰어내렸다. 낙하와 비행의 역학에 대해서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당신들과 나 사이의 끈이 얼마나 가늘고 연약한지는 꿈에도 모르는 채로. 내가 당신들에게 가지는 흥미와 호의는 언제 감쪽같이 휘발될지 모르는데도…….
날개를 몸통 가까이 붙이고 화살처럼 공기를 가르며 웨이리는 잠시 고민한다. 그는 매그가 몇 초 더 낙하하기를 기다렸다가 발밑에서 그를 받는 대신 위에서 발톱으로 그의 어깨를 낚아챘다. 뺨을 긁히더라도 그가 불쾌해하지는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놀랍게도 매그의 안경은 약간 비뚤어지기는 했지만 머리카락과 얽혀 무사히 귀에 걸려 있었다. 먹잇감처럼 붙잡혀 가며 그가 몇 번이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네, 네, 저도 알아요.’ 웨이리는 매그의 발목이 잠기도록 하강해 그를 바닷물에 담갔다. 날카롭게 그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무시하고 곧장 해변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아쉬워도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에요.’
2막 (210920)
네바다의 MGM 그랜드 라스베가스 입구에는 거대한 황금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북부 이탈리아에 본사를 둔 헤르쿨레스가 만드는 모든 자동차는 보닛에 무두질 된 사자 가죽 형상의 금속 로고를 달고 다닌다. 지역을 불문하고 팝 컬처의 손길을 받은 사람들은 얼굴이 붉고 푸른 원숭이를 흉내 내며 그들의 작고 소중한 후손을 두 팔로 받쳐 하늘 높이 들어 올리고는 한다. 권위와 힘, 용맹을 표현하기 위해 인류는 세대와 세대에 걸쳐 벗어나려 애썼던 태초의 초원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여기, 지독히도 떨어지지 않는 날개를 단 두 인간이 있다. 뉴욕, 문명의 정점, 콘크리트 정글의 한가운데에.
칼바람이 불고 당장 5초 후에 눈송이가 흩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12월. WDRR 본사의 옥상에는 다른 수많은 마천루와 같이 헬리콥터가 착륙할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중앙에 그려진 거대한 H와 그 둘레를 감싸는 동그라미가 비상사태에 자주 헌터들을 태우고 드나드는 기체를 안내했다.
그 원의 바깥, 눈에 띄지 않는 구석, 난간 바로 아래에 등을 기대고 앉은 울리 모건스턴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여전히 불친절하다. 남자의 얼굴이 묵묵히 뜻밖의 슬픔을 드러내는데도 쉬웨이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신 그가 지각하는 것은 한겨울의 추위뿐이었다. 그는 여태 두 손과 정강이로 바닥을 짚고 있었고, 까끌까끌한 조각과 먼지가 손바닥을 거뭇하게 더럽혔다. 얇은 외투 한 벌로는 막을 수 없는 한기에 지금의 감정과 사고의 흐름과는 별개로 몸이 잘게 떨렸다.
웨이리는 그대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아니 구름 따위의 영향은 미치지 않을 만큼 높은 고도의 하늘을 닮은 새파란 눈이 천천히 찌그러졌다. 언제나와 같이 온전한 충동과 매우 사적인 호기심이 웨이리를 움직였다. 그는 개의치 않고 혀를 내밀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기 위하여. 뜨겁고 물컹한 살덩이가 차고 건조한 피부 위로 미끄러졌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가면이라도 핥는 기분이었다. 혀끝에서부터 단조로운 짠맛이 느껴졌다.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전에는 사람을 죽였고 오늘은 사람을 살린 남자가 흘리는 눈물이라고 하여 그렇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위선과 기만의 기제든 단죄에의 갈망이든 그저 생리적인 작용이든 울리 모건스턴의 눈물은 갓 태어난 아기, 일국의 독재자, 고아와 병자에게 평생을 헌신한 수녀의 울음과 다를 바 없이 따뜻하고 짭짤했다.
‘우리는 사람이야.’ 동료의 뺨에 축축한 자국을 남기고 멀어지며 웨이리는 그렇게 결정한다. ‘당신과 내가 하늘 위에서 어떠한 죄를 지었든 본래는 지상에 발을 딛고 두 다리로 걸어야 할 존재들이야.’
선good하지 않을지언정 그들은 여전히 사람이었다.
쉬웨이리는 더 이상 울리 모건스턴의 눈에서 하늘을 보지 않는다.
어떤 중력 (210921)
웨이리는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메이휘, 어째서 내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요? 당신과 나, 우리 둘만이 정확하게 발음할 수 있는 그 노래 가사처럼 나는 당신의 얼굴이 익숙했는데…. 바보같이 나는 내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고 착각했지…. 사실 그건 꿈이었을 뿐인데. 그가 아무리 악을 써도 메이휘는 고요하고 차분하다. 편평한 미간과 곧은 눈썹. 다물린 붉은 입술. 웨이리는 그 무표정한 얼굴을 알아본다. 저것은 배신자의 얼굴이다. 저것은 웨이리가 베어서 쟁반 위에 올리지 못한 얼굴이다. 저것은 그가 영영 갖지 못할 순교자의 얼굴이다.
웨이리는 두 날개로 (아니 두 팔로?) 얼굴을 문질러 닦는다. 끔찍한 피로가 급습한다.
그러니까 웨이리는.
이 비행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어요
그는 자신의 뺨이 젖어 들어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한다. 눈물은 콧잔등의 주근깨와 입술 위의 오목한 선을 적시고 아래로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도망치고 싶어. 그는 생각한다. 아니, 입밖으로 소리내어 말했던가? 여자는 미동 없이 그를 바라본다. 한밤중에도 두메이휘는 짙은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 안에 깃든 평온을 숨기고 싶어서일까…. 쉬웨이리는 어떠한 말로도 그녀를 상처입힐 수 없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웠다. 그녀가 미웠다. 그녀는 그녀가 밉다고 소리 지르는 웨이리를 두고 냉정하게 등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차이나타운의 인파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겠지. 더는 유령이 아닌 주제에 우습게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아아, 비통해라! 이 애절한 슬픔이란 얼마나 낯설고 또 그래서 경이로운지! 틈을 비집고 환희가 고개를 들이민다. 웨이리는 이제 숨을 헐떡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그가 흥얼거린다. 인정할게요 나는 아주 옛날부터 엉망이었어요 메이휘는 그저 불씨에 불과하죠. 차갑고 조용한 불. 줄곧 어긋나 있던 육과 영의 세계가 마침내 겹쳐진다. 마비가 풀리고 상실의 감각이 수년의 시차를 건너 실제적인 고통으로 닥쳐왔다. 가슴 중앙이 홧홧하게 쓰라려서 그는 몸을 감싸고 웅크린다. 자기 자신을 조그맣고 사소하게 만든다. 그만 중력에 굴복하고 만다.
내일이면 세상이 무너지겠지만 오늘은 골목마다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210922)
웨이리는 그날 오후부터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치코는 매일 아침 기상청이 공시하는 일기예보를 그에게 읊어주었다. 예정에 없는 비행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2021년 12월 20일 뉴욕시에는 오후 4시부터 먹구름이 꾸물꾸물 하늘을 덮고 5시부터는 눈이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기상청의 예측은 다소 부정확했으며, 그들이 본부 건너편에서 우버를 타고 백화점으로 출발한 지 10분이 지났을 즈음 차창에는 손톱보다도 작고 연약한 눈송이가 하나하나 쌓이고 있었다. 운전사가 무심하게 와이퍼를 켰다. 히터의 열기 때문에 눈은 금세 녹아 사라졌다. ‘낭패네.’ 웨이리는 와이퍼가 부지런히 움직이며 눈을 쓸어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오늘 헬리안테를 최대한 오래 백화점에 붙들어 둘 속셈이었고, 어떤 대화를 나눌지도 미리 고안해두었었다. 전부 저녁은 되어서야 눈발이 흩날리리라는 전제하에서 계획된 사항이었다. 열한 층의 거의 모든 매장을 휩쓸며 구매와 포장과 배송을 마치고 나면 그는 1층의 육중한 유리문 앞에 서서 밖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것 봐요! 눈이 와요! 택시가 잡히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웨이, 당신도 알잖아요. 눈발이 거세지 않을 때 돌아가야 해요.’
‘금방 그칠지도 몰라요. 조금만 기다리죠! 이 백화점 지하에 메릴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컵케이크 가게가 팝업스토어를 열었대요.’
‘대신 대원들에게 나눠줄 것도 사 가기로 해요.’
‘좋아요!’
아쉽게도 위와 같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저녁을 먹고 돌아가자는 제안을 헬리안테가 흔쾌히 수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웨이리의 평소 유난을 의식했는지 홍 롱 팰리스의 이름을 꺼냈지만, 웨이리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좀 더 크리스마스다운 걸 먹고 싶어요.” 고심 끝에 두 사람은 크리스마스다운 식사가 보르도를 곁들인 양고기 스테이크라는 데 동의했고, 백화점 1층의 레스토랑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백화점은 연말 기분을 내거나 웨이리처럼 급하게 크리스마스 쇼핑을 마치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식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운이 좋게도 그들을 알아본 레스토랑의 매니저가 급하게 예약이 취소된 자리를 하나 내주었다. 웨이리는 선수 시절부터 받아온 대우가 익숙하다는 듯 테이블을 차지했지만 헬리안테는 미심쩍고 또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레스토랑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식사는 맛있었다. 웨이리는 와인을 몇 모금 마시더니 차라리 파워에이드를 타서 먹는 게 더 맛있겠다고 투덜거렸고, 헬리안테는 파워에이드보다는 환타를 넣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녀는 때로 웨이리가 만나본 적 없는, 자상하지만 엄격한 선생님 같았다. 누나 같기도 했다. 적어도 올 한 해 그의 ‘진짜’ 누나와 나눈 대화보다 헬리안테와 나눈 단어의 수가 더 많을 것이다.
두 사람은 여섯 개들이 컵케이크 여덟 박스를 반씩 나눠 들고서야 메이시스를 벗어날 수 있었다. 눈발이 거세져 돌아갈 때는 우버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길가에 서서 컵케이크 상자가 쏟아지지 않도록 위태롭게 균형을 잡아가며 뉴욕의 상징적인 노란 택시를 붙잡아 타야 했다.
그들을 태운 인도인 기사는 말수가 적었고, 라디오는 뉴스 채널로 주파수가 맞춰져 있었다.
품에 쇼핑백을 한가득 안은 채 웨이리가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있죠, 헬리. 왜 당신 선물은 안 사는지 안 물어 봐요?”
김 서린 창문에 시선을 두고 있던 헬리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질문은 무례하기도 하고, 웨이가 곤란할 테니까요.”
“하지만 우린 그 정도 무례는 통용되는 사이이고, 난 그런 거로 곤란해하는 사람이 아닌걸요.”
“신중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좋아요, 웨이. 내 선물은 왜 사지 않았죠?”
“이미 준비해 뒀거든요!”
웨이리가 품속에서 손바닥보다 약간 큰 종이봉투를 꺼냈다. 호아킨을 위해 주문한 인형이나 배스 앤 바디 웍스를 탈탈 털어 구입한 울리의 히말라야 솔트 세트에 비하면 아담한 사이즈였다.
“꼭 크리스마스에 열지는 않아도 돼요.”
“크리스마스 선물인데도요?”
“생일 선물과, 이것저것을 겸한다고 치면 되죠!”
헬리안테는 잠시 고민하더니 마스크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들을 쳐다봤지만,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었는지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다. 헬리안테는 웨이리에게서 봉투를 건네받고, 그들 사이에 놓인 컵케이크 산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그의 어깨를 잠깐 껴안았다가 놓아주었다.
“고마워요.”
본부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내리자 아득한 곳에서 구세군의 종소리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발걸음을 주의하느라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웨이리와 헬리안테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헤어졌다.
개인실로 돌아간 헬리안테가 모자 위에 쌓인 눈을 털어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뒤, 컵케이크 박스를 잠시 노려보며 고민하다 내일을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침대에 들어가기 전 선물 포장을 뜯어보면, 가죽 공책 한 권을 발견할 것이다. 맨 마지막 장에는 검은 깃털이 끼워져 있다.
헬리안테는 그 장을 연다.
부드러운 크림색 종이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다.
‘나는 삶의 진리에 통달했다. 이제 그 깨달음을 완수하고자 떠난다.'
헬리에게.
그래도 연락할게요.
웨이.
하지만 웨이리는 당장 내일 세상이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 공책을 헬리안테가 열어볼 새도 없이 본부를 떠나 도망자가 될 수도 있다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날 아침 치코가 알려준 건 그날의 일기예보뿐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선물
카탄자로 티 캄 로안
WORLD’S BEST FATHER 라고 적힌 머그잔
셀레나 로페즈
WORLD’S BEST BOSS 라고 적힌 머그잔
벨리타 래닝
<초보자를 위한 요리의 A to Z>, <잃어버린 세대의 식탁 - 재즈 시대의 레시피 북>, 캐스 키드슨의 앞치마
레베카 콜린스
주소가 적힌 카드. 가 보면 폐차장이 나오고, 그곳 관리인이 레베카를 한구석으로 안내할 것이다. 그곳에 도요타와 현대, 혼다 등 비교적 값이 저렴한 세단 10대가 세워져 있다. 그중 하나의 유리창에 새로운 카드가 꽂혀져 있을 것이다. 안에는 웨이리의 엉망인 필체로 ‘마음껏 파괴해요!’ 라고 적혀 있다.
이순신
원스텝의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50달러어치의 여분 폴라로이드 팩
문태현
에르메스의 스카프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산적이 되길 바라며!)
케레스
스와로브스키의 카멜레온 장식품
조너선 하커
국도에서 5바퀴쯤 굴러도 팔뚝이 멀쩡할 라이더 재킷. 소 가죽. 완전 멋있는 거.
도상훈
록시땅의 숙면을 위한 아로마 세트, 안대와 베개 커버 포함
로랑 모코에나
에어 조던1 유니버시티 블루
(WDRR의 데이터베이스에 당신 발 사이즈가 등록되어 있단 거 알고 있었어요?)
마버릭 레냐
뉴욕 시내의 홍 롱 팰리스에서 판매한 비건 메뉴의 수익 10%가 NYC 동물 보호소에 기부된다는 계약서와 나이키의 윈드브레이커
(당신이 이 농담을 알아듣길 바라며!)
리즈완 칸 리들리
레미 마틴의 위스키 봉봉 한 상자
(취하지 않게 조심해요!)
선우상현
럼 한 병과 초콜릿, 계피가 들어 있는 바카디의 크리스마스 기프트 에디션
(생으로 마시지 말고 에그 노그로 만들어 마셔요! 계란은 별도 구매!)
헬리안테 제이마치
몽블랑의 사피아노 다이어리
마리아 헨셔
어딘지 비싸 보이고 좋은 향기가 나는 부드러운 손수건
(당신은 너무 자주 울어요!)
건터
디즈니의 동물 캐릭터 12명의 얼굴 모양 스트레스 볼
치즈
견과류 세트
호아킨 베니테즈
온몸에 눈알을 달고 있는 15cm짜리 체브라시카 인형
(눈이 몇 개인지 꼭 세 봐요!)
샤를 드 발리에르
유성 매직으로 사인된 헬멧
(당신의 완벽한 머리에도 잘 맞을 거예요!)
로빈 베하이스
메종 마르지엘라의 동전 지갑
(동전이 아니라 칩을 위한!)
두메이휘
메시지 누락
엘리자벳 로렌스
록키 1부터 5편과 록키 발보아가 수록된 <록키 시리즈 DVD>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세요!)
울리 모건스턴
히말라야 핑크 솔트 본품과 그라인더, 그것을 원재료로 만든 주방세제, 샴푸, 치약과 입욕제
아스틴 A. 러셀
리모와의 캐리어
(청소하기 귀찮을 때 물건을 몽땅 담아버려요!)
나시르 아바스 모하메드 알 레헤마
와인 색상의 양가죽 장갑. 손목 부분에 버튼이 달려 있다.
마르가레테 G. 사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매우 낡았으나 초판본인지는 알 수 없다. 표지 안쪽에 독일어로 무언가가 적혀 있다.
딜런 맥스
프로틴 쉐이크와 에너지 바, 아령 한 세트.
루벤 레나드
오프닝 세레모니의 레오파드 가디건.
놀릴 목적으로 선물한 것이 명백하다.
정 윤
보스턴 발레단의 호두까기 곰 인형 오너먼트 2개
히메야마 아이
베이비메탈과 톰 톰 클럽, 더 프리티 레크리스의 음반과 뱅앤올룹슨의 무선 헤드폰
세르쥬 드 리용쿠르
애플 아이폰13을 예약했다는 영수증과 YSL의 폰 케이스
메이슨 레위
안톤버그의 위스키 봉봉 한 상자
(이건 초콜릿이니까 금주 계획에 어긋나지 않을지도요!)
요세-루이 마테오 가르시아
레이밴의 선글라스
(내겐 없는 것으로 골랐어요!)
누르 아바스 모하메드 알 레헤마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세워져 있는 스노우 볼
새와 남자 (210928)
창밖의 겨울과 손 한 뼘만큼의 거리를 두고 쉬웨이리는 결정을 유보한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얼핏 자비로운 말이 어디서 비롯되었을지 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따진다. 그의 우둔한 사고와 변덕스러운 감정은 번번이 규칙 없이 흔들려서 그 자신 역시도 흐름을 종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분명 연민일 리는 없었다. 그는 간밤의 눈물과 간원을 떠올린다. 그 물기 어린 목소리를 생각하면 지상에서도 배 속의 피가 끓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질투도 증오도 아니었다. 타인들의 어림짐작과 착각과는 달리 그는 군인도 학자도 소년도 시기하지 않았다. 웨이리는 범상하고 세속적인 낱말들을 무감하게 솎아냈다.
이윽고 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자비는 거짓말에 불과한 것이다. 다짐은 허황되고 약속은 어긋나기 마련이다. 그 새는 하나님의 대리인이 아니고 그는 남자의 눈을 쪼아먹지 않을 테지만 간사한 혀를 놀려 거짓을 고할 수는 있었다. 웨이리는 결단을 내렸다. 울리 모건스턴에게 확언과 맹세의 달콤함을 내어주는 대신 그의 죽음은 기만 속에서만 이루어지게 하리라. 만일 웨이리가 또 변덕을 부려 추락을 묵인하기로 마음먹어도 그로서는 잃을 게 없는 거래였다. 천칭의 반대쪽에는 두메이휘가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요, 울리.” 대답하는 입술이 넌지시 호선을 그렸다. 하마터면 콧노래를 흥얼거릴 뻔했다. 웨이리는 오른손을 뻗어 창틀을 쥔 남자의 손등을 덮었다. 울긋불긋하게 멍이 든 손은 어김없이 차가웠다. 시답잖은 장난으로 시간을 흘려보내던 날들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다.
웨이리는 그 손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가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210929)
정말이지 웨이리는 지금 이 순간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었다. 삶에서 이보다 더 적절한 기회는 다신 오지 않을 것 같았다. 크리스마스 이전의 뉴욕에서 경험한 각자의 던전에서 그는 이미 한 번의 생을 마쳤다. 임종의 순간에 그의 침대는 그의 아들딸과 또 그들의 자녀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병실은 곧 터질 것 같은 비눗방울 같은 농담과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버지, 우린 아버지를 항상 사랑할 거예요.’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며 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웨이리는 그것이 결코 자신의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단숨에 몸에 주렁주렁 달린 바늘을 뽑아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추락은 유한했다. 화단에 몸이 처박히는 순간 그는 전율했다. 운명이 안배한 이 감옥이야말로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반증했다.
웨이리는 끝까지 그 무엇도 남기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가 존재했다는 유형과 무형의 흔적은 살아 있는 그에게도 이미 무가치했다. 영예, 부, 훈장,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독일인 학자의 말마따나 그는 현재라는 분절적인 시간에 점으로서 부유하는 사람인 것을. 누군가는 그를 기민하다 평하고 누군가는 그를 우둔하다 평하겠지만 웨이리가 이십오 년 짧은 시간 동안 터득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연인 대체 불가능한 선수 대체 불가능한 영웅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유일무이해질 수 있다. 다른 것은 전부 무의미했다.
보라 눈앞의 이 여인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 그녀가 어쩌면 그를 필요로 할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고 웨이리는 비로소 이해한다. 죽음으로써는 두메이휘에게 영구해질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부재가 그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고 바라건대 한동안은 슬픔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나 그 모든 건 한시적이었다. 여자는 금세 무릎을 털고 일어나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떠날 것이다. 유령들의 차디찬 숨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찰스 강….” 웨이리는 불쑥 내뱉는다. “…이맘때에 보스턴의 강은 얼어붙는대요.”
거기서 당신은 마음껏 비명을 지를 수 있을 것이고 나는 날개를 만들 수도 있어요. 까마귀의 깃이 아닌 천사의 날개를. 어쩌면 당신이 스톡홀름에서 발견한 그 애는 이미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죠 우리는 말 대신 설원에 드러누워 팔다리를 휘저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라요….
웨이리는 거기까지 전부 토해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녀가 이해할 것 같다는 예감, 몇 시간 뒤면 여명이 밝아오리라는 본능적인 직감 같은 것이 가슴을 채웠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그저 그렇게 함께.
우리는 사물처럼 (210929)
웨이리는 그에게 입맞춤을 돌려주지도 그의 등에 팔을 두르지도 않는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체온이 목덜미에 기대어 오는 마르가레테의 뺨으로 옮겨가지도 않도록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삶을 경멸한다고 해도 불행하게도 지긋지긋하게도 애처롭게도 그들은 여전히 한낱 인간이고 물리 법칙에 따른 열전도를 멈출 도리는 없다. 그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고 나면 마르가레테는 웨이리를 놓아줄 것이고 두 사람은 평행선처럼 다시 서로를 스쳐 지나가리라.
그는 그저 그렇게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현재로부터 자신을 서서히 떼어낸다. 정신을 가둔 육신을 한 꺼풀 벗기면 그를 안고 있는 마르가레테의 굽은 등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무척 지치고 초라해 보인다. 한편으로는 충만하고 또 가뿐한 듯하다.
까슬한 입술이 아직까지도 이마에 닿아 있는 것만 같다….
(잠깐, 쉬웨이리는 고작 점에 불과한데 어떻게 마르가레테 사가와 평행할 수 있지?)
(쉬웨이리는 주인공이며 조연인 동시에 또 엑스트라이고 이 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무대의 위인가? 뒤인가? 아래인가?)
그는 이 감사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다. 마르가레테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했지만, 대체 무엇이? 이해를 포기함으로써 마르가레테를 방기하고 떠나는 게 그를 덜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왜 그는 속을 게워내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도 말했던 걸까? 그러나 더는 웨이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즉흥이 아닌 결단이다.
마르가레테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돌아올 것이다. 그는 휘둘리고 기만하고 작별하며 끝끝내 지겨운 삶을 살아낼 것이다. 그저 기물처럼 놓여 있기를 바라는 그에게 사람들은 판을 마련해주고 체스 말처럼 그를 움직일 것이다. 그는 승리하거나 패배하거나 포로로 붙잡히거나 적군의 목을 베겠지만 그것은 전부 마르가레테의 기록으로 남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이 아닌 예언이다.
그래도 웨이리는 슬며시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다. 부디 그 무게가 가까스로 찾은 균형을 깨뜨리지 않기를 바라며. 검고 붉은 머리카락이 한데 섞였다. 불쾌한 긴장감이 심장을 조인다. 그는 숨을 죽인다.
‘우리가 다시 만날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어쩌면 한 번도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별의 때가 시시각각 닥쳐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