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증 (200805)
성장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강압적이고 무자비하게 이루어진다. 원래대로라면 평행하여 결코 만나지 않았을 삶들이 더스티홀로우라는 교차점에서 충돌하여 깨지고 결합하고 확장되었다. 4년 전, 포말을 일으키며 섬으로 전진하는 고물 배에 올라탄 순간 잭 서머셋의 세계는 이미 고통스럽게 찢겨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낡고 더럽고 구차한 커크 포트의 빈민가에 한쪽 다리를 묶인 채로,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못한 모호한 입장이 되어 내내 뭍을 오간 것이다. 쥐가 갉아먹은 벽지나 밟을 때마다 소란스럽게 삐걱거리는 널빤지, 오줌 지린내를 풍기는 담벼락에 둘러싸여 그것이 그의 전부인 줄로만 알고 지냈던 시절은 이제 영영 끝이 났다. 미래로의 분기점에 되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저 시간의 급류에 떠밀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고 간혹 서로의 곁을 스치며 손을 잡을 때도 있지만 연결과 유대는 잠시일 뿐, 종국에는 여러 갈래로 산산이 흩어진 삶의 향방에 따라 조각배처럼 외로이 흐를 운명이었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유진을 앞에 두고 잭 서머셋은 그들이 한 쌍의 겁쟁이들 같다고 생각한다. 나약하기로는 출신을 가리지 않고 비등하다고. 우아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그는 적의와 수치의 냄새만큼은 기민하게 감지할 줄 알았다. 알고도 모른 체하는 쪽이 거짓된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덜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비겁하게도 그는 줄곧 그의 친구가 자신을 부정하는 순간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했다. 일단 부서지고 난다면 숨죽여 자신을 감추지 않아도 될 테므로.
고작 한 번 허락된 인정과 만남에의 기약 앞에서 잭은 표정을 가다듬는다. 딱 가진 만큼만 다정하고 너그러운 그의 친구. 언젠가는 어머니를 따라 데메트리의 의원이 되겠다는 유진. 애석하게도 잭은 그녀의 어머니를 모르고 유진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설사 눈을 마주했더라도 유진의 시선은 잭이 보지 못하는 먼 곳에, 환희와 광채가 밝히는 미래에 가 닿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은 그러겠노라 대답한다. 이 시간을 얼마나 더 유예할 수 있을지 의문하며 약속한다.
깃발 앞에 선 소년과 소녀가 있는 풍경 (200808)
루테스 콘웨이가 박물관의 동쪽, 해가 뜨는 방향에 전시관을 설치하겠다고 기획했을 때 그에게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거나 없었을 가능성은 딱 절반씩이었다. 역사학자가 가치 판단을 내려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은 인류가 기록을 시도하는 한 종결되지 않을 테므로 그가 사료를 수집하고 대중과 공유하는 일의 어떤 부분에서 보람을 느꼈는지는 영영 사사롭고 모호한 영역으로 남았다.
잭 서머셋은 루테스 콘웨이가 금발인지 흑발인지, 그린 힐의 조부모 댁 다락방에 처박혀 백과사전을 탐독했는지 아니면 일찍이 데메트리의 명문 사립 학교에서 국립 대학으로 진학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지, 저서는 훌륭하나 강의실에서는 심하게 말을 더듬는 수줍은 학자인지 혹은 의회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의견을 개진하는 달변가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실은 그 사람의 이름조차 15분 전, 시민의 전당으로 들어서는 길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신분의 귀천이 존재하던 시절을 은유하듯 전시실은 어둑했다. 벽면에 루테스 콘웨이와 그가 지도하는 대학 연구팀의 약력과 전시 의도가 적혀 있었다. 언제나처럼 잭은 줄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시민의 전당’에서 이해하는 부분이라고는 조사 ‘의’뿐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어쨌거나 건물을 부르는 이름이니 전당이란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표현이란 것쯤은 잭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시민은 무엇인가? 잭에게 묻는다면 그는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할 만큼 멍청하거나 미련한 사람에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일 것이다.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 목록이 그가 들려줄 수 있는 최선의 답변이었다. 하지만 진실로 잭을, 덤펠의 버러지들을 시민이라고 볼 수 있는가?
인과는 쉽게 혼동된다. 어쩌면 그들은 빈민가의 시궁쥐이기 때문에 무지몽매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고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덤펠 신세일지도 모른다. 운 좋게 학교에 들어와서 우수한 성적을 받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다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그 인맥의 도움을 받아 일자리를 얻는다면 그다음은 무엇일까. 수도의 말끔한 주택단지에 거처를 구해 부둣가의 가족들을 그리로 전부 옮기면 되나? 그러다 실수로 일을 망친다면? 친구를 화나게 해 우정마저 잃는다면? 잭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은 타인의 호의에 기대어 삶을 꾸려갈 여유가 없었다. 마음이란 너무나도 쉽게 손상되고 보답받지 못한 신뢰는 크나큰 타격으로 되돌아왔다. 동냥과 적선이야말로 가진 것 없는 인생에서 기피해야 하는 함정이었다.
헤르체프의 시민혁명은 문서와 투표로 진행되었다. 유혈이 동반되지 않았으므로 전시품은 대체로 서신과 신문, 개정된 법전을 옮겨 적은 종이 따위였다. 잭은 계몽의 빛이 지식인의 펜촉에서부터 피어나기 시작해 전국에 드리우는 과정을 감흥 없이 지나쳤다. 전대 왕의 처형 장면은 그나마 사진으로 남아 있었으나 발길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빠르게 전시실을 통과하던 그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걸음을 늦추었다. 리본을 잔뜩 달아 꾸민 머리칼에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작은 여자애. 엘리자베스가 눈앞에 있었다. 수학여행을 오기 전 다툰 뒤로는 단둘이 마주하는 것이 처음이었다.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른 척 넘어가야 할지 고민하는 새 인기척을 느낀 엘리자베스가 돌아보았다. 잭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다 마음을 바꾸었는지 발길을 돌려 조금 떨어진 위치에 멈춰 섰다. 엘리자베스의 생각이 들리는 듯했다. 아마 그녀 자신이 잘못하기라도 한 듯이 도망쳐야 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겠지.
엘리자베스는 심통 난 얼굴로 꿋꿋이 잭을 외면했다. 벽에는 갖가지 액자가 걸려 있었다. 잭은 엘리자베스로부터 두어 작품 정도 뒤처져 관심도 없는 전시품을 면밀히 관찰하는 척했다. 엘리자베스에게서도 짜증 난 기색이 느껴졌지만 먼저 물러나는 것은 꼭 패배처럼 느껴졌기에 두 사람 모두 천천히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등 뒤로 깍지를 끼고 액자를 들여다보는 엘리자베스의 옆모습을 흘끔 훔쳐보았다. 누구든 그 애를 사랑하지 않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가족과 떨어지기 아쉬워 밤낮을 눈물로 지새우던 시절을 잭도 기억했다. 아낌없이 사랑받아 본 자만이 그리움을 알았다.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여도 받아들여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왜 쳐다봐?”
상념에 빠진 잭에게 샐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자베스가 허리를 짚고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거나 부인하는 대신 잭은 순순히 인정했다.
“엘리자베스.”
한 대 때리겠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뒷덜미를 벅벅 긁었다. 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차라리 얻어맞아서 감정이 해소된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정말로 물어봤자 화를 부추기는 꼴만 될 거라는 눈치 정도는 있었다. 대신 잭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고민해왔던 이야기를 꺼냈다.
“넌 아마 평생 나를 모를 거야. 난 너를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래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어.”
엘리자베스가 팔짱을 끼고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뚱한 표정에는 변화가 없어 그의 말이 가 닿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우린 겨우 열네 살, 열다섯 살이니까. 남은 시간 동안 내가 널 밀어내지 않고, 네가 내게 상처 주지 않는 거리를 찾아내면 돼. 적어도 시도할 수는 있어. 전에 네가 그랬잖아. 해볼 만하다며.”
잭은 불량스럽게 짚고 섰던 다리를 펴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떻게 생각해?”
질문을 던지고서 잭은 엘리자베스에게서 돌아서서 다시금 유리장에 시선을 두었다. 대답을 들으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는 개의치 않았다. 박물관을 떠나 데메트리를 한 바퀴 돌고 더스티홀로우로 돌아가서야 답을 받는대도 괜찮았다.
장 안에는 사진이 아닌, 때 묻고 해어진 깃발이 있었다. 드물게 인내심을 보이며 잭은 금속판 새겨진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신분제 철폐가 투쟁의 끝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 해 8월, 어텀빌의 광산에서 덤펠 출신 광부가 감독관에게 구타당해 숨진 사실이 밝혀졌다. 시민들은 애도하고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52일간 지속된 파업은 해당 감독관의 파면과 광산업계 최초의 노동 조합 결성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아마도 루테스 콘웨이 본인이 직접 작성했을 이 구절은 잭으로서는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문장으로 마무리되었다.
<자유는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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