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길을 잃었는가
다만 춤추고 있을 뿐인가
죽음은 택배 상자에 담겨 온다

 

 

 

 

지난 월요일, 육만 육천육백육십육 개의 택배가 지구 전역에 동시다발적으로 배송되었다.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지만 수신인으로 지목된 이들은 일제히 현관 앞을 확인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집배원의 기척은 감지되지 않았고 발치에는 성인 남성의 손바닥 두 개만 한 폭의 아담한 소포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정체불명의 상자는 시차에 개의치 않고 한꺼번에 개봉되었고, 포장을 뜯은 사람들은 전부 그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센트럴 타임 존에 속한 이사라의 도시에서, 택배가 도착한 시각은 저녁 여덟 시 무렵이었다. 늦은 저녁 식사를 끝내고 설거짓거리를 싱크대로 옮기던 이사라의 부친은 홀린 듯이 방향을 틀어 밖으로 나섰다. 그가 부주의하게 식탁 가장자리에 내팽개친 접시가 기어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다. 파편을 치우고 뒤늦게 아버지를 쫓아 나갔을 때, 현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차 키나 지갑은커녕 담배조차 가지고 나가지 않았다. 이사라는 경찰을 부르는 대신 곧장 아그네이를 찾아갔다. 실종 후 48시간이 골든타임이라는 법칙이 이 경우에도 적용될지는 미지수였으나, 어쨌거나 아그네이에게로 이르는 시간을 단축하는 게 덜 헤매는 길이었다.

아그네이는 이모 댁의 차고에 살았다. 듣기로는 고등학생 때부터 세를 내고 그곳에서 지냈다는데, 이모가 동화 속 계모들처럼 악인이어서는 아니었다. 이모 부부는 오히려 방 하나를 내어줄 테니 조카가 제발 평범하게 주택 안에 들어와 지내길 원했지만, 아그네이 자신이 밤새 온갖 실험을 벌이고 또 가족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독립을 완강하게 주장했다. 고집은 아그네이의 이모 나나루도 독불장군인 그녀의 조카 못지않아서, 법적인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집을 떠나 사는 건 결코 안 된다고 꿋꿋이 반대했다. 결국 그들이 찾은 타협점이 차고를 개조한 독채였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문이 열려 있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하지만 차고의 셔터는 굳게 닫혀 있었다. 이사라는 잠시 고민하다 철문에 파인 골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다른 곳보다 반질거리는 부분이 있었고, 그곳에 슬쩍 무게를 실어 누르자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기울면서 위로 올라갔다.

어두운 방 안에 아그네이가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다.

“안녕, 아그네이.”

이사라는 깡마른 등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아그네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벽면을 덮은 스크린에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변칙 사건 영상이 띄워져 있었다. 겨울철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이 확대된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 CCTV로 녹화된 저화질 영상이었다. 각도상 상자 속 내용물은 머리통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주변만 검푸른 빛이 번지듯 일렁였다.

“저건 <시공간 연속체의 균열>이야.”

인사를 생략하고 대뜸 본론으로 들어가는 화법은 이사라도 익숙했다.

“원인은?”

“아직은 알 수 없어. 의도되었는지, 우연인지도 모르겠고.”

“그럼 어떻게 해?”

“보수 공사를 해야지.”

이사라는 속으로 셈을 해 봤다. 전 세계 칠십억 명의 인구 중 육만 육천육백육십 명. 십만분의 일도 안 되는 확률에 그녀의 아버지가 포함되었다.

“왜 하필 우리 아빠한테 그런 일이 생긴 걸까?”

“다른 모두에게 다른 모든 일이 벌어지는 이유와 똑같아. 무작위지.” 아그네이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향했다. 공구 상자 속에는 온갖 물건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드라이버나 렌치와 같이 기본적인 공구 외에도 형광 녹색의 털실, 얇은 실리콘 도마, 종이컵과 대바늘, 플라스틱 포크, 휴대용 케첩 등등. 그 속에서 아그네이는 용케 필요한 것들을 찾아냈다. 고글을 꺼내 정수리에 끈을 고정하고 인두기 전원을 꽂고서 그녀가 덧붙였다.

“…나와 어울린 게 가중치로 작용했을 수도 있고.”

아그네이 주변에서는 사건의 중력이 기묘하게 작용한다. 그녀는 강한 자성으로 비일상을 끌어들였다. 그들은 이미 한 번 소행성 충돌을 막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적이 있었다. 몬테카를로 카지노의 룰렛에 얽힌 암호를 풀어 베른의 입자가속기를 정지시키고, 런던 대공습 기간에 무너질 뻔한 고아원을 화재로부터 지키기도 했다. 그러니까,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위 안의 일이었다. 원망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이사라의 주의를 끈 건 다른 부분이었다.

“너 지금 뜸 들인 거니?”

“뭐?”

아그네이가 안전 고글을 이마 위로 끌어올리며 반문했다.

“주저했잖아.”

“내가?”

“응.”

“설마.”

시치미를 떼며 아그네이가 다시 고글로 눈가를 덮었다. 실험대 위의 회로에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그네이는 이사라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욕설이 분명한 단어를 중얼거리고는 수습에 나섰다.

가설 앞에 붙어 제시된 찰나의 공백은 아직 규명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였다. 아그네이는 강한 자기 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 이상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감정에 좌우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망설임은 죄책감의 발로였을까? 이사라의 아버지가 곤경에 처하는 데 그녀가 어느 정도 기여했다는 산술적 결과가 도출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아그네이의 태도로 보건대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아니었다. 수습이 가능하다면 사과는 불필요하지, 이사라는 생각했고 그런 자신에게 깜짝 놀랐다. 계산적이고 딱 떨어지는 사고방식은 전혀 그녀답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예의를 차리고, 또 이미 불가피하게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도의적인 제스처로서라도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게 보편적이었고, 평범하고, 통상적인 방식이었다. 뭐든 고칠 수 있고 때로 이전보다 더 나은 수준으로 개선할 수도 있으므로 기분은 수식에 개입할 여지를 두지 않는 건 오히려 아그네이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닮아가고 있었다.

이사라는 이 변화를 달가워해야 할지, 꺼려야 하는지, 혹은 원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했다.

그 순간 아그네이가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달칵 채워 온 것이다.

“가자.”

그렇게 말하는 제멋대로에 고집불통인, 어쩌면 지난 몇 달간 서로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은 가까워진 삐죽 머리 여자애 역시 손목에 접합부가 드러나지 않는 매끈한 팔찌를 차고 있었다.

이사라는 이번에는 목적지를 묻지 않았다. 그녀는 순순히 아그네이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섰고, 아그네이는 무뚝뚝하게 손목의 장치를 두드려 조작했다. 그녀의 입술은 완고하게 다물렸지만 눈썹은 불만스럽게 비틀리는 대신 일자로 균형을 이루었다. 그건 그녀로 따지자면 미소와도 같았고, 그제야 이사라 역시 입가의 힘을 느슨히 풀고 미소를 지었다. ■ (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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