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면 아무 이유없이 슬퍼지는 날들이 있다. 해는 푸르게 시들다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세계의 윤곽은 점점 흐릿해진다. A는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도 그런 연약한 마음이 넘실대던 어느 저녁 중 하나이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유독 물크러진 내면은 7월의 숨 막히는 열기와 장마의 산물인 것이다. 그걸 감출 만한 단단한 외피를 기르는 데 소년기를 전부 할애한다. 곱상한 이목구비는 퍽 유용하다. 적당히 웃고 떠들고 호감을 사고 다들 그가 괜찮은 줄 알고 그럼 정말로 슬프지 않은 것 같다. 자라면서 배운 건 보다 능숙하게 흉내내는 법뿐이다. A는 그래서 영악하고 눈치가 빠르고 다정한 척도 멍청한 척도 잘하지만 또 오늘처럼 해가 일찍 죽어버리고 그림자만 남은 밤에는 문득 서글퍼진다.

 

 

 


 

 

 

 

 

  마태오 형제는 오늘도 미사 끝나고 농장 가본댔나?

  아, 예.

 

  성당을 빠져나가는 세경의 등 뒤로 부모님 또래의 다른 신자들이 숙덕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매주 빼먹지 않고 찾아와 미사를 드리는 결혼 적령기의 신실한 미혼 남성은 확실히 화젯거리였다. 제 신상이 요모조모 분해되어 입방아에 오르거나 말거나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차 키를 찾는 손길이 퍽 조급했다. 이제 막 발아한 새싹들이 누군가에게 해코지라도 당할까 걱정하느라 요 며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뽑은 지 얼마 안 된 푸조가 황급히 성당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좌우명은 남에게 폐 끼치지 않기, 인생 목표는 고독사하지 않기인 조신한 크리스천 차세경의 가슴에는 언제나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락 앤 롤 소울과 빠른 퇴사를 위한 사표가 봉인되어 있다. 주말마다 남양주까지 가서 텃밭을 가꾸라니. 입사 초기부터 사장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추가 근무 수당을 요구하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초조하게 입술만 뜯었다. 포상 휴가를 걸었다는 얘기로 반박의 여지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으로 오전 회의가 끝났다. 사내 결속력 증진 따위를 들먹이며 뻔뻔하게 웃는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경은 조용히 눈을 감고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읊조렸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탄이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가톨릭이 모태 신앙이었던 것은 아니다. 멋모르던 새내기 시절, 세경은 베이스를 배워 밴드를 했었다. 이름만 밴드일 뿐이지 사실상 술 퍼먹는 모임이나 다를 바 없었다. 기타 줄 몇 번 퉁기다 눈빛이 오가면 악기를 내려놓고 그 길로 곧장 곱창이나 삽겹살을 먹으러 다녔다. 그 날도 연습실에서 멤버들과 위스키를 나눠 마시고 줄담배를 뻑뻑 피우다 첫 차 운행까지 시간이 애매하게 붕 뜬 탓에 되는 대로 걸었다. 도로변을 따라 걷고 또 걷다 보니 영 현실 감각이 떨어졌다. 셔터를 내린 가게들을 수없이 지나쳤다. 새벽 다섯 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해가 들지 않아 어둑한 거리는 어깨가 으슬으슬 떨릴 만큼 쌀쌀했다. 슬슬 술이 깨면서 머리가 아파왔다. 얌전히 누워 있다 지하철이나 탈걸 후회해봐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다 문득 인기척이 느껴져 정신을 차려보니 한 성당이었다. 성당의 아치형 입구에서 노란 빛이 새어나왔다. 층계 앞을 비질하던 경비원과 눈이 마주쳤다. 학생, 괜찮아? 안색이 안 좋은데 들어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지 그래.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려던 세경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얼굴을 마저 돌리기도 전에 치미는 토기 때문에 바닥으로 진로를 바꿔야 했다. 결국 화단에 몇 시간 전 먹은 걸 전부 와르르 쏟아내고야 말았다.

 

  그 때 가글과 수건을 내어주고 택시비까지 빌려준 신부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미사에 참여했던 게 계기가 됐다. 주님 말씀이 듣기에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흥청망청 소모해버린 지난 몇 달에 위로가 되었다. 개과천선했다기에는 여전히 응하는 술자리가 많았고 밤이 깊도록 길거리를 배회하기도 했지만 세경은 눈에 띄게 성실해졌고 또 조금 말수가 줄었다. 대학 졸업 후 교적을 옮긴 지금도 종종 그 성당을 찾아가고는 했다.

 

  이상의 내용을 면접장에서 웅변했을 때 천천히 손뼉을 두드리며 박수를 치던 사장의 표정을 세경은 여전히 잊지 못했다. 그땐 그게 분명 감동을 못 이기고 보내는 찬사라고 믿었었는데. 돌이켜 보니 사회 초년생의 무모한 고백 따위에 에둘러 민망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졌다. 세경은 발치에 물뿌리개를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 두드렸다.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경건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한적한 남양주의 들판 위로 리베라의 섬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네딕투스 베네딕투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복 받은 세경의 상추가 틀림없이 1위를 할 것이다. 세경이 빠르게 성호를 그었다. 믿어 의심치 않나이다. 아멘.



 

 


 

 

 

 

 

  태어나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생겨난 순서로는 마지막, 머리를 내민 순으로는 첫 번째. 손바닥이 보이도록 손가락을 전부 폈다가 엄지부터 하나씩 접는다. 다시 펼칠 때는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나약해 보이기로는 새끼손가락이 제일 그럴듯하므로 그렇게 세는 게 맞다. 든 것도 없이 오므린 손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종국에는 힘을 풀고 팔을 늘어뜨린다. 퀴퀴한 누비이불이 팔뚝 아래에서 바스락거린다. 간이침대는 이제 저를 위한 자리처럼 익숙하다. 보건실은 본관 1층, 오가는 학생들이 항상 많은 복도에 있다. 미처 맞물리지 못한 창문의 작은 틈으로 커튼이 나부꼈다. 노랗고 부드러운 햇살이 사선으로 늘어지다 사랑의 발치에서 그친다. 벽 건너의 소란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일 같다. 이름을 부르고 정신없이 달음박질하고 수돗가에서 물을 튀기고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 눈을 감고 그리다 보면 눈가가 매캐해지면서 기침이 튀어나온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몸을 추슬러 일어난다. 보건 선생님은 여태 부재중이었지만 며칠 전에 했던 대로 장부를 꺼내 이용 기록을 찾는다. 띄엄띄엄, 그러나 꾸준히 제 이름을 발견한다. 위아래를 연달아 차지한 칸도 눈에 띈다.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세 글자를 맨 아래에 다시 한번 적는다. 그러는 동안 아이들 한 무리가 왁자지껄하게 문을 열고 쏟아져 들어온다. 사랑은 급히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보건실을 벗어난다.

 

  복도를 따라 천천히 걷는다. 귀를 기울이며 상상했던 그림이 창밖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그런 것들은 애초에 사랑과 가까웠던 적이 없다. 그에게 익숙한 단어란 예컨대 뭉근하게 열이 오른 이마라든지 목구멍에 고인 뻣뻣한 숨 따위이다. 미적미적 자리로 가 앉는다. 손을 뒤집어 앞머리에 대어본다. 지끈거리는 감각은 여전하다.

 

  저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은 없으리라고 사랑은 생각한다.

 

  약을 먹어도 뺨은 여전히 뜨끈하다. 옅은 졸음이 눈꺼풀을 자꾸 끌어내린다. 연필을 고쳐 쥐고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견딘다. 다음번에는 잠 오는 약은 먹지 않겠다 다짐하면서도 매번 다음을 상정해야 하는 제 처지가 억울해진다. 연민을 떨치기 위해 가볍게 뺨을 친다. 짝. 짝. 살갗이 들붙다 떨어지며 매서운 마찰음을 낸다. 삶을 신파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면 의식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제일 먼저 닫히는 문은 언제나 사랑이 혼자 쓰는 방의 것이다. 불을 끈다. 이불 안에 몸을 구겨 넣는다. 베개만 들을 수 있게 내쉬는 한숨이 버석하다.

 

  등을 웅그려야만 지나는 밤이 지겹다.



 


 

 

 

 

  1992년 8월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읍내의 작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 아빠는 엄마를 만난다.

 

  동네에 처음으로 생긴 레스토랑은 주말을 특별하게 보내려는 가족들과 연인들로 복작였다. 선하의 엄마와 아빠는 가족도 연인도 아닌 알바들이었다. 일주일 먼저 들어온 엄마가 아빠를 매장 이곳저곳으로 끌고 다니며 일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손님들이 쏟은 콜라를 닦거나 스파게티 소스가 덕지덕지 묻은 접시를 치웠다. 정말이지 사람들이란 무지막지하게 먹고 또 무지막지하게 흘리는 존재들이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종종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면 엄마는 격려의 의미로 꼬박꼬박 미소를 지어주었다. 아빠는 동료 간의 전우애를 다른 여지가 있는 호감으로 착각할 만큼 푼수는 아니었다.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면 아르바이트생들이 괜히 노닥거리지는 않는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점장이 잔소리를 꼭 한마디씩 던졌다.

 

  일과에서 가장 고된 부분은 먹다 남은 음식물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었다. 비위가 약한 선하의 엄마는 쓰레기통 근처에만 가면 습관적으로 코끝을 찡긋거렸다. 아빠는 아마 그 얼굴을 목격한 바로 그 순간 사랑에 빠졌으리라고 회고했다. 코를 기점으로 자글자글 잡히는 주름이 얼마나 귀여운지 진지하게 설명하려는 아빠를 엄마는 당연한 수순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길가를 걸으면 바싹 마른 흙먼지가 가열된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여름이었다.

 

  그로부터 꼬박 십 년 후 선하가 태어났다. 이례적으로 더운 해였다. 가을의 초입까지도 따라붙은 여름 햇살과 후덥지근한 공기 때문에 선하는 세상에 나자마자 땀띠로 한바탕 고생을 치러야 했다. 등가죽이 따가워 울던 유년의 기억은 어딘지 삐죽한 성미의 시초가 되었다. 키도 성적도 가정 환경도 뭐든지 중간. 딱히 불행하지도, 그렇다고 유달리 행복하지도 않게 자랐지만 채워지지 않은 한구석이 허했다. 코끝을 찡그려도 다가오는 사랑은 없었다. 콧잔등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땀방울만 훔쳐낼 따름이었다. 덥지 않아? 나만 그래?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돌아오는 건 대수롭게 으쓱거리는 어깨뿐이었다.

 

  북적이는 매점을 빠져나와 반으로 돌아가는 길, 슬리퍼 앞머리에 드러난 양말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쌍쌍바를 하나를 혼자 다 먹으려다 벌어진 참사였다. 입에 문 반쪽에 신경을 쏟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나머지 반쪽이 뚝뚝 녹아 흐르는 줄도 몰랐다. 욕심 내어 병 안에 든 사탕을 가득 쥐려다 입구에 주먹이 걸려 전부 놓치고 말았다는 우화가 딱 어울렸다. 하여간 칠칠지 못하게. 굳이 핀잔을 주는 친구를 한번 흘겨보고 책상 아래로 발을 숨겼다. 교실 건너편에 앉은 단정한 뒷모습이 눈에 걸렸다. 발끝을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갈색으로 물든 흰 양말처럼 마음 한구석이 번졌다.



 

 

 


 

 

 

  태주는 크다. 또래 사이에 섞여 있으면 불쑥 튄다. 그건 개개인이 발산하는 매력 같은 것과는 별개로, 순전히 물리적인 특징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기 때문이다. 교실 끝 맨 뒷자리는 항상 자타의로 태주의 몫이 된다. 그러면 태주는 느릿느릿 짐을 챙겨들고 교탁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 간다. 언제나 성실하게 반에서 가장 큰 애 역할을 수행하는 태주. 평균에 맞춰 제작된 의자는 평균을 훨씬 웃도는 태주에게는 조금 작다. 의자를 최대한 뒤로 빼고 앉아 다리를 뻗거나 책상에 딱 붙어 앉는 대신 다리를 마름모꼴로 구부리거나, 여하튼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밖에 없는 선택지만이 수중에 있다. 그러나 멀대라고 마냥 놀리기에 태주의 낯은 종종 고압적이다. 살짝 치켜올라간 눈썹과 완고한 입매가 그렇다. 가로로 긴 눈도 별로 성격이 좋아 보이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허나 입에서 막상 터져나오는 건 한숨처럼 질량을 얼마 갖지 못한 웃음이다. 웃을 때 태주는 손을 가만 두지 못한다. 고목의 옹이처럼 마디가 도드라지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눈앞의 책상이며 벽 따위를 마구 두드려댄다. 왼쪽 눈꼬리에 짙은 갈색 점이 하나, 오른쪽 뺨 구석에 옅은 점이 또 하나. 눈 밑에는 약간의 다크써클. 귓불은 부착형인데 이게 우성인지 열성인지는 일찌감치 잊어버렸다. 머리카락은 새까맣다. 얼굴은 별로 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태주의 태는 크다는 뜻의 태泰.

 

  태주는 우습다. 우습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태주는 선뜻 비밀을 털어놓을 상대나 감투를 쓰고 학급을 맡는 대표 따위의, 무겁고 진중한 일을 담당할 인물로는 결코 지정되지 않는다. 그건 부정할 수 없이 수상한 태주의 말투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거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화도 짜증도 장난도 무엇 하나에 진지한 순간이 없다. 지금껏 책임질 필요 없는 환경에서 자라 이제 와서 책임 같은 단어와 엮이기는 싫은 것이다. 태주는 느리고 가볍고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너스레를 잘 떨며 가끔 변덕을 부리고 자주 웃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태주의 주는 기둥이라는 뜻의 주柱.



 

 


 

 

 

  금요일 오전 여섯 시 이십삼 분

 

  엄마. 배수구가 또 막힌 것 같아요. 배관공을 불러야겠어요.

 

  M은, 치약 거품이 고인 세면대를 가만 바라본다. 이 치약은 치석을 구십오 퍼센트 제거하고 구취를 없애는 데 탁월한 성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약간 어그러진 채 세면대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튜브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손을 뻗어 수도꼭지를 비틀어 틀었다. 수돗물을 맞고 연녹색 거품이 묽게 희석되었다. 여전히 거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필시 머리카락이 엉기어 통로를 막고 있는 것일 테다.

 

  엄마!

 

  그제야 그는 자신이 제 귀에도 간신히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리는 중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토요일 오전 여덟 시 사십오 분

 

  오 피트 십이 인치면 몇 센티미터니? 냉장고에는 원색의 알파벳 자석들이 산만하게 늘어서 있다. A부터 Z까지 스물여섯 개, 아니 어디 갔는지 모를 F와 U를 제외한 스물네 개를 순서에 맞춰 다시 배열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어머니가 물었다. 간밤에 탁자에 놓아둔 통지표를, 어머니가 더듬더듬 읽어내리는 모습이 보지 않고도 그려졌다. 백팔십이쯤이요. 주황색 O가 유독 잘 떼어지지 않아 한참을 손끝으로 긁었다. 갑작스럽게 싫증이 나 정리를 관두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냈다. 저지방이었다. 백오십 파운드는? 크게 숨을 마시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의 흐릿한 눈동자가, 그의 귓바퀴에서 조금 빗겨난 곳에 머물렀다. 육십삼 킬로그램 정도일 거예요. 아니면 칠십삼이거나. 잘 모르겠어요. 너는 정말 꾸준히 자라는구나…… 누굴 닮았는지. 들이켠 숨을 내뱉지 못하고 그는 머뭇거렸다. 달리 누굴 닮았겠어요. 그러고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일요일 오후 아홉 시 이십칠 분

 

  이봐, 청. 집에 돌아갈 시간이야.

  조용히 해요, 골 울리니까…

 

  쿠션에 코를 박고 누워 있던 천 소파의 검푸른 얼룩이 낯익었다. 동급생 C의 집이었다. 풀린 눈으로 시간을 가늠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차없이 해부당한 피자 박스가 탁자에 널부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탁한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팔 하나를 소파 아래에 처넣고 침을 질질 흘리며 잠든 금발 남자애의 종아리를 가까스로 뛰어 넘었다. 지난 학기 스트레이트 에이 학생 조찬 모임에서 본 얼굴이었다. 학교 상담사가 건네주었던 설문지가 떠올랐다. 본인은 술 또는 담배를 합니까? 아니오. 본인의 친구 중 술 또는 담배를 하는 이가 있습니까? 아니오. 본인은 마약을 합니까? 아니오. 본인은 가정 환경이 불우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전부 멍청한 질문들이었다.

 

  집에는? 걸어갈 거예요.

  C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돌아섰다.

 

  기대서듯 현관문을 밀어 열자 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

 

 

 

  열 살 즈음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칸막이와 책상과 컴퓨터가 빽빽하게 놓인 사무실을 찾은 적이 있다. 하늘도 건물 외벽도 어머니의 발꿈치에 붙어 서서 보았던, 한인 직원의 가디건도 전부 회백색이었다. 회화는 가능한지…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잖습니까, 무엇보다 아이의 의사도 중요하고…… 하지만 덧셈 뺄셈은 또래 애들보다 잘하는 편이었어요… 어른들의 대화는 손장난을 치는 동안 부주의하게 흘려보내졌다. 그럼 몇 달 앞당긴 학년으로 입학시키도록 하죠. 한숨과 함께 사내의 허락을 얻어낸 어머니는 그제야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야. 매튜. 준호야.

  정준호.

  매튜 청. 이게 당신의 이름인가요?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운전 면허증을 땄지만 가로 삼과 팔분의 오 인치 세로 이와 팔분의 삼 인치짜리 플라스틱 조각은 그에 대해 어떠한 것도 증명하지 못했다. 발급일 2013년 X월 X일 만기일 2017년 X월 X일 사는 곳 123 XX Drive 디트로이트 미시간 눈 갈색 머리카락 갈색 성별 남성…… 풀 네임 매튜 준호 청. 이마저도 아버지의 낡은 2007년형 혼다 어코드를 몰 때가 아니면 별 쓸모가 없었다.

 

  재미교포 1.5세 어설프게 구사하는 부모님의 모국어 사진첩 안에만 잔재하는 유년

 

 

  그 언덕에는 항상 바람이 불었다

 

  만성적인 안개와 조각난 보도 블럭과 빗금 그어진 성조기가 펄럭이는 이 도시에서 우리는 영원히 이방인이었다. 소속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단지 낯익을 뿐인 거리를 맴돌면서, 과연 몇 번 국도가 비로소 우리를 반기는 곳으로 데려다줄지 의문을 품었지만 A도 나도 서로를 만족시킬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연필을 쥐고 놓지 않는 법을 알았고 B는 그 모습을 제법 잘 인내하며 지켜볼 줄을 알았다. 노란색 HB 연필 끄트머리의 뻑뻑한 분홍색 지우개가 성가신 흔적을 남기고 흑연 가루를 흩뿌리면 B는 내가 풀던 문제 위에 제대로 된 흰 지우개를 올려두고는 했다. B가 종종 디텐션으로 학교에 남을 때면 역할이 뒤바뀌었다. 나는 B가 자신의 BIC 볼펜을 굴리는 동안 B의 반성문에 드물게 두어 문장을 추가하거나 무례한 어휘를 정중한 표현으로 교체해주었다. 지루한 시간이 끝나면 우리는 윌리윌리로 가 무릎이 맞닿는 좁은 탁자에 마주보고 앉아 감자튀김과 코카콜라 한 잔을 시켜 나눠 먹었다.

 

  저만치 굴러 가버린 공을 주우러 갈 기력도 없었다. 아스팔트로 된 농구장 바닥에 주저앉아 마운틴 듀 하나를 나눠 마시면서, C와 나는 적어도 내일은 불행이 우리를 찾아오지는 않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렸다.

 

  D. 나에게 하고 싶은 말 없어?

 

  말린 양귀비도 위스키도 우리를 즐겁게 해주지 못하는 밤이면 'H로 시작하는 작가 이름 대기' 따위를 주제로 E와 나는 곧잘 내기를 했다. 헤밍웨이, 헤세, 호손을 거쳐 둘 중 하나가 하퍼 리를 내뱉었을 때 그의 패밀리 네임을 존중해 L 계열에 추가할지, 개성을 존중해 H 계열에 포함시킬지를 논하는 동안 우리는 잠깐 치열해졌다가 금세 시들어버렸다. 남은 만큼의 지루한 밤은 모노폴리나 스크램블로 아날로그하게 소모되거나 엑스박스 360의 요란한 효과음과 함께 저물었다.



 

 


 

 

 

  "모네의 그림을 본 적이 있어?"

  아스터가 문득 물었다설원은 지평선 너머에서 시작되어 발 밑을 지나 저 앞으로 뻗어갔다눈길이 닿는 곳마다 경이였다종종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에서 미끄러지는 눈더미나 처마 밑에 매달린 고드름 따위가 그를 매혹했다하퍼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아쉽다봤다면 너도 좋아했을 거야."

  "글쎄." 하퍼는 아스터의 말에 동의했지만 괜히 심술을 부렸다.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데?"

  "구겐하임모마런던 내셔널 갤러리오르세아스터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이름을 댔다뉴욕에 살면서 현대 미술관에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니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그런 걸 함부로 말하는 건 실례라는 걸 알았다. "눈이 그치면 함께 보러 가자네 동생이랑." 들뜬 목소리가 잠시 머뭇거렸다뒷말은 확신 없이 나왔다. "내 동생도."

  "로즈는 좋아할 거야." 하퍼는 입장료를 생각했다그러자 침울해졌다. "그 앤 그래도 자연사 박물관은 가봤거든로즈가 체험 학습을 할 나이가 됐을 즈음에 엄마의 수입이 조금 늘어나서… 운이 좋았지." 푸르죽죽한 팬지색 입술이 이내 꾹 다물렸다.

  "다시 생각해보니까," 아스터가 재빨리 대꾸했다. "모네의 그림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풍경만큼은 못한 것 같아."

  "그렇구나." 그럴 리가 없었다그렇다면 사람들이 무엇하러 모네의 그림을 보러 파리로런던으로뉴욕으로 가겠는가하지만 하퍼는 아스터의 친절이 고마웠고그게 그가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니 인생은 과연 싱거운 것이었다.

#책을_하나_골라_62페이지의_열_번째_문장을_모티브로_캐를_짠다

 

 

  구원은 야구방망이를 휘둘러 좀비37의 머리를 으깨며 제 이름이 얼마나 우스운지에 대해 생각한다. 또 좀비 38의 정강이를 때려부수기 직전 통용되는 의미 그대로 한자를 가져다 쓴 몰상식한 아버지를 원망하는 시간도 잠시 갖는다. 어쩌면 그의 삶은 출생신고서에 南救援 세 글자가 적히는 순간부터 꼬였을지도 모른다. 구원은 팔을 휘둘러 좀비39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홈런! 가상의 팡파레가 울려퍼진다. 백팔십 대의 키와 볕에 그을린 피부에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배트를 잡아온 티가 역력했다. 이런 식으로 재능을 꽃피울 줄 알고서 아버지가 아홉 살 구원을 꼬마 구단에 처넣지는 않았을 테다. 아버지는 단지 자녀를 가입시키면 제공되는 분기별 경기 관람권 몇 장이 탐났을 것이다. 당시 구원은 야구 유니폼보다 합기도장에서 나눠주는 허리띠가 더욱 탐났기 때문에 잔뜩 심통이 나 있었지만 실은 실내 야구장이 풍기는 텁텁하고 까끌한 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구단 야구장에 걸려 있던 초록색 그물을 생각하며 구원은 좀비40과 41의 엉덩이를 차례로 걷어찬다.) 구원은 언제든 어디서든 그런대로 인생을 살아내는 아이였다. 그러니 원인 모를 병이 창궐하여 (구원은 이런 어휘가 제 머릿속에 들어있다는 사실에 종종 놀라곤 한다.) 침을 질질 흘리고 다리를 절며 괴상한 신음소리를 내고 사람 먹기를 좋아하는 좀비로 전 국민의 38퍼센트가 변해버려도, 그러니까 종례 도중에 담임이 그의 팔뚝을 물어뜯으려 달려들 때도 크게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과연 인생이란 싱거운 것이다. 좀비 사태로 모든 경기가 취소되고 생필품 가격이 치솟고 곳곳에서 폭동이 발생하는데도 아버지 같은 인간은 잘못 설치된 입간판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구원은 뺨에 묻은 좀비52(아버지 생각에 울컥한 탓에 이만 숫자를 헷갈렸다.)의 살점을 떼어낸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번 제 이름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상기해내고 문득 아득해진다. 그런 이름을 타고난 저를 구원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구원은 낙타같이 끔벅거리는 눈을 갖고 있다. 사내애 주제에 속눈썹이 길다는 말을 듣기 싫어했다. (그 말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편견이 들어있는지 알기나 하냐고 구원은 자주 투덜댔다.) 왼쪽 뺨에는 카시오페아좌처럼 생긴 연한 갈색 점 다섯 개가 도드라졌다. 콧날을 중심으로 햇빛 아래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기미가 흩뿌려져 났다. 눈썹 역시 눈꼬리 바깥 부분부터 짙고 숱이 많았다. 앞머리가 이마를 엉성하게 덮었다. 입술이 얇은 데다 혈색 없이 푸르죽죽해 구원을 이루는 것들 중 유일하게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마디가 길고 큼직하나 군데군데 흠집이 나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손발을 가졌다. 전체적으로 탄탄하고 늘씬한 몸. 키가 조금 더 자라기를 바라고 있다. 긴장하면 손날로 눈썹께를 문지르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실상 구원은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버릇이란 게 행동으로 구체화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기대와 체념의 무게를 가늠하는 데 익숙하다. 가볍고 군더더기 없는 성정이나 언뜻 무미건조하다. 구원은 다시금 곱씹는다. 생각해 보니 인생은 과연 싱거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