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뉴턴 제일 법칙. 모든 운동하는 물체는 힘을 적용받지 않을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성질을 가진다.


  공부와는 김태희와 프로 레슬링만큼의 관계성을 갖는 내가 작년 과학 시간에 졸다가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가도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올리면서 추려낸  가지였다. 관성에 대한 설명이었다. 나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이후로 나는 종종 중얼거렸다.


  복싱은 관성의 스포츠다.


   변이  미터 내외인 정사각형의  위로 형광등의 표백된 빛이 쏟아지고,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함성은 파도 소리처럼 의미를 잃는다. 상대의 형형한 눈빛만이 나를 옭아맨다. 마우스피스가 잇몸을 짓누르고 글러브 안에는 땀이 찬다. 오른팔뚝으로 상대의 스트레이트를 막아내고 왼손 잽을 내지르면서도 틈을 보여서는  된다.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순간 빈틈을 발견한 주먹이 날아든다. 다리가 후들거린다고 가드를 내렸다가는 RSC 선언될지도 모른다. 팔을 뻗고 다시 수그리고, 관성 아래 놓인 물체처럼 운동 상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상대에게 헤드기어를 붙잡히고 복부를 가격당해  위에 쓰러져 눕고 싶은 충동이  때면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복싱은 관성의 스포츠다.


  전날 나보다 키도 작은 상대에게 매섭고 재빠른 주먹으로 얻어맞아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래도 쥐고 있던 샤프는 놓지 않으려 애썼다. 교과서를 읽어내리는  분단 아이의 목소리가 귓전을 댕댕 울렸다. 쓰지 않은   달은 넘은 형광펜을 들어 밑줄도 쳤다. 짝꿍이 나를 돌아보며 웬일로 딴짓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느냐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모른  고개를 숙이고 교과서에 얼굴을 박았다.


  병결하는  낫지 않겠니. 아침 일찍 등교해 마주친 담임 선생님이 물으셨다. 나는 애써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술이 터져 쉽지 않았다. 반창고가 떨어져 나오지 않도록 조심스레 입술을 비틀었다. 아니오 선생님. 수업 듣고 갈게요. 선생님은 그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나는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교실   자리를 찾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엎드렸다. 이왕이면 아이들이 오기 전에 잠들 생각이었다. 조회가 끝나고 1교시가 시작되기 직전에는 마음을 고쳐먹고 교과서를 꺼내와 바로 앉기는 했지만 사물함까지 다녀오는  길에 누가  얼굴을 보고,  눈을 들여다보고 어제의 경기에 대해 물을까봐 나는 예민한 새끼 짐승처럼 굴었다.


  아마추어 권투에서는 웃옷을 입고 시합을 치른다. 경기가 끝나고  묻은 런닝셔츠를 찬물을 담은 대야에 담그면 붉은색이 배어나왔다. 어머니는 베란다 뒤편에 쭈그리고 앉아 비누로 셔츠를 문대다 말고 흐느끼셨다. 나는 어머니께 딸기라도 씻어달라고  참으로 나왔다가 당황스러워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영화야. 어머니는 젖은 목소리로 돌아보지 않은 나를 불렀다. 이런 , 이제 그만 하면  되겠니. 그날 나는 2라운드 38초에  번째 스탠딩 다운으로 패배를 판정받았다.  곳곳에 검푸른 멍이 수련처럼 피었지만 그보다도 어머니의 굽은 등과 충혈된 눈이  마음을 더욱 쑤셨다.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어린애처럼 어머니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고집이  첫째 형과 반항이 심했던 둘째 형에 비해 온순한 막내였던 나를 부모님은 어르고 격려하며 예뻐했다. 욕심 많은 새언니들을 제치고 왕자와 결혼하는 신데렐라처럼, 현명하게 벽돌집을 지어 늑대로부터 형제들을 지켜내는 셋째 돼지처럼 나는 내가 형들보다도 든든한 기둥이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랐다. 그러나 결국  아들 중에서 제일 가는 불효자는 내가 되었다. 불효라는 것을 알면서도 복싱을 놓지 못하는  죄송해서 나는 어머니를 껴안고 울었다. 내가 울음을 그칠 즈음 어머니는 나를 떼어 놓고 물었다. 그래도 계속  거지, 너는. 그깟 관성이 뭐라고 기어코  위로 회귀하는 것일까.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2017



  동백은 미미의 헐벗은 메마른 등을 본다. 자세를 바꾸어 앉을 때마다 등골뼈가 울룩불룩하게 도드라진다. 미미의 몸이불러일으키는 욕망은 하찮고 보잘것없다. 너무 말라서인지 미미는  팔리지 않는다. 그럴수록 사들여야 하는 가방 향수 화장품 따위는 점점 늘어나고 부채는 하루하루 몸덩이를 불리는데 미미는 고작 발톱에 색을 칠하는 걸로 막연한 불안감을 외면하려 한다. 동백은 미미가 한심하다. 어쨌거나 매니큐어의 독한 싸구려 냄새가 이불에 배지 않도록 창문을 열어준다. 바람이 불어 들어온다. 미미는 웃는다. 오늘의 색깔은 진홍색. 동백은 손쉽게  함의를 이해한다. 미미가 동백의 발을 끌어다가 새끼 발톱을 정성스레 칠한다. 다른 한쪽 발도 마찬가지다. 동백은 미미가 그러도록 내버려둔다.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색이  벗겨지기 전에 미미는 자취를 감춘다. 영영 사라진다. 누군가 고의로 없앴다는 표현이 가장 적확할 것이다. 동백은 개의치 않는다. 그동안 미미를 찾은 이유는 오로지 미미의  구석에 놓여 있던 걸쭉한 거울이기 때문이다. 여자 혼자서는 결코 옮기지 못할 것을 들고 날라준 대신 때때로 찾아가 들여다보고는 한다. 미미가 머무른  개월 동안 동백은 느즈막이   정도 자란다. 거울 위편에 붙은  開業에 닿지도 못하던 머리가 이제는 개와  사이로 들어간다. 멸렬하고 난폭했던 소년기는 미미의 실종과 함께 막을 내린다.  자리를 채울 다음 여자가 들어오기 전에 동백은 거울에 작별을 고한다.‬


  스물이 되었는데 바뀐  거의 없다. 그래도 만족한다. 아직 앳된 기색이 남아 있는 얼굴이 마음에 든다. 동백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실재하는 자신. 가장 신뢰하는 것은 감각하는 자신. 가장 갈망하는 것은 거울 속의 자신. 세계는 거대한 자아와   없는 나르시시즘으로 이루어진다. 종종 궁금해진다. 미미는 외로웠을까. 온전히 사랑하고 구원할  있는  자신뿐이라는  모르는 채로 차갑고 외롭게 죽었을까.‬






2017



  생각보다  춥네.


  우주는 무감하게, 그러나 습관적으로 목도리에 코를 묻는다. 바람은 어쩐지 습하고  차갑다. 무심코 현관에 발을 딛으려다 머뭇머뭇 신고 있던 운동화를 벗어 내려놓는다.   입고 버릴 테니 괜한  들이지 말자는 변명과 함께 건네받은 중학교 교복은 원래 형의 것이었어서 그런지 팔꿈치나 엉덩뼈가 닿는 곳이 지나치게 반질거렸다. 소매가 너무 길거나 어깨가 너무 좁은 , 혀끝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언어,  번을 여닫아도   같지 않은 사물함 따위로 서울은 가득 있다. 학제가 달라 가을이 되어서야 편입한 학교에서는 마음 붙일 마땅한 상대도 사물도 찾지 못하고 내내 어색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표정 그대로 졸업해버렸다. 다시 누군가의  옷을 물려 입기 싫어 부득부득 형과는 다른 학교를 지망했다.


  그래서 새로 맞춘 교복이 모난 마음을 조금 달래주었느냐 하면   모르겠다. 어쨌거나 돌아온 겨울은 작년보다는 조금  추운  같고 그건 아마도 익숙해졌기 때문이라고 우주는 짐작한다. 이제는 걸려온 전화에 헬로보다 여보세요라고 대꾸하는  편해진 것도, 노란색 스쿨 버스 대신 초록색 순환 버스를 타는 일도 마찬가지다.




2018



  거실 탁자에는 항상 작은 은쟁반이 놓여 있다. 매일 아침 아주머니가 저마다 챙겨 먹어야  영양제를 꺼내서  위에 채워 두면 자기 몫을 찾아 삼키는 것으로  집의 일과는 시작된다. 내게 할당된 약은 투명한 금색  하나와 작고 단단한 남색 알약  개다. 개봉 전의 용기나 상자를  적이 없으므로 무엇에 좋은 약인지는 모른다.  멀리 미국에서도 비싸게 팔린다는  굳이 마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필라델피아에서 대학원에 다닌다는 젊은 외삼촌은 부채감 때문인지 자꾸만 무언갈 사서 보내려 했다. 그게  우리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인데. 어머니와 아주머니가 바다를 건너   보따리를 부산스레 풀어 헤치면 아버지는 곁에서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집안 곳곳은 외국에서만 구할  있다는 진귀한 물건들로 채워졌다. 원래 내가 먹던 약은 투박한 황록색이었다. 기왕이면 색이 예뻤으면 좋겠어요. 편지에 그렇게 적어 보냈더니  다음달부터는 특별히 찾아다녔다는 쪽지와 함께 지금의 것을 받았다.    잠시 귀국한 삼촌은 약의 효용보다 빛깔을 따지는 조카가    먹은 남자애일 줄은 몰랐는지 나를 마주하고 잔뜩 낯을 구겼다. 당황해서 선물 꾸러미를  뒤로 숨기는 손을   체하며 나는 가만히 웃었다. 아버지에게 삼십   양주를, 어머니에게는 엄지 손톱만한 진주가 달린 목걸이를 건네고도 끝내 나와는 눈을 맞추지 않았던 삼촌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컴퓨터를 보냈다차라리 미국에서 제일 크다는  도시의 미술관에서 도록을 사서 보내주었다면   진실하게 감동할  있었을 텐데. 몰이해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감사 카드를 꾹꾹 눌러 썼다.


  안중에 있으면 없다가도 생기는  관심인지라 결국 책상에 쌓아둔 책들을 밀어내고 컴퓨터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삑삑 낯선 소리를 내며 화면에 파랗게 불이 들어온다. 점멸하는 커서를 따라 멍하니 눈만 껌뻑인다. 부모님은 컴퓨터를 만지다 보면 자연스레 공학에도 마음이 끌리게 될지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글쎄. 그런 기대를 걸기에는 고민 끝에 정한 아이디가  마음에 들었다.


  날이 부쩍 추워졌다. 몸을 떨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었다가도 깨어날 때는 후덥지근한 공기에 숨이 막혀 눈을 뜬다. 실내화를 끌고 내려가 오늘  약을 주워 삼킨다번번이 목에 걸리는 서툰 정성을 외면하는  같은   모르겠다. 눈앞에 내밀어진 날것의 진심들은 항상 너무나 안쓰럽고 애틋해서 도저히 모른 척하기가 어렵다. 지지난달 뺨을 때리고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는 그걸 기만이라고 불렀지만 모질게  바에야 나는 차라리 안온한 마음 뒤에 숨는  택한다. 그래서일까가짜 이름을 내걸고 주고받는 이야기들은 내밀할수록 오히려 가볍게 잊어버려도   같다.






2018



  형이 죽었다.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 맞이하는 끝은 형이 지휘하던 함선의 이름처럼 조용하고 아득했을 것이다. 연결이 끊긴 12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선체가 반파되고 남은 흔적만이 뒤늦게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지구와의 마지막 통신에서 형은 화면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적색 경보를 선언하고 대원들을 대피시키던 형의 마지막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채웠다. 까맣게 빛을 잃은 눈에 담긴 것을 나는 곧장 알아볼  있었다. 그건 언어로는 차마 형용할 없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의 깊고 진득한 무력감이었다.


  사람들은 형의 죽음을 두고 고결한 희생이라고 칭송했다. 형은 순교자였다. 곧장 투항하는 대신 브릿지에 남아 최후의 순간까지 대치한 덕분에 수백 명의 대원들이 구조선을 타고 벗어날 시간을   있었다. 형의 직속 상관이었던 소령의 브리핑에서, 신문 기사에서, 장례식장의 연단에  참모총장의 연설에서 형의 죽음은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작별 인사조차 고하지 못할 만큼 내몰려 있었기에 생도 시절 관례로 작성했던 유언장이 형의 유서가 되었다. 죽음이 요원하던 시절 남긴 단어들은 한없이 가볍고 장난스러웠다. 유언장보다는 편지에 가까웠다. 부모님께 드리는 감사와 사죄의  뒤에 찬찬히 적힌 소중한 사람들의 이름들. 시간에 쫓기기라도 했는지 마무리가 엉성했다. 형이라면 글을 쓰다 말고 울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되는 모아둔 돈과 소지품을 전부 나에게 넘기겠다고 써버린 탓에 형이 쓰던 물건들은 고스란히나의 것이 되었다.


  한밤중의   대로를  번이고 가로질렀던 적이 있다.   보도에서 다른 쪽으로 옮기는 걸음마다 손끝이 저렸다. 긴장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중앙선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밤의 도로는 노랗고 한적하고 그래서인지 처량했다. 고요한 평화는  해의 마지막 시험이 치러지는  침몰했다. 스타디움 앞에서 대기하던  누군가 다급하게  이름을 불렀다. 어깨를 붙들리자 실체 없는 불안이 결코 웃어 넘길  없는 것으로 살갗에  닿았다. 결국 1학년 우주전투 과목은 낙제했다. 엄습하는 구체를 마주하고도 움직여 맞설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 형이 살린 목숨들의 무게에 대해 생각했다.  명의 희생으로 지속되는 수많은 삶들.  사람들이 지탱하는  다른 인생들. 아이러니하게도  이상죽는  두렵지 않았다.


  쉬이 죽어서는  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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